〈 541화 〉 541.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541.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필타니아 공작가는 은원을 확실하게 맺고 끊으리라. 21번. 너의 공과 충성심을 인정하마. 바라는 것이 있느냐?”
공을 세웠으면 당연히 보상을 준다.
아랫것들을 다루기 위한 기본이었다. 이 세상에 대가 없는 노동은 없고, 보상 없는 충성 또한 부질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 신세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예비 집사다. 노예는 아니지만, 언제든지 처분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예랑 그리 큰 차이 없었다.
“저는 단지 필타니아 가문을 위해 움직였을 뿐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
여공작이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포커페이스가 완벽해서 그 속내를 꿰뚫어 보는 건 불가능했다.
추측하기로 이 이벤트는 공녀의 신뢰를 얻기 위한 것이다. 나는 공녀뿐만이 아니라 여공작의 신뢰까지 얻을 속셈이었다.
물질적인 보상은 의미 없었다. 이곳에서 얻은 물건들은 원래 세계로 가져갈 수 없으니까.
“알겠다. 물러나거라.”
나는 여공작의 명령에 따라 식당에서 물러났다. 코판에게서 배웠던 대로 뒷걸음질 치며 조용히 물러났다. 도중에 유리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도 여공작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후에 기사와 사용인 몇몇이 나를 감시했다. 다만 호위라는 느낌이 좀 더 강했다.
여공작은 이 일을 계기로 숙청을 벌였다. 후계자를 공녀를 위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으로 보였다.
‘언젠가 벌어졌을 숙청이 앞당겨졌을 뿐이군.’
2할 이상의 가신들이 처형당했으며, 300명이 넘는 사용인이 죽어 나갔다. 대대적인 물갈이에 가신이고, 사용인이고, 병사고 할 것 없이 벌벌 떨었다.
여공작이 일으킨 피바람은 한 달이 지난 뒤에야 지면에 가라앉았다.
「Chapter 1. 첫 만남을 완성했습니다.」
「Chapter 2, Chapter 3이 변질되어 스킵 되었습니다.」
「Chapter 4. 전속을 시작합니다.」
챕터 2와 챔터 3이 스킵된 건 내가 어드바이스의 말을 듣지 않고 돌발적으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짐작 가지 않는다.
잠깐 주위가 버벅거리는 드는 느낌이 들더니, 어느 순간 나는 깨끗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반사적으로 거울을 찾았다. 몇 년이 지나 성장한 듯한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Chapter 4. 전속.
예비 집사에 불과했던 21번은 마침내 필타니아 가문의 정식 집사가 되었다. 수년 전, 공녀 독살 사건의 활약을 인정받아 정식 집사가 되자마자 유리아 공녀의 전속 집사가 되었다. 허나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 아주 약간의 실수를 저질러도 질투하는 사용인들이 굶주린 개처럼 물어뜯으려 할 것이다.」
「어드바이스 : 옷장을 열어 집사복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어드바이스의 말에 따라 집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6시도 지나지 않은 새벽이었다. 잠은 몰려오지 않았지만, 기분은 잡쳤다. 난 최소 오전 9시가 지나야 잠에서 깨는 편이다.
몸단장을 끝내고 집사장의 조회에 참석했다. 모든 집사는 매일 집사장의 잔소리를 들으며 일과를 시작한다.
집사들 사이에서도 계급 차이가 존재했다.
가장 높은 건 역시 집사장이다. 그의 위치는 어지간한 가신보다 더 위에 있는 위치였다.
그의 아래로 집사들을 관리하는 집사, 청소를 담당하는 집사, 주방을 담당하는 집사, 외부를 통제하는 집사 등등 맡은 일에 따라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공녀의 전속인 나는 집사장 바로 아래라 할 수 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유진!”
나를 부른 건 관리 집사인 코판이었다. 그의 눈가에 늘어난 주름 탓인지 이전보다 더 인상이 날카로워 보였다.
그는 21번이 아닌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정식 집사가 되었으니 더이상 번호로 부르지 못한다.
“오늘 조회는 평소보다 3분 늦었더군. 벌써부터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냐? 나는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코판, 이 새끼는 한결같았다.
오른팔의 뇌전권이 당장 놈의 주둥아리를 박살 내라고 울부짖는다.
‘여기서 코판을 죽였다가 챕터 1로 돌아가면? 그 귀찮은 짓거리를 다시 할 수는 없지.’
나는 그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함부로 고개 숙이지 마라! 너는 유리아 공녀님의 전속 집사라는 걸 잊은 것이냐?!”
“…….”
어쩌라고 이 새끼야.
???
아침 7시.
유리아를 깨우는 시간이다.
보통 귀족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자신이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사용인이 귀족을 깨우는 일은 드물었다.
「어드바이스: 아침 7시가 되면 유리아 공녀를 깨우십시오. 노크하지 말고 공녀의 침실로 들어가십시오.」
나는 7시가 되기 10분 전에 유리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전속 집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고 화려한 침대 위에 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유리아가 보였다. 편한 잠옷을 입은 채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미약하게 들리는 고른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시체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로 얌전했다.
침대 앞에서 빤히 유리아를 내려봤다. 내 몸이 어려졌듯이, 유리아의 몸 또한 어려졌다.
‘…이렇게 보니 공녀란 직위가 잘 어울리네.’
내 머릿속에 있는 유리아는 완전한 메이드였다. 메이드 외의 직업을 가진 그녀를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메이드 = 유리아. 라는 공식이 당연한 상식처럼 박혀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유리아는 헬브리트 공작의 딸이었다. 만약 유리아와 그 어미가 헬브리트 공작에게 버려지지 않았다면 메이드가 아닌 공녀가 되어 명성을 떨쳤겠지.
「어드바이스: 커튼을 젖히고 유리아 공녀를 깨우십시오.」
‘알았다. 알았어.’
어드바이스가 시키는 대로 커튼을 젖혔다. 그리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공녀의 몸을 일개 집사 따위가 함부로 만질 수 없었기에 목소리로 깨워야 한다. 물론 목소리도 높일 수 없다.
“유리아 공녀님. 아침입니다. 유리아 공녀님?”
유리아라면 이름을 부르면 벌떡 일어날 줄 알았다. 허나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지금 유리아는 메이드가 아니라 귀족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어드바이스: 어깨를 흔들어 유리아 공녀를 깨우십시오.」
‘……신분 차이가 개좆도 아니고 그래도 된다고? 보통 그러면 불경죄로 처형당하지 않나?’
의문이 들었으나, 어드바이스의 말이 틀릴 리가 없으니 유리아의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흔들었다. 몇 번 반복한 끝에 유리아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난 직후임에도 푸른 눈동자는 시리도록 밝았다.
“…….”
“아침입니다. 공녀님. 간밤에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유진.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되죠?”
나는 어드바이스가 알려주는 말을 그대로 읊었다.
“평소와 같습니다. 오전에는 역사학을, 오후에는 궁중 예법을 배울 것입니다.”
“그렇군요.”
유리아는 아직 어렸다. 하루 시간 대부분을 교육받는 것으로 끝났다.
유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커다란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어드바이스: 옷장에서 속옷과 드레스를 꺼내 유리아 공녀에게 입히십시오.」
‘…갈아입히라고? 내가?’
이런 건 보통 시녀나 하녀에게 시키지 않나?
‘아니지. 보통 사용인은 물건 취급이니까. 성별을 떠나서 같은 인간으로 보지도 않으니 상관없나?’
옷장에 준비된 속옷과 드레스를 꺼내 그녀에게 다가갔다. 유리아는 드레스를 힐끗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드바이스 : 유리아 공녀의 잠옷을 벗기십시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갈아입히려면 벗겨야지.’
부드러운 잠옷을 벗겼다.
유리아의 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그녀는 팬티 한 장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녀의 몸을 스캔했다. 가슴은 봉긋 솟아 성장을 준비하고, 골반도 발달하기 시작하려는 듯했다.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했다.
“아.”
유리아가 입을 뗐다.
너무 노골적으로 봤나. 흠칫 놀란 내가 다급히 되물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그곳에 털이 자라기 시작해서요. 책에서 나왔던 대로 제 몸은 변화를 겪고 있군요.”
자세히 보니?하얀 둔덕에 은색 보지털이 솜털처럼 나 있었다.
“경축드립니다.”
“누구나가 겪는 일을 축하받아 봤자, 기쁘지 않습니다. 유진. 몸의 변화는 당신도 겪는 일이 아닌가요?”
“아, 예. 저도 겪는 일입니다.”
지금 나는 그녀와 비슷한 또래였다.
“유진의 그곳에도 털이 났겠군요.”
“……네.”
이게 공녀와 나누는 대화라니. 그녀가 순수한 건지, 아니면 날 물건으로밖에 보지 않는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양말과 팬티를 입히고 드레스도 입혔다. 익숙하지 않아서 몇 번 버벅거렸다. 그러다 사고를 쳤다. 내 손이 그녀의 성장을 시작하는 가슴을 만진 것이다. 약간이지만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다.
“죄,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목숨만은 부디 살려주십시오!”
냉큼 바닥에 꿇었다.
“유진.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으신 것 같군요. 감기에도 걸리셨습니까?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 오늘은 쉬어도 좋습니다.”
“아닙니다! 살려주십시오!”
“겨우 이런 일로 처분할 생각은 없습니다. 유진. 머리카락을 빗어주세요.”
“……네.”
「어드바이스 : 조금 더 정성스레 빗으십시오.」
‘이건 또 뭔….’
어드바이스의 말에 따랐다. 어쩌면 다른 특별한 이벤트가 발동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
낚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 유리아의 기분이 좋아진 것 같으니 됐나.’
???
‘후, 젠장.’
나는 천재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계 속의 설정이 그렇다. 요리면 요리, 청소면 청소, 전투면 전투, 행정이면 행정. 그 모든 것들을 완벽히 해내는 집사다. 게다가 충성심까지 뛰어나다는 걸 증명했다.
덕분에 어린 나이에 필타니아의 후계자인 유리아 공녀의 전속 집사가 되었다. 내 위치를 말하자면 어지간한 가신들은 내 눈치를 볼 정도다. 가문 내의 권력 순위를 따지면 대충 50위 이내에 들 정도다.
세월이 지나고 관록이 쌓인다면 권력 순위는 더 올라가서 10위권 이내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른 시녀나 하녀들의 입장에서 난 최고의 일등 신랑감이라 할 수 있지.’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다면 인생이 활짝 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필타니아 공작성에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미형들이 많지. 뭐, 겉모습이 곧 품위가 되니 미모를 따지는 게 이상하진 않아. 내 마음에 드는 여자도 여럿 볼 수 있었고… 문제는 꼬시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지만.’
나는 내가 가진 권력과 장래를 이용해 시녀와 하녀들을 꼬시려고 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욕구가 쌓여 있었다. 내 취향이 아닌 여자를 봐도 자지가 반응할 정도로.
그러나 문제는.
「목적에 어긋납니다.」
「실패했습니다.」
「Chapter 4. 전속을 다시 시작합니다.」
이 빌어먹을 메시지였다.
내가 시녀에게 작업을 거는 순간 경고 메시지가 떴다. 그 경고 메시지를 무시하고 계속 작업을 걸면 실패하고 챕터 4의 첫 부분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챕터 1로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시발….’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강간? 당연히 안 된다. 시도한 순간 바로 챕터의 처음 부분으로 돌아왔다.
이 세계의 내가 욕구를 풀 방법은 자위뿐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섹스를 하고 와도 이 몸이 되면 금방 섹스 욕구가 생긴단 말이지.’
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데 챕터 4의 목적이 뭔지 아직 파악하지도 못했다.
‘자동 진행을 하면 내가 진행한 곳까지는 문제 없이 진행되지만, 그 이상을 하면 아바타가 꼭 사고를 치니 내가 해야 한단 말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적절한 부분에 스킵 기능이 있다는 것.
“유진. 유리아 공녀님의 전속이 되고 나서부터 몸이 굳어진 것 같군. 내가 다시 단련시켜줘야 하나?”
만날 때마다 쓴소리를 해대는 코판이었다.
이제는 뭐 그러려니 했다. 물론 이 특수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바로 죽여 버렸을 테지만.
“코판님.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네게 임무가 하달되었다. 똑바로 서라. 벌써부터 빠진 거냐? 넌 공녀님의 전속 집사라는 걸 잊지 마라! 네가 실수하면 공녀님의 명성에 먹칠하는 거다!”
발끝이 조금 옆으로 벌어진 것 가지고 지랄이군.
“전 공녀님에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만….”
“공녀님이 아니다. 가신이신 칼로스 자작이 내린 임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