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0화 〉 550.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550.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공작 각하께서 널 처분하라고 명령하셨다.”
필타니아 가문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집사가 나를 향해 다가온다.
“…요즘은 열쇠 꾸러미로 암살합니까?”
코판은 내 수갑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손목의 수갑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만으로 시원함을 느꼈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내가 널 죽이면 공녀님께서 날 고문하다 죽이시겠지. 분명 공작 각하도 알고 계시겠지. 알면서 명령을 내린 거다. 널 키워낸 책임을 지라고.”
코판은 이어서 내 족쇄에도 열쇠를 꽂았다.
“결국 저 때문에 죽는다는 말씀이시군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문의 명령을 거슬러도 됩니까? 제게 항상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가문의 명령은 목숨보다 우선시해야 된다고.”
“그건 너희에게 해당 되는 말이지, 내게 해당 되는 말이 아니다. 난 죽고 싶지 않다. 내가 필타니아 가문에 충성하는 건 돈과 지위가 있기 때문이지.”
“속물적이시군요.”
“원래 사람은 다 그렇다.”
족쇄가 떨어져 나갔다. 나는 몸을 일으켜 손목과 발목을 흔들었다. 한 달간 갇혀 있었던 것 치고는 몸이 가뿐했다. 일반인의 평범한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도망가야지. 한 달 전에 네가 지하 감옥에 끌려갔을 때부터 준비했다. 공작 각하는 냉정하신 분이다. 널 키워낸 내 책임을 물을 거라 생각했다.”
“왜 절 구하러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절 내버려 두고 도망가셔도 상관없었을 텐데요.”
“넌 내가 키워낸 최고의 집사다. 그 어떤 집사보다 뛰어나지. 이곳에 네가 죽으면, 네게 투자한 내 시간이 전부 사라진다. 아까운 일이지.”
코판은 이어서 제안했다.
“나랑 함께 도망가자. 너라면 집사가 아니라 다른 어떤 일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겐 섬겨야 할 주인이 계십니다.”
코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역시 넌 최고의 집사다. 여기서 헤어져야겠군. 기껏 구해줬으니 죽지 마라.”
“네. 코판 님도 잘 먹고 잘사십시오.”
“……분명 덕담인데. 왜 재수 없게 들리지?”
코판이 떠났다. 재수 없지만, 능력은 있는 놈이니 어딜 가서든 잘 살 것이다. 뭐, 애초에 능력이 없었다면 필타니아 가문의 집사도 되지 못했겠지만.
지하 감옥에서 벗어난 나는 유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필타니아 성은 완벽히 숙지하고 있었기에 경비 서는 기사를 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발코니로 들어가 창문을 툭툭 두들겼다.
잠옷을 입은 그녀가 커튼을 살짝 열었다. 날 본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창문을 열었다.
“유진. 어떻게 탈출하셨습니까?”
“코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하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그녀는 눈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기어코 유진을 처분하려 했군요….”
그리고 이제부터 여공작은 대놓고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유진. 왜 절 찾아오셨습니까? 그대로 코판과 도망친다면 위험 없이 살 수 있었을 텐데요.”
“공녀님. 말하지 않았습니까. 공녀님을 사랑한다고.”
반사적으로 유리아를 끌어안으려다가 멈칫했다. 지금 내 몸 상태는 깔끔하지 못했다.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지하 감옥에 한 달 동안 처박혀 있었다. 고문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몇 번 씻긴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유리아가 먼저 날 끌어안고 입을 맞춰왔다.
“공녀님. 도망갑시다.”
이 세계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다. 정치도 아니다. 사랑이다.
이 세계의 타이틀부터가 ‘필타니아 공녀와 집사’다. 로맨스의 냄새가 풀풀 나는 제목이다. 즉, 내가 해야 하는 건 로맨스에 맞게 사랑을 이루는 것.
“반드시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저와 함께 떠납시다.”
“…….”
유리아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알고 있다.
나와 그녀의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걸. 내가 가진 건 이 목숨밖에 없다. 반면에 유리아는 모든 걸 가졌다.
공녀의 직위.
사랑 하나만 보고 버리기엔 너무나 크다.
“……알겠습니다. 함께 떠나죠. 유진과 함께라면 어디를 가든 행복할 겁니다.”
그녀는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입고, 돈과 물건을 챙긴다. 나는 빠르게 그녀를 도우며 머릿속으로 계획을 짰다.
틸타니아 공작령은 가진 위세만큼 매우 넓었다. 마차를 타고 쉬지 않고 움직이더라도 최소 5일은 달려야 공작령을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서쪽으로 가야겠지. 길이 험하니 추적하기도 힘들고, 국경과도 가까워. 일단 국경만 넘으면 한숨 돌릴 수 있겠지.’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워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리아가 내 어깨를 잡고 침대 밑을 가리켰다. 바로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유리아가 문을 열었다. 침대 때문에 누가 찾아온 건지 보이지 않았다.
“공녀님. 주무시고 계시는가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령 제가 자고 있었더라도 당신은 안에 들어왔겠죠.”
“공작 각하께서 시키신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답니다. 용서해주시길.”
그녀는 그대로 떠났다.
나는 침대 밑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녀입니까?”
“네. 유진이 감옥에 갇히고 제게 붙은 전속 시녀입니다. 본래는 어머니의 시녀입니다. 제 시중을 드는 것보다 절 감시하는 목적으로 붙여진 시녀죠. 아마 새벽 3시쯤에 다시 찾아와 제가 잘 있는지 확인하겠죠.”
“공녀님도 불편한 생활을 보내고 계셨군요.”
“유진 정도는 아닙니다.”
챙겨야 할 짐을 모두 챙긴 그녀가 내게 안겼다. 나는 그녀를 조심히 안아 발코니 밖으로 나갔다.
“유진. 당분간은 고생하게 되겠네요.”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닙니다.”
나와 유리아는 성에서 도망쳤다.
추적자는 몇 시간 만에 뒤에 붙었다. 추적자들은 예상 이상으로 집요하고 능력도 뛰어났다. 완벽히 따돌리는 건 힘들었다.
「어드바이스 : 왼쪽으로 움직이십시오.」
「어드바이스 : 흔적을 지우십시오」
「어드바이스 : 다른 사람으로 분장하고 말을 훔쳐 달아나십시오.」
지하 감옥에 있을 때는 아무 메시지도 띄우지 않았던 어드바이스가 나를 도왔다. 덕분에 안정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3일째 되는 날.
우리는 어느 도시에 잠입했다. 쉬지 않고 달렸으니 휴식이 필요했다. 나는 아무 문제 없지만, 유리아는 원래의 힘이 쓰지 못하는 모양이니 휴식이 꼭 필요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사랑의 신전이었다. 다른 신전이나 여관에 들어가면 밀고 당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사랑의 신전은 사랑하는 남녀를 전폭적으로 도와주기로 유명한 곳이다.
설령 우리를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반나절 정도는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겠지.
그리고 사랑의 신전 사제는 우리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당신들이 누구인지 묻지 않겠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쉬다 가세요. 부디 사랑의 축복이 당신들에게 내리기를.”
우리를 눈치채고서도 머물도록 허락해주었다.
유리아는 배정받은 방에서 꾸벅꾸벅 졸더니 곧 잠에 빠졌다. 말은 하지 않더라도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한숨 잘까.’
「어드바이스 : 신전 밖으로 나가십시오.」
‘꼭 지금 나가야 하나?’
「어드바이스 : 신전 밖으로 나가십시오.」
‘…후. 알았다.’
어드바이스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하필이면 인파가 많은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설마 추적자들에게 나를 보내려는 것은 아니지? 어쩌면 다음 챕터로 가기 위해 내가 여기서 잡혀야 될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이 나리 수도 있지. 어쩌면 내가 죽는다는 결말로 끝날지도 모르겠군.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가장 가능성이 높지.’
「어드바이스 :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가십시오.」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나처럼 칙칙한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노파를 발견했다. 그는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거지라고 하기에는 구걸하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킬킬…. 재밌는 손님이 오셨구먼.”
“전 손님이 아닙니다. 할머니는 뭘 파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꼭 물건을 팔아야 하는 법이 있나. 난 자네를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지.”
“거참 대단한 능력이시군요.”
나는 노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영 믿음이 안 가는 노인이지만, 어드바이스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뭔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할머니. 저 좀 도와주십시오. 진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흐흐. 나는 좀 비싸네.”
“전 제법 돈이 많습니다. 전부 드릴 수는 없고… 제대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절반을 드리죠.”
나는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아카데미에서 받은 보상금과 지금껏 내가 모은 돈. 내 전 재산이었다. 설령 절반을 준다고 해도 남은 돈으로 적당한 도시에 정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이다.
“킬킬. 손이 크구먼. 이거 확실히 도와줘야겠어. 선불이니 절반을 먼저 주게.”
노파가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그릇을 꺼내 내밀었다. 표면에 금이 간 낡은 그릇. 딱 구걸하기 좋은 빈 그릇.
“아. 이거 진짜 사기당하는 기분인데.”
전재산의 절반을 낡은 그릇에 쏟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화가 그릇을 가득 채웠다.
“킬킬킬. 드디어 이것의 주인이 나타났구먼. 자, 어떻게 써야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지?”
“…뭐, 마법 같은 걸로 절 도와주는 게 아니었습니까?”
“내가 마법사이긴 해도, 자네에게 필요한 건 마법이 아니야.”
“……혹시 여기에 전지전능한 힘이라도 있습니까? 상상을 현실로 바꾼다거나.”
“그런 능력이 있으면 내가 자네에게 주겠나. 평범한 물건이네.”
“찝찝한데. 혹시 노파가 쓰던 겁니까?”
“예끼! 방금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신품이라네! 자네는 이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모르는구먼. 이게 있다면 3단계나 건너뛸 수 있네!”
“전재산의 절반 치고는 꽤 많이 실망스럽긴 합니다만…. 뭐, 감사합니다.”
“킬킬. 자네가 전재산의 절반을 주지 않았다면 나도 이걸 주지 않았을 거야. 자네의 돈 욕심 없는 마음씨가 행운을 불렀지.”
“제가 전재산을 줬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찬가지로 그걸 줬겠지.”
“역시 사기당한 것 같은…. 쯧. 사라졌군.”
나 역시 몸을 일으켰다.
“……이 물건을 내게 줄거였다면 굳이 그 노파가 아니어도 됐잖아.”
나는 손바닥 위의 물건을 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어드바이스 : 사랑의 신전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
나는 잠들어 있는 유리아를 강제로 깨웠다. 이런 일은 뒤로 미루면 좋지 않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천천히 하다 일을 그르치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잔다.
유리아를 이끌고 신전 예배당으로 향했다.
사랑의 신전의 예배당은 사랑의 여신을 위한 기도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평민들의 결혼식장으로서 자주 이용되는 곳이었다.
“유진. 중요한 일이란 게 뭐죠? 추적자와 관련된 일인가요?”
“아니. 유리아 네게 꼭 전해주고 싶어서.”
나는 그녀의 왼손을 잡고 노파에게 전재산의 절반을 주고 산 물건을 꺼냈다.
반지였다.
“그건….”
놀란 유리아의 눈이 커진다. 나는 직접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려고 했으나, 그녀가 왼손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저, 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유리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과 반응이었다.
“왜? 날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저는… 주인님을 속였습니다. 사실은 주인님을 처음 보는 순간 알아봤습니다. 주인님에 대한 기억도 전부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인님이 실패하면, 주인님이 죽으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님이 이 세계에 휘말린 것도 저 때문입니다! 제가 주인님과의 사랑을 원해서…!”
“알고 있어. 도중에 눈치채고 잠깐 실험했지. 내가 만든 음식과 홍차를 먹느라고 고생했어.”
그녀가 기억을 잃은 게 아님을, 연기하고 있음을 눈치챈 건 아카데미 때였다.
메리에게 선물 받은 쿠키를 유리아에게 알리지 않고 티타임때 대접했다. 설정상 내가 만들었다면 최고의 맛을 가진 쿠키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만들지 않았기에 최고의 맛이 아니었고, 유리아는 평소처럼 무척이나 맛있다고 치켜세웠었다. 만약 그녀가 다른 사람들처럼 설정에 집어 삼켜진 상태였다면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유리아를 의심했고, 몇 가지 시험을 남몰래 한 끝에 그녀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너한테 농락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 그동안 내가 널 너무 많이 부려먹기도 했었지.”
“주인님….”
나는 그녀의 왼쪽 손가락을 전부 하나, 하나씩 폈다. 그리고 약지에 은색 고리에 푸른색 작은 보석이 박힌 세련된 작은 반지를 끼웠다.
“사랑한다. 유리아.”
“읏….”
맑고 투명한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