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1화 〉 551.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551.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읏….”
맑고 투명한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렸다.
나는 조용히 눈물이 멎기를 기다려주었다. 그녀의 눈물이라면 금방 멈출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도…, 저도 주인님을 사랑합니다.”
그녀가 한 발짝 내게 다가왔다. 나는 유리아를 내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반지.
그건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면 사라질 반지였다.
‘현실에서 최대한 비슷한 반지를 구해서 줘야겠군. 드워프 놈들을 갈궈서 더 멋진 반지를 만들게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아의 울음이 그쳤다. 이제는 방으로 돌아가서 육체로 사랑을 확인할 시간이다.
내가 유리아의 어깨를 잡고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콰앙!
폭탄이 떨어진 듯한 소리와 함께 신전 예배당 문이 활짝 열렸다. 폭풍처럼 들어온 것은 필타니아 여공작과 가신들, 그리고 그들의 호위를 위한 가신들. 다 합치면 30명도 넘는 인원이 쳐들어온 것이다.
“필타니아 공작 각하! 여긴 신성한 사랑의 신전 내부입니다! 폭거를 사랑의 신께서 용납하지 않으실 겁니다!”
신전 사제가 여공작을 막아서지만, 여공작은 사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나와 유리아를 쳐다본다.
나는 여공작의 옆에 있는 노파를 발견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노파. 내 전재산 절반을 가져가고 반지를 준 노파였다. 언뜻 보이는 얼굴 일부로 그녀가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저 늙은이가 여공작을 여기로 데려온 건가?’
뒤통수가 얼얼해진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내 전재산 절반이 부족했던 건가.
“유리아. 도망가자.”
유리아의 어깨와 허리를 잡았다. 옆에 있는 창문을 통해 전력으로 도주한다면 기사들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유리아가 내 품에서 벗어났다. 표정은 평소대로 돌아왔다. 울었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여공작의 앞으로 나섰다.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찾아오셨군요.”
“…….”
여공작은 유리아를 맹렬히 노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내가 졌다. 유리아. 본가로 돌아오거라. 언제까지 네 자리를 비워둘 생각이느냐.”
“국왕 전하의 답변이 도착한 모양이군요.”
“그래. 설마하니 네가 이 정도까지 할 정도는 몰랐구나.”
“어머니. 저희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하시는 겁니까?”
“……인정하마. 그리고 잊지 마라 유리아. 내가 양보한 만큼, 넌 필타니아 가문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둬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이지?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잘 풀리는 내막을 모르겠다.
여공작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날 노려봤다.
“돌아가시죠. 유진. 아니, 유진 자작.”
“……!!”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신분이다. 귀족은 귀족끼리 결혼해야 한다. 작위가 낮은 귀족들이라면 부유한 상인과도 결혼할 수 있겠지만, 필타니아 공작가는 아니었다.
‘내가 한 달 동안 지하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유리아는 날 귀족으로 만들기 위해 작업하고 있었던 건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유리아는 날 귀족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문서들을 조작하고, 사람을 불러 소문을 퍼트리고, 국왕과 협박에 가까운 거래를 했다고 한다. 파레인 왕세자가 저지른 더러운 짓의 증거를 넘기는 대신 내게 귀족의 작위를 수여 하는 것으로.
나는 명실상부한 귀족이 된 것이다.
“식은 언제 올릴 것이냐?”
유리아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보며 빙긋 웃었다.
“되도록 빠르게. 네. 다음 주면 좋지 않을까요.”
“무리한 소리 하지 말아라. 못해도 석 달 이상의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네. 알고 있습니다.”
나와 유리아는 짧은 도주 생활 끝에 필타니아 공작가로 돌아갔다.
신분이 문제라면 신분을 해결하면 된다.
새삼스럽게 유리아가 엄청나게 유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
「Chapter 16.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완성했습니다.」
「Chapter 17, Chapter 18, Chapter 19의 내용이 변질되어 스킵됩니다.」
「Chapter 20. 파멸을 시작합니다.」
「Chapter 20. 파멸.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찾아온다. 누군가는 그걸 파멸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스킵 되었다.
내가 쓰던 사용인의 방이 아닌 화려한 방에 있었다. 나는 이제 집사가 아니라 귀족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필타니아 공작가의 데릴사위가 되는 귀족.
곧장 유리아를 찾아 움직였다. 그녀는 방이 아닌 집무실에 있었다. 승계를 위한 작업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유리아. 난 시간이 스킵 되었는데… 혹시 너는….”
“이 세계의 시간 중심은 주인님입니다. 주인님이 처음으로 돌아가시면 저도 처음으로 돌아가고, 주인님이 스킵을 선택하시면 저도 스킵 됩니다.”
“그건 의외네. 그럼 어드바이스는?”
“어드바이스요?”
유리아는 어드바이스에 관해 전혀 몰랐다.
나는 어드바이스의 정체가 유리아의 조언이 아닐까 추측했었지만, 아무래도 어드바이스와 유리아는 전혀 별개인 모양이다.
“이번 챕터는 파멸입니다. 저와 주인님의 파멸. 그게 아니면 메리와 파레인 왕세자의 파멸.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결국 한 가지잖아. 우리가 파멸할 수 없으니 그 연놈이 파멸해야지.”
“네. 준비하겠습니다. 딱히 제가 나서지 않더라도 그들은 파멸하겠지만요….”
말이 끊겼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유리아 공녀님.”
“……네. 유진.”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입이 포개졌다. 입술이 움직이며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쪼옥. 쪽. 키스 소리가 집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
나와 유리아는 자퇴한 아카데미를 찾아갔다. 메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파레인 왕세자도 이미 자퇴한 뒤였다. 그의 입장에서 이미 메리를 손에 넣었고, 국왕직을 수월하게 계승하기 위해서라도 아카데미에서 보낼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메리는 변해 있었다. 귀족치고 소탈하면서도 수수하고 밝은 매력이 가득했던 그녀는 이젠 없다. 귀걸이와 목걸이, 입고 있는 드레스까지 모두 화려한 사치품들이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메리 코모토프스 양.”
유리아는 나와 팔짱을 낀 상태로 웃으며 메리에게 말했다.
메리는 표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고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팍 썼다.
“당신들이 안 왔다면 평안했을 것 같네요. 제게 무슨 볼일이시죠?”
“별건 아니고 초대장을 건네주러 왔습니다.”
“초대장?”
봉투 테두리에 금박을 입힌 고급스러운 초대장을 메리에게 건넸다. 메리는 초대장을 받자마자 열었다. 그녀의 얼굴이 종이처럼 구겨진다.
“결혼식… 초대장?”
“내년에 유진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코모토포스 양 덕분이라 할 수 있으니 이렇게 직접 초대장을 건네주기 위해 왔습니다.”
그건 핑계고 실제로는 메리를 자극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으득.
메리가 이를 갈았다.
“…결혼 축하드려요. 공녀님.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네. 행복한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코모토프스 양은 언제 왕세자님과 결혼하시나요?”
“……약혼은 했지만, 결혼식 날은 정해지지 않았어요. 그것보다 공녀님은 결혼에 관해 더 신경 쓰셔야 하지 않나요? 유진 씨는 원래 집사 출신. 가신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서로의 태생이 다르니 결혼생활도 원활할지 걱정되는군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가신들은 모두 저희 결혼에 수긍하고 있습니다. 결혼 생활은… 저와 유진이라면 잘 해내 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유리아가 내 몸에 기대어 왔다. 나도 그녀를 받아 주었다. 대놓고 하는 염장질에 메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저는 그것보다 코모토프스 양이 걱정입니다. 요즘 왕세자님과 만나는 날이 줄어들고 있지 않습니까?”
“……공녀님께서 참견하실 일이 아닙니다.”
“저도 코모토프스 양이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법입니다. 거기다 왕세자님의 위치는 저 이상입니다. 약혼은 했다고는 하나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몸. 왕세자님을 유혹하는 영애와 권력을 노리는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파레인 왕세자님이 절 내버려 두고 바람을 피운다는 말씀이세요?! 저에게 아주 저주의 말을 내뱉으시는군요!”
메리가 폭발했다. 아마도 유리아가 말했던 것을 평소에도 신경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저토록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테니까.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알아주십시오. 저는 단지 코모토프스 양이 걱정되어 한 말입니다.”
“하. 제 속을 긁으러 온걸 모를 줄 아시나요?”
찌이이익. 찌익! 찍!
메리는 우리의 눈앞에서 결혼식 초대장을 보란 듯이 찢었다.
“당신들의 결혼식은 시간이 되면 찾아가도록 하죠. 그리고 오늘 일은 잊지 않겠어요. 더 이상 당신들과 할 말은 없으니 돌아가세요.”
“알겠습니다. 코모토프스 양. 부디 앞으로도 평안하시길.”
우리는 메리를 뒤로하고 아카데미를 떠났다.
???
얼마 뒤에 메리가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이 들렸다. 바람 상대는 아카데미의 젊은 교수였다.
“유리아 공녀님. 이 소문은 진짜입니까?”
내가 유리아에게 물었다. 이 세계에 있는 동안 역할에 충실하기로 정했다.
“네. 유진. 소문은 진실입니다. 조사해보니 넬만 교수와 몇 번 따로 만난 적 있더군요. 메리 코모토프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여자입니다.”
나는 파레인 왕세자가 먼저 사고를 칠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메리가 먼저 사고를 칠 줄 몰랐다.
이후에 넬만 교수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허나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안다. 파레인 왕세자가 그를 지워버렸음을.
메리는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파레인 왕세자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보나 마나 뻔하다. 파레인 왕세자가 메리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메리는 보이지 않는 새장 속에 갇혀 있었다.
“공녀님.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괜찮습니까? 파레인 왕세자는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괜찮습니다. 그는 국왕이 될 수 없을 겁니다.”
“네? 국왕의 후계자는 파레인 왕세자 뿐입니다. 국왕의 후계자는 그밖에 없을 텐데요.”
“파레인 왕세자는 폭군입니다. 그의 행보를 주시하면 싫어도 그 성향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왕이 되도록 내버려 두면 문제 되는 게 아닙니까?”
“이 왕국은 왕가의 권력이 굳건하지 않습니다. 당장 필타니아 공작가만해도 왕가에 버금갈 정도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타니아 공작가와 세력이 비슷한 귀족 가문은 3곳이나 더 있지요.”
“으음. 확실히 그 정도면 왕의 입장에서 골치 아프겠습니다.”
“귀족들은 폭군을 원하지 않습니다. 파레인 왕세자에겐 폭군이 될 힘도 없습니다. 권력이 부족합니다. 그가 왕이 되더라도 명령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권력 없는 왕은 이빨 빠지고 발이 묶인 호랑이에 불과하다.
유리아는 이어서 말했다.
“그에겐 무력이 없습니다. 반발하는 귀족을 숙청할 힘이 없습니다. 재력이 없습니다. 왕가의 재산으로는 경제를 흔들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폭군이 탄생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유리아는 원래 이 나라의 구조가 그렇다면서 단언했다.
“그리고 귀족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전의 왕세자가 죽은 건 병이 아닌 파레인 왕세자가 수를 쓴 것이라는 걸.”
“……지금의 파레인 왕세자는 폭주하고 있을 뿐이군요.”
“네. 폭주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을 테니 언젠가 무너질 겁니다. 그때… 이 나라의 귀족들은 결단을 내리겠죠. 다행히도 왕족은 꽤 있는 모양이니.”
“혹시….”
“네?”
“아닙니다. 공녀님. 홍차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네. 부탁드립니다. 유진.”
나는 잠깐 생각했었다.
파레인 왕세자의 폭주가 시작된 것은 그가 유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날부터였다. 파레인 왕세자는 유리아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고, 성공을 맛보고, 어떻게 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았다.
술술 풀리는 일에 자신감도 얻고, 권력의 쾌락도 맛봤겠지.
‘어쩌면 지금의 파레인 왕세자를 만든 것은 유리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지만,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워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