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5화 〉 54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54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최대 출력의 뇌전을 맛본 검은 고양이가 쭈뼛거리더니 바닥에 쿵 쓰러졌다. 그 커다란 몸에선 연기가 났고, 눈동자는 위로 뒤집혔다. 혹시 모르니 다시 확인했다. 검은 고양이는 확실하게 죽었다.
비틀.
몸이 앞으로 쓰러지려는 걸 다리에 힘을 주어 가까스로 버텼다. 균형 감각이 엉망이다. 원인은 검은 고양이가 분명할 테고….
‘죽였는데도 이 모양이면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군.’
어쨌든 이 일은 보고해야 한다. 안전한 아카데미에 몬스터가 났으니, 아카데미 측은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겠지.
다른 능력과 다르게 완전 회복은 쓸 수 없다. 이 세계는 어떻게 보면 정신적 세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내가 죽을 때도 완전 회복은 발동하지 않았다.
“유진 씨! 괜찮으세요?! 피가! 피가 많이 나오고 있어요! 당장 병원으로 가요!”
메리가 내 몸을 붙잡았다.
아까 검은 고양이의 발톱이 팔에 파고들었다.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겉으로 보는 만큼 위험한 상처는 아니지만, 메리는 당장 내가 죽을것처럼 굴고 있다.
“호들갑 떨 필요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로 죽지 않습니다.”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 아까부터 몸을 비틀거리고 있잖아요! 그리고 피가 나오는 양이 너무 많아요! 아, 지혈! 지혈부터…!”
메리는 거침없이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확 찢었다. 드러난 매끈한 다리에 잠깐 눈길이 갔다.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한 번 정도는 따먹고 싶은데….’
이 세계에선 언감생심이었다. 괜히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선을 돌렸다.
“메리 님은 보통 영애가 아니시군요. 그 행동은 귀족으로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요! 이래 보여도 전 무가 출신이에요. 검술은 못 해도 지혈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상당히 뛰어난 지혈 솜씨였다.
“익숙해 보이시는군요. 아무리 무가라도 메리 님이 지혈을 할 상황이 많지는 않으셨을 텐데,”
“제 남동생이 틈만 나면 다치거든요. 어렸을 적엔 항상 곁에 있다 보니 응급 처치는 자연히 몸에 익었어요. 어디까지나 응급 처치 한정이지만요. 자, 병원으로 가요. 이런 상처를 내버려 뒀다간 양팔을 영영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요.”
“메리 님. 혼자서 갈 수 있습니다. 지혈을 해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이 이상의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폐라니요.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그리고 아까 비틀거리는 거 다 봤어요. 허세는 안 통해요.”
“…이러다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살까 두렵군요. 이상한 말이 나돌 수 있습니다.”
“이미 이상한 소문을 나돌고 있어요. 소문이 조금 늘어나봤자 전혀 곤란하지 않으니 잠자코 부축받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메리와 함께 병원으로 들어왔다. 균형 감각은 이미 회복된 상태였고, 팔은 치료사가 아낌?없이 사용한 포션 덕분에 삼일 안으로 완벽하게 회복될 것이다. 본래는 사용인에게 사용하지 않는 포션이지만 이번 같은 경우엔 아카데미 내에서 마주친 몬스터 때문에 포션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겨우 이딴 상처에 3일이나 걸리는 싸구려 포션이지만.’
나는 팔에 붕대를 감고 병상에 누웠다. 내 옆에는 메리가 떠나지 않고 재잘거렸다.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고 간병을 자처하는 것이다.
“메리! 메리! 몬스터와 마주쳤다고 들었어! 어디 다친 곳은 없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파레인 왕자였다. 그는 우선 메리부터 챙겼다. 메리의 몸에 어떤 생채기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다, 다친 곳은 없어요. 유진 씨가 지켜주셨거든요.”
“밝게 웃지 않아도 돼. 죽을 뻔했는데 웃음이 나와?”
“일은 이미 끝났어요. 우는 것보단 낫잖아요. 아니면 왕자님은 제가 우는 걸 원하세요?”
“…아니. 차라리 웃어. 그편이 낫겠어. 하지만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아카데미 측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어. 그리고….”
파레인 왕자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당장 몸을 일으키겠습니다.”
“괜찮아. 그대로 누워 있어. 메리를 구해준 은인에게 인사를 받겠다고 무리를 시킬 수는 없지. 메리를 구해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유리아 필타니아의 집사여.”
“황송할 따름입니다.”
파레인 왕자는 그대로 병실에 눌러앉았다. 물론 메리 때문이다. 왕자와 메리는 내 앞에서 수다를 떨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그들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다.
‘이러니 그딴 소문이 나돌고 있지.’
시간이 좀 더 지나자 평소에 메리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다른 남자, 요르센과 마티스까지 합류했다. 그리고 사이좋게 수다 삼매경이다.
‘자기들의 사이가 좋다는 것을 내게 과시하는 건가?’
환자를 편안히 쉬게 해주는 게 상식 아니었던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꺼지라고 하고 싶으나, 여기서 나보다 신분이 낮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덜컥.
병실의 문이 열리고 유리아가 찾아왔다.
“…….”
그녀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병실 내에 있던 귀족들은 긴장한 얼굴로 유리아를 쳐다봤다. 주도권이 순식간에 유리아에게 넘어갔다. 역시 유리아다. 포스가 남다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치료사에게서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허나, 왜 여러분들이 이 병실에 모여 있는지 모르겠군요.”
“유리아. 네 집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어. 자세한 조사는 진행 중이지만, 네 집사가 해준 일은 아카데미의 모두를 위한 일이야. 보상을 받게 될 거야. 그는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내가 아카데미 측과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어.”
“알겠습니다. 왕자님. 제 집사는 데려가도록 하죠.”
파레인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시끄러운 이곳에서 벗어나게 되는군.
“잠시만요!”
시야 끝에서 황금색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메리가 나와 유리아의 사이에 섰다. 마치 유리아를 가로막는 모양새다. 유리아의 눈썹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메리 양, 제게 용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유진 씨에겐 안정이 필요해요. 오늘은 병실에서 회복을 전념하는 게 좋을 거예요.”
“밖에서 들었던 의사의 말과 다르군요. 유진이 다친 곳은 팔뿐으로,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텐데요.”
“유진 씨는 저 때문에… 크게 다치셨어요. 유리아 공녀님. 제가 직접 유진 씨의 간병을 할 테니 오늘만큼은 병실에서 푹 쉬게 해주세요.”
“하아.”
유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드물게도 감정을 내비쳤다. 그것도 짜증이란 감정을.
“메리 양. 오지랖은 적당히 부리십시오. 당신의 그 태도 때문에 일이 꼬인다는 걸 모르십니까?”
“전 그저 은혜를 입었으니 갚으려고….”
“메리 양. 당신은 귀족이고 유진은 집사입니다. 거기에 유진은 필타니아 가문 소속입니다. 유진이 얼마나 불편할지는 생각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그게 아니라면 떠도는 소문대로 왕자님을 유혹했던 것처럼, 유진을 유혹하실 생각입니까?”
“그, 그게 아니에요. 저는…….”
메리가 주춤거리며 당황했다.
“그만!”
파레인 왕자가 나섰다.
“유리아 필타니아! 방금 말은 무례했어! 메리에게 사과해라!”
“……죄송합니다. 메리 양. 유진이 다쳤다는 말을 듣고 신경이 날카로워졌습니다.”
“메리! 너도 마찬가지야. 유진은 필타니아의 집사야. 아무리 은혜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가문에 간섭하는 건 도를 넘은 일이야.”
“죄송합니다. 왕자님…. 죄송합니다…. 유리아 공녀님….”
메리가 홀딱 젖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였다. 나를 제외한 남자들은 안쓰러운 눈으로 메리를 쳐다봤다. 대체 왜 저런 여자를 저렇게나 좋아하는지 의문이었다.
‘보지 조임이 끝내 주는 건가.’
나는 침대에서 내려서 유리아에게 다가갔다.
“여러분. 사용인에 불과한 저를 간병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전 이만 공녀님과 돌아가 보겠습니다.”
“유진 씨…. 오늘은 무척 고마웠어요. 유진 씨가 아니었다면 전 오늘 죽었을지도 몰라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유리아와 함께 기숙사로 돌아갔다.
“유진. 팔은 괜찮으신가요?”
“네. 공녀님. 당장은 움직이기 힘듭니다만…. 불구가 된 건 아니니 공녀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어드바이스 : 솔직하게 말씀하십시오.」
어드바이스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러려고 했다. 그녀에게 숨길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습니다. 역시 메리 양은 의심스럽군요.”
유리아의 말대로 생각해보니 의심스럽다.
그 검은 고양이가 몬스터라는 걸 정말 몰랐을까? 그 검은 고양이는 왜 메리를 공격하지 않고 얌전히 품에 안겨 있었을까?
“유진. 오늘은 상이 아닌 벌이 필요할 것 같군요.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하세요. 명령입니다.”
“네. 공녀님.”
???
다음날.
나는 곤란한 상황을 맞이했다.
지금은 점심시간, 분명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메리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메리 님….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아카데미 수업은 괜찮으신 겁니까?”
“헤헤. 어제 일의 보답을 하고 싶어서 와버렸어요. 그리고 유진 씨의 상태도 확인할 겸요. 아카데미는 괜찮아요. 교수님이 허락해주셨으니까요. 팔은… 많이 괜찮아지셨네요?”
“네. 공녀님이 포션을 하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손에 든 그건?”
“이건 선물이에요. 오늘 아침에 제가 직접 만든 쿠키에요. 맛은… 그리 뛰어나진 않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에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받기만 하고 드시진 않으실 거죠?”
“나중에 시간 되면 먹겠습니다.”
“아무리 쿠키라도 시간이 지나면 맛없어 진다고요. 지금 먹어요. 먹는 걸 보기 전까지 안 돌아갈 거예요.”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티타임을 준비할 테니 끝나고 돌아가 주십시오.”
대충 우려낸 홍차를 그녀에게 따라주었다.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메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와…. 홍차가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저 이런 홍차는 처음 먹어봐요. 유진 씨가 최고의 집사라는 소문은 사실이었군요.”
“별거 아닙니다. 메리 님이 만들어주신 쿠키가 더 맛있습니다.”
“에이. 홍차에 비하면 쿠키는 아무것도 아니라서 제가 부끄러울 지경인데요.”
그녀는 쓸데없는 잡담을 늘여놓다가, 내 눈치를 잠깐 살피더니 본심을 털어놓았다.
“유진 씨. 전 유리아 공녀님과 친해지고 싶어요. 유진 씨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 도움이 없어도 메리 님이라면 공녀님과 쉽게 친해지실 것 같습니다만.”
빈말이었다.
유리아의 성격과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유리아가 메리와 친해지는 광경이 보이지 않는다. 설령 내가 메리를 돕는다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유리아의 신뢰만 더 잃겠지.
섣불리 나서서 메리를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유리아 공녀님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벽만 확실하게 잘 느껴지던걸요.”
“……공녀님과 친해지시려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유리아 공녀님을 동경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기품이 느껴지고, 푸른 눈동자와 차분한 말투에서 현기가 느껴져요. 한눈에 보고 동경하고 말았어요. 전 아무리 노력해도 유리아 공녀님처럼 될 수 없으니까요.”
메리의 말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만약 저게 거짓이고 연기라면 그녀는 뛰어난 연기자이자 정치가가 될 것이다.
“죄송합니다. 메리 님. 제가 도울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필타니아 가문의 일개 집사에 불과합니다. 공녀님과 관련된 일에 제가 감히 나설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저도 고집 피울 수 없겠네요. 홍차는 맛있었어요. 아, 가끔씩 홍차를 마시러 와도 되나요? 제 시녀는 홍차를 영 잘 타지 못해서….”
“저도 할 일이 많아서 오늘처럼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오지 마라.
그런 뜻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음에 봬요.”
그녀는 상쾌하게 웃으며 떠났다.
???
그날 밤.
나는 유리아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유리아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유진. 어제와 오늘의 벌을 받으실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