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8화 〉 548.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548.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파레인 왕자가 다시 유리아를 찾았다.
그는 전에 보았을 때부터 핼쑥해진 얼굴이었다. 금발은 윤기를 잃었고, 눈동자에는 집착과 광기로 위험해 보였다.
“도와줘.”
“밑도 끝도 없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메리와 내가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다오.”
“코모토프스 영애는 요르센 경과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어제 그 자리에 저도 있었습니다. 장관이더군요.”
“……그 무식한 놈이 설마 이렇게 빨리 움직일지 몰랐어.”
“왕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왕가라면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어. 그리고 이 일은 너도 관련된 일이야. 만약… 너와 내가 결혼한다면, 맹세하는데 네 인생은 지옥이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라고!”
살의가 담긴 목소리에도 유리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절 협박하셔도 얻는 건 별로 없습니다.”
“……날 돕지 않겠다는 거야?”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도 왕자님과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파레인 왕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르센. 네가 요르센을 유혹하는 거야. 요르센은 메리를 만나기 전까지 널 좋아하고 있었으니 가능성이 있어.”
“불가능한 말이군요. 요르센 경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코모토프스 양에게 구혼했습니다. 제가 뭐라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젠장! 이대로 손 놓고 보고만 있으라고?!”
“그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왕자님. 협력자를 만드십시오.”
“협력자?”
“왕자님처럼 요르센 경에게 분노와 증오를 가지고 있을 한 명이 더 있지 않겠습니까.”
“……마티스. 하지만 그 녀석이 내게 협력해줄까? 잠재적으로 놈도 내 경쟁자야.”
“이대로 있으면 경쟁 자체도 못 합니다. 마티스 재상 후보는 머리가 좋으니 왕자님에게 일시적으로 협력할 것입니다.”
“협력해서.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
“요르센 경과 영애의 사이를 갈라놓아야죠. 요르센 경의 명성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둘에게 오해를 심어줍니다.”
“……생각했던 대로 넌 냉혹한 여자였어. 오해를 심어주는 건 어떤 방법을 쓸 거지?”
“영애는 홍차를 좋아한다더군요.”
???
요르센은 마티스와 결투를 치렀다.
나는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못했기에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사정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마티스가 요르센에게 도발을 했고, 명예를 중히 여기는 요르센은 도발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마티스가 크게 다쳤다.
아무리 결투라고 해도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일. 게다가 결투 내용은 마티스가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한다. 요르센은 제압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마티스에게 중상을 입혔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은 누군가가 악의를 담아 부풀어졌고, 귀족들은 요르센을 힘을 함부로 휘두르는 야만인 취급했다.
그리고 나는 유리아의 명령에 따라 메리에게 접근했다.
“메리 님. 저번에 손수건을 두고 가셨습니다.”
“어, 어? 그랬던가요?”
물론 아니었다. 손수건은 내가 메리에게 훔친 것이다. 메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예.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저번에 제게 쿠키를 선물해주셨지요. 그때가 생각나 쿠키를 준비했습니다.”
“유진 씨의 쿠키라니! 정말 기대되네요!”
메리는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내 요리 솜씨는 이미 왕국 제일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기뻐하며 내 쿠키를 받던 그녀의 다리가 미끄러지며 내 품으로 쓰러진다. 나는 반사적으로 메리의 허리를 잡았다.
“메리 님. 괜찮으십니까?”
“어, 아…. 미, 미안해요.”
그녀가 후다닥 떨어졌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광경을 보고 있을 것이다.
“다리를 접질리시지 않으셨는지? 혹시 모르니 제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나를 시작으로 오해는 만들어지고 의심은 깊어질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카데미의 최고 미남자 3명을 한 번에 꼬셔버린 마성의 여인.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요르센은 불안함을 느끼겠지.
유리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요르센의 본가, 셀브리즈 백작가를 자극했다. 아카데미 내의 소문을 바깥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요르센은 본가로 소환되었고, 메리는 셀브리즈 백작가에서 헤어지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헤어졌다. 요르센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결혼을 인정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나와 메리의 사이를 의심했다.
메리는 온종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파레인 왕자는 기뻐했다.
“일이 잘 풀렸어! 최고로 잘 풀렸어! 요르센은 가문의 압박을 받아 아카데미를 자퇴 =하고 군부 쪽으로 끌려갔지. 녀석이 두 번 다시 메리에게 접근하는 일은 없을 거야!”
“일이 잘 풀렸군요. 근데 왜 이리로 오셨습니까? 상심하고 있는 메리 양을 위로하는 게 우선 일 텐데요.”
“물론 나도 그러고 싶어. 메리가 울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내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 하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놈이 한 명 있어. 알고 보니 나보다 먼저 메리에게 간 놈이 있었어. 마티스. 그놈을 요르센처럼 메리에게서 떨어뜨려 놓아야 해. 그래야 메리는 온전히 내 것이 될 테니까.”
파레인 왕자는 독해졌다. 너무 독해져서 원래의 파레인 왕자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마티스 재상 후보는 더 쉽습니다. 그에겐 약점이 있으니까요.”
“약점?! 그게 뭐지?!”
“재상 후보라는 점입니다. 그는 재상에 가장 가깝지만, 어디까지나 재상 후보 중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다른 후보도 많습니다.”
“놈을 재상 후보에서 탈락시키자는 거군. 어떻게?”
“재상 후보들은 각각 작은 상단을 운영합니다. 이 상단의 실적이 재상 후보에게 큰 영향을 끼치죠. 그의 아래에 있는 부하들을 회유하여 비리를 저지르게 하십시오. 상단이 저지른 죄의 책임은 그가 지게 될 것입니다.”
“알았어! 지금 당장 움직이지!”
그가 벌떡 일어나서 움직였다.
새로이 메리의 연인이 되었던 마티스는 한 달 뒤에 공식적으로 처형당했다. 그리고 다음 날. 파레인 왕자가 찾아왔다.
“고맙다. 유리아. 네 덕분에 정치란 것이 뭔지 알겠더군.”
오랜만에 본 파레인 왕자의 말투는 변해 있었다.
“……그가 처형당한 건 의외군요. 그 정도로 심각한 비리를 저지르게 만들었습니까?”
유리아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아니다. 네 말대로 마티스의 부하를 회유하기 위해 움직였을 때 재밌는 정보를 얻었지. 왕가에서 추진 중이던 마수 제어 계획. 몬스터를 길들여 뜻대로 부린다는 계획의 책임자가 마티스였더군.”
“……그는 제 생각보다 더 유능했군요.”
“그래. 재상이 놈의 마법적 재능을 꿰뚫어 보고 입양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지. 실제로 유능했고 말이야. 하지만 재상에겐 적이 좀 많았지. 그들 중 한 명에게 정보를 흘렸고 마티스는 처형당했지. 비공개 몬스터 실험은 큰 불법이니 살아날 방법이 없었지.”
“……왜 그랬습니까? 그의 실험은 왕가에 큰 도움이 될 텐데요.”
“내 여자를 노리는 놈을 어떻게 가신으로 믿지? 그리고 그런 계획이 없어도 왕가는 건재하다.”
“이용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메리의 순결이 놈에게 넘어간다면? 난 그 상상만으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어.”
“이제 경쟁자가 없을 테니 왕자님의 목적은 달성했군요.”
“한 가지 남았지. 우리의 파혼.”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도움만 받았는데 끝까지 도움만 받을 생각은 없어. 파혼은 내가 처리 하지. 아주 좋은 방법이 있더군.”
파레인이 섬뜩하게 웃었다.
그리고 얼마 후.
왕세자가 병으로 죽고, 새로이 파레인 왕자가 새로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와 유리아는 침묵했다. 결과적으로 일이 좋게 풀렸기 때문이다.
왕세자가 된 이상 파혼은 당연했다.
유리아는 필타니아의 공작가의 후계자다.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데 왕비가 될 수는 없었다.
“공녀님. 왠지 불안합니다. 이대로 파레인 왕자를 내버려 둬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그와 저의 관계는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몇 년간은 부딪힐 일은 없겠지요.”
「Chapter 14. 음모를 완성했습니다.」
「Chapter 15. 가면무도회를 시작합니다.」
「Chapter 15. 가면무도회.
1년의 마지막. 아카데미 졸업생들을 위한 가면무도회가 열린다. 참가자들은 무조건 가면을 써야 하며,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질문을 하는 건 매너 위반이다. 신분을 알 수 없다는 가면무도회 특성상 꼭 귀족이 아니더라도 참가할 수 있다.」
시간이 스킵되었고, 가면무도회의 날이 점점 다가왔다.
가면무도회에 꼭 참가해야 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족은 가면무도회에 참가한다. 이런 특별한 파티는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유진도 가면무도회에 참가하세요.”
“전 사용인입니다만….”
“어차피 정체를 들킬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몇몇 사용인들이 가면무도회에 참가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요.”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그리고 요맘때쯤 파레인 왕세자와 메리의 약혼 소식이 퍼졌다. 파레인 왕자는 기어이 아버지인 국왕을 설득한 모양이었다. 대체 어떻게 설득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겉으로만 보자면 해피엔딩이군.’
???
가면무도회 당일.
연회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신분을 감추기 위해 검은색 망토를 뒤집어쓰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면을 썼다곤 하나 귀족과 사용인의 차이는 바로 느껴졌다. 몸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다르고, 자신감의 종류도 달랐다. 그러나 나는 완벽하게 귀족처럼 행동했다.
‘백환’ 세계의 나는 원래 귀족이었다.
또한.
「어드바이스 : 자세가 흐트러졌습니다. 바로 잡으십시오.」
어드바이스가 참견질을 해대니 완벽한 귀족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나는 강철로 만든 가면을 쓰고 연회복을 입었다. 유리아는 보석이 박힌 화련한 가면을 썼으며, 푸른색의 드레스를 입었다.
가면을 쓴 귀족들이 우리에게 일일이 접근해왔다.
유리아에게 춤을 신청하는 남자들이 줄을 섰다. 가면을 썼다곤 하나 그녀의 아름다움과 기품을 숨길 수 없었다. 청은색 머리카락도 그대로 노출되었으니 이미 귀족들은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어드바이스 : 유리아 공녀에게 춤을 신청하십시오.]
나는 그녀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아가씨. 저와 함께 추시겠습니까.”
“기꺼이.”
우리는 춤을 추기 위한 마련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차분히 흐르는 음악 소리에 맞춰서 스텝을 밟는다.
사교댄스는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파티에서 춤을 추는 건 거의 필수라 할 수 있어서, 옛날부터 유리아와 함께 사교댄스를 췄었다. 유리아가 내 사교댄스의 선생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평범하게 추는 것 같은데 시선이 모인다. 나 때문인가, 유리아 때문인가. 아니면 이 세계의 설정 때문인가.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세계의 설정 때문일 확률이 높다.
“유진. 연회는 즐거우십니까?”
춤을 추는 와중에 유리아가 소곤소곤 물어왔다.
“생각보다 재미없습니다. 공녀님은 즐거우십니까?”
“평소에는 저도 재미없습니다만, 유진이 있어서 한결 낫군요.”
나와 그녀의 두 눈이 마주쳤다. 열기가 느껴지는 눈.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공녀님. 많이 힘들어 보이십니다. 휴식이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
“네. 오늘따라 피곤한 것 같군요.”
대규모의 연회장에는 따로 휴식을 위한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 무도회에 지친 몸을 위한 곳이지만, 마음이 맞는 남녀들의 밀회를 위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뭐, 밀회가 들키면 큰 문제가 되겠지만.
방의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아는 자연스럽게 푹신한 의자에 앉았고, 나는 그녀의 앞에 무릎 꿇어앉았다. 그녀가 다리를 이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다리부터 마사지했다.
“유진. 일어나세요.”
가면을 벗은 그녀가 내 가면까지 벗겼다.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명령입니다. 유진. 제게 키스하세요.”
“네.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입을 맞추었다. 키스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깊어졌다. 내 손이 그녀의 등허리를 두르고,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혀가 뒤섞이는 질척한 소리가 들렸다. 나와 그녀는 키스하면서 눈을 감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눈을 눈동자에 담았다.
철컥.
분명 잠갔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혈액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은 메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