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9화 〉 559. 아카데미의 구원자
559. 아카데미의 구원자
“이럴 수가! 운명이 보이지 않다니! 드디어 나타나셨군요! 아홉 번째 사도시여!”
씨익 웃었다.
“예. 제가 아홉 번째 사도입니다. 카산드라. 제가 이 세상의 끝이며, 새로운 시작입니다.”
나는 원작을 통해 아홉 번째 사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구목교에서 말하는 아홉 번째 사도는 끝과 시작을 뜻한다. 기존의 세상이 끝날 때,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사도.
새로운 세상이란 교주의 운명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세상. 그렇기에 교주가 운명을 볼 수 없는 자만이 아홉 번째 사도가 될 수 있다.
“카산드라 사도.”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교주라는 호칭보다 사도라 불리는 쪽을 더 좋아한다.
“네. 말씀하십시오.”
“전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아홉 개의 눈을 가진 신께서 제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습니다.”
“무슨… 무슨 말씀이십니까.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십시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대의 운명이 뒤틀린 것과 관련 있습니까?”
“그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사기를 칠 때 확실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 주고 상대가 진실을 짐작하도록 내버려 둔다.
“…….”
노파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날 공격하지 않는 걸 보면 내 의도가 제대로 통한 게 틀림없었다.
‘연기 특성 덕분에 사기를 치면 성공률이 올라간단 말이지. 크크.’
카산드라는 날 이미 아홉 번째 사도로 인정했다. 아까 날 그렇게 불렀으니까.
“아홉 번째 사도여. 나는 그대가 고행을 치렀음을 인정합니다만, 다른 교인들은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전 도망칠 생각이 없습니다. 카산드라 사도. 제게 고행을 주십시오. 고행을 수행하여 정식으로 아홉 번째 사도로 인정받겠습니다.”
“역시 아홉 번째 사도!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나도 고행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허나 여기서 내가 거절한다면 의심을 받을 테고, 일이 꼬이게 된다.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좆같은 일을 시킨다면 바로 도망치자.’
구목교를 위해 무언가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두 번째 사도 후보가 고행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도라면 금발의 그 아이군요.”
나는 아는 척을 했다. 두 번째 사도도 원작에서 나왔다. 이런 건 바로바로 아는 척을 해줘야 카산드라의 의심을 지울 수 있다.
“네. 그 아이는 고행을 이겨내고 사도가 될 것입니다. 그 아이는 성녀의 운명을 타고났으니까요.”
“예. 구목교의 성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운명의 사도여. 당신의 고행은 그 아이를 돕는 것입니다.”
“카산드라 사도의 뜻을 모르겠군요. 그녀는 저나 카산드라 사도의 도움이 없어도 고행을 완수하고 두 번째 사도가 될 것입니다.”
“네. 압니다. 그게 그 아이의 운명이니. 저는 그대의 개입으로 변하는 그 아이의 운명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제가 개입한다고 해서 운명이 완전히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바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카산드라의 눈에는 기대감이 서렸다. 내가 여기서 뭐라 말해봤자 그녀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카산드라는 나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게 주어진 고행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아홉 번째 사도여. 지금 바로 그 아이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부디 그 아이에게 새로운 운명을….”
카산드라가 손짓한다.
내 주위로 마나가 모여들었다. 발아래에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진다. 마법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인 나지만, 분위기상 전이 마법이겠지.
‘전이 마법을 이토록 쉽게 하다니…. 역시 마법 스킬이 SSS 랭크답군.’
쑤욱.
육체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지부장님! 마준강의 조카로부터 마준강이 평소에 수상한 종교에 빠져 있는 것 같다는 증원을 받았습니다!”
“수상한 종교…? 설마!”
부하의 보고에 지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상한 종교는 이 세상에 넘쳐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히어로의 경우 수상한 종교라 하면 한 종교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구목교.
힘을 가진 사이비 집단. 자살 폭탄 테러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광신도들이 넘쳐나는 곳.
그리고 유독?눈과 관련된 특성을 가진 자들이 많은 곳이다.
“정령안! 구목교가 노릴 이유는 충분하군! 망할! 놈들이 한국에도 자리 잡고 있었나?! 현재 마준강은 어디에 있지?”
“일주일 전부터 실종된 상태입니다!”
“찾아내! 그 행적을 전부 조사해서라도!”
지부장은 부하에게 명령한 뒤 성하리를 힐끗거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성하리는 위험한 눈을 한 채 구목교란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구목교… 구목교….”
구목교의 정확한 위치가 드러나는 순간, 그녀는 뇌신이 되어 분노를 터트릴 것이다.
“지부장님! 민후석의 자동차가 강원도 어느 산에 들어간 걸 확인했습니다! 추적하려고 했으나 결계가 쳐져 있습니다! A급 이상의 히어로들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승인해주십시오!”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 내 승인을 일일이 받아야겠나? 당장 결계 전문의 히어로들을 파견해서 철저하게 분석해! 이건 우리 히어로 협회의 자존심과 명성이 걸린 문제라는 걸 잊지 말…. 잠깐. 성하리 히어로는 어디 갔지?”
“헉! 위치 정보가 적힌 서류가 사라졌습니다!”
“성하리 님은 방금 뛰쳐나가시던데요?”
“이런 제길. 어서 히어로들을 불러!”
“네! 결계 전문 히어로들에게 연락하고 긴급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아니. 결계 전문 히어로들이 아니다!”
“네?”
“성하리가 움직였다! 결계까지 통째로 박살 내겠지! 뒷수습 전문 히어로들을 부르도록!”
???
『특수 던전, 욕도(慾島)에 입장했습니다.』
『욕도(慾島)는 당신의 욕망과 감정을 시험할 것입니다.』
섬이었다.
정령안을 발동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섬 주위에는 바다가 있다. 세차게 부는 바람과 함께 파도가 불어온다. 파도의 높이가 꽤 컸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처럼 우중충하다.
섬에는 숲도 있고, 바위도 있고, 강도 있고…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의 섬이었다. 크기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섬에는 정령이 없었다. 여긴 바깥과 이어져 있는 거로 보이지만, 던전 내부다.
‘특수 던전이라 골치 아프게 됐군.’
나는 뺨을 긁적였다. 특수 던전은 일반 던전과 비교해 기초부터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
간단히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죽이는 것으로 던전을 공략할 수 없을 것이다.
‘카산드라는 두 번째 사도 후보를 찾으라고 했지. 이 섬 어딘가에 있을 텐데.’
나는 이 던전 욕도(慾島)에 대해 잘 모른다. 다만 두 번째 사도와 연관하여 생각해보면 대충 어떤 던전인지는 짐작이 간다.
가만히 있어봤자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우선 움직였다.
‘일단 봉우리 쪽으로 가볼까. 높은 곳에서 보면 찾을 수 있을지도.’
숲길을 걸었다.
바람이 불어오며 나무가 흔들린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맛있는 냄새가 났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냄새였다. 그저 맛있는 냄새.
입에 침이 고이고,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연신 울린다. 내 발끝은 이미 냄새가 풍겨오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꿀꺽. 꿀꺽.
군침을 계속해서 삼켰다. 사흘을 굶고 한우 냄새를 맡았을 때도 이러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요리 냄새지?’
냄새의 정체는 어이없게도 나무 열매였다. 커다란 나무에 파란색의 이름 모를 열매가 맺혀 있었다. 형태는 사과처럼 생겼다. 표면이 탱글탱글한 게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터질 듯 넘쳐흐를 것 같다.
꼬르르륵. 꼬르륵.
‘아. 못 참겠다. 하나만 먹어보자. 이렇게 맛있는 냄새를 풍기니 맛도 끝내주겠지?’
헌터로서 정체 모를 열매를 먹는 건 피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독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내겐 완전 회복이 있었다. 설령 죽더라도 다시 기회가 있다.
뚝.
나무 위로 올라가 열매를 땄다. 맛있는 냄새가 더 진해진다.
와그작!
열매를 들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상상했던 대로 과즙이 넘쳐 흘렸다. 과육은 사각거렸고 과즙은 달콤했다. 나는 배가 채워지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열매를 게걸스럽게 해치웠다.
꼬르륵.
‘한 개는 너무 적어.’
다행히 나무에 맺힌 열매는 수 십 개였다.
와그작! 와그작!
파란 과일을 미친 듯이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손이 멈추지 않았다.
꼬르륵! 꼬륵!
이상함을 느낀 건 과일을 10개를 넘게 먹었을 때였다. 이미 내 몸의 절반 이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배가 전혀 부르지 않았다.
‘맛있긴 한데 의미 없이 먹기만 할 뿐이잖아.’
열매를 따서 인벤토리에 넣은 뒤 나무 아래로 내려섰다.
배가 채워지지 않더라도 맛은 최고라고 할 수 있으니 걸어가면서 심심풀이로 먹을 생각이었다.
‘맛은 진짜 최고야. 이런 맛은 어디에도 없겠지.’
한 입 베어 물려는 순간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열매가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벤토리에서 다른 열매를 꺼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열매가 사라졌다.
‘……설마. 나무랑 너무 멀어져서 사라진 건가?’
열매를 가지러 돌아갈까?
‘아니. 어차피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데 수고스러움을 감수할 이유가 없지. 그냥 가자.’
『식욕을 극복했습니다.』
알림창을 본 내 얼굴이 구겨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곧장 이해되었다.
욕도.
욕망의 섬.
이 던전은 사람의 욕망을 시험한다.
나는 방금 식욕의 시험을 받은 것이다.
‘감히 날 멋대로 시험해? 마음에 안 드는군.’
???
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착했다. 섬을 내려봤다. 숲, 강, 꽃, 바위, 눈, 사막…. 온갖 환경이 섬 하나에 들어 있었다.
“찾았다. 사막에 있었나.”
사제복을 입은 한 아이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잠시 지켜봤다. 지금 사막으로 갔다가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아이의 목적이 어디인지 알고 갈 생각이었다.
‘뭐야. 왜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거야?’
길을 잃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이곳의 사막은 기껏해야 2km다.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건가?’
당분간은 사막을 떠날 것 같지 않아 보이니 내가 찾아가기로 했다.
내가 사막에 도착했을 때, 그 아이는 여전히 사막을 걷고 있었다. 그 아이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구목교의 교인들이 입는 복장보다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밝았고 허리 부근까지 내려와 걸을 때마다 찰랑거린다. 피부는 새하얗다.
아이였다. 지금의 나랑 비교해 2~3살 정도 많은 것 같았다.
두 눈을 감고 하염없이 앞으로 걷고 있다.
‘원작에서도 눈을 감고 있더니… 이때도 눈을 감고 있었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카산드라가 말한 두 번째 사도 후보. 내가 도와야 하는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였다.
“이스테.”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작은 다리가 멈췄다. 그녀는 소리가 들린,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신가요?”
“아홉 번째 사도…. 정확하게는 아직 후보지만 널 도우러 왔다.”
“저를요?”
“카산드라 사도가 날 여기에 보냈지. 내 고행은 네 고행을 돕는 일이다.”
“교주님께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녀에게서 어린아이답지 않은 성숙함이 느껴졌다. 역시 보통 아이는 아니다.
“아홉 번째 사도 후보님. 이름을 말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 말하지 않았군. 성유진이다. 이름이 유진이지. 유진이라 부르면 된다. 나는 한국어로 말하고 있지만, 넌 한국어로 말하는 게 아니군.”
“이스테 마이어입니다. 저는 영어를 쓰고 있고, 유진 님의 말도 영어로 들립니다.”
신기하지만 놀라 자빠질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여긴 특수 던전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익숙한 언어로 들리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유진 님에게 죄송한 말이지만, 고행은 저 혼자서 감내하고 싶습니다.”
“그건 안 될 말이군. 내 고행은 널 돕는 거다. 너 때문에 내 고행을 포기할 수는 없지.”
“……정녕 그게 교주님의 뜻인가요?”
“네게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익이 어디에 있지?”
“…죄송합니다. 너무 의외의 일이었던지라 잠깐 유진 님을 의심했습니다. 교주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