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2화 〉 562. 아카데미의 구원자
562. 아카데미의 구원자
“나한테는 전부 과거일 뿐이다. 나라는 변수로 인해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반대로 죽을 사람이 살 수도 있지.”
“……미래의 저는 교주님과 유진 님을 실망시켰군요.”
이스테가 쓸쓸하게 웃었다.
잠깐 정신이 멍해졌다. 왜 갑자기 급발진하며 결론을 내리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교주님이 유진 님을 제게 보내셨으니까요. 유진 님이 도와주시지 않은 미래의 저는 많이 모자라서 유진 님이 절 도와주시는 거잖아요.”
“……알면 됐군. 더 열심히 해라.”
“네. 더 열심히 할게요!”
『이스테의 호감도 : 40』
호감도가 순식간에 우호 단계로 올라섰다. 역시 어느 정도 털어놓는 것이 정답이었다.
‘호감도는 40부터 잘 안 오르지. 본래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공략해야 하는데…. 지금은 어쩌면 호감 단계까지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나와 이스테는 광명승천도로 강화한 이모션 커넥트를 다시 착용했다.
강화되기 전과 다르게 나는 팔찌를 통해 이스테의 감정을 느꼈다. 비록 내 감정에 비교하면 10%도 되지 않는 수준이지만 확실히 이스테의 감정이 느껴진 것이다.
‘강화의 효과로군. 뭐, 잘 됐어. 이스테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으니. 지금은 놀란 감정이 느껴지는군.’
이모션 커넥트의 지속 시간까지 늘어났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기에 이스테를 데리고 바쁘게 움직였다.
초원지대에 도착했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곳이었다. 초원 바닥은 푹신했고, 기온이나 습도도 지나칠 정도로 딱 좋았다.
“여긴 수면욕을 시험하는 곳이에요. 유진 님. 졸리시죠?”
“날씨가 딱 좋긴 한데. 그렇게 잠이 올 정도는 아니야.”
“대단하시네요. 전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깐 누워서 잠들었어요. 원래는 30분 정도만 자려고 했지만, 깨어나고 보니 4~5 시간이 지나 있지 뭐예요. 바로 여길 벗어나려고 했지만, 또 졸음이 몰려와서 버티지 못하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금 유진 님과 걷고 있으니 조금도 졸리지 않네요.”
이스테는 내 감정을 보다 크게 느끼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그녀는 졸음을 느껴야 마땅하다.
『수면욕을 극복했습니다.』
길을 걷는다.
나와 이스테의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박수갈채를 보낸다.
“유진 님! 존경합니다!”
“이스테 님! 저는 이스테 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두 분이 계셔서 이 세상은 즐겁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찬양하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힐끗 이스테를 쳐다봤다.
“이스테. 네가 내 감정을 느끼듯이, 나도 네 감정을 느끼고 있다. 저들로부터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있군.”
“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니까요. 진심이 없어요. 유진 님은 오히려 귀찮아하시네요?”
“의미 없는 명예만큼 시시한 건 없지.”
『명예욕을 극복했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황금과 보석을 발견했다.
이스테는 황금과 보석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것뿐이었다.
나는 혹시 모르니 황금과 보석을 챙겼다. 욕심은 크게 나지 않았다. 내가 전력을 다하면 돈 정도는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까. 다만 이 중에 10%만 진짜여도 내 수고스러움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황금과 보석은 일정 거리를 지나자 돌멩이로 변했다.
‘그럼 그렇지.’
돌멩이들을 내던졌다. 재물을 찾아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재물욕을 극복했습니다.』
느닷없이 마을이 나왔다.
한국이 아니라 유럽 쪽의 작은 시골 마을로 보인다.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나타나 이스테를 감쌌다.
“이스테. 이스테. 우리 같이 놀자!”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이스테로부터 기쁨의 감정이 전해져 온다. 허나 이스테는 내 눈치를 보느라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놀 거면 신나게 놀아야지 딱 30분만 놀고간다.”
나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어 놀아주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나자 이스테는 약간 지친 기색으로 웃었다.
“힘드네요. 하지만 즐거웠어요. 유진 님은 많이 즐기시지 못한 것 같네요.”
“수준이 안 맞으니까. 원래의 너는 어떻게 여길 통과했지?”
“아이들의 제안을 거절했었어요. 제겐 그편이 쉬운 길이었으니까요. 유진 님은 제게 감정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아까부터 일부러 감정을 부풀리고 있죠? 고마워요.”
『즐거움을 극복했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감정의 시험을 빠르게 통과한 우리는 검은 바위 지대에 도착했다.
바위 지대에 가까워질수록 에스테로부터 불안감이 느껴졌다.
“……유진 님. 여기는 나중으로 미루지 않으실래요?”
“여기서 뭘 시험하는지 알고 있나 보군.”
“미움의 감정을 시험해요. 하다못해 이 팔찌를 벗으면 안 될까요? 유진 님이 절 경멸하게 될까 두려워요.”
“그럴 일 없다.”
바위 지대에 들어갔다.
사람이 나타났다.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하얀 피부를 가진 남녀였다. 나이는 대충 30대로 보인다. 남자는 듬직했고 여자는 이스테를 닮아 예뻤다.
나는 그들이 이스테의 부모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눈 뜨지 마. 이스테. 네 눈이 얼마나 섬뜩한지 알고 있니?”
“하아. 어쩌다 이런 아이가 태어나서는…. 당신. 솔직히 말해. 다른 남자랑 뒹굴었지?”
“지금 날 의심 한 거야?”
“상식적으로 의심 안 할 수가 없잖아! 내 자식이 저런 끔찍한 눈을 타고 나다니!”
“난 오히려 당신이 더 의심스러워. 당신 조상 중에 괴물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부부 사이에 폭언과 폭언이 오갔다.
힐끗 본 이스테는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그녀의 감정이 내 안으로 생생하게 흘려 들어온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미움이라 하길래 상대를 미워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미움을 받는 쪽이었나. 아니. 아직 속단하기는 이른가?’
이스테의 눈의 경우 내게는 신기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눈이지만, 일반인이 느끼기엔 다르다. 아름다움을 떠나서 너무 이질적이다. 내가 가진 정령안처럼 껐다, 켜는 게 가능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이스테는 태어날 때부터 각성자로서 태어난 모양이다.
“이스테! 눈 뜨지 마! 절대로 눈 뜨지 마! 네 두 눈은 그 무엇보다 끔찍하니까! 알겠지?!”
이스테의 어머니가 발악하듯 외친다. 저건 학대다. 어린아이에게 빛을 빼앗는 학대. 이스테의 성격이라면 분명 곧이곧대로 따랐겠지.
이스테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눈 떠.”
내가 말했다. 이스테가 흠칫 놀랐다.
“하, 하지만.”
“별거 아니야. 이 시험은 미움. 네가 미움받는 게 아니라 네가 사람을 미워해야 한다는 거지. 어차피 저건 진짜 네 부모도 아니야. 네 진짜 부모는 지금 어디에 있지? 죽었나? 구목교가 죽였을 수도 있겠군.”
“……살아 있어요. 제가 교주님께 부탁드렸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관대한 결정이군. 차라리 죽이지 그랬나. 네가 저들에게 느끼는 건 사랑 같은 게 아니다. 두려움뿐이지. 두 눈을 뜨고 저들을 보고 미워해라. 너도 알고 있듯 저들은 가짜다.”
“…….”
에스테가 망설인다. 나는 에스테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손을 꽉 잡았다.
“네가 저들을 증오하지 못한다면 내가 대신 증오해주지.”
증오를 일으켜 에스테에게 폭언을 내뱉는 부모를 노려본다. 그 모가지를 쥐어뜯고 범하고 싶다. 내 몸에서는 살기까지 흘러나왔다. 허나 저들은 내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유진 님. 고마워요. 저를 대신해 분노해주고, 미워해 줬군요. 네. 이게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이군요. 좋은 느낌은 아니에요.”
에스테가 눈을 떴다. 오로라를 닮은 두 눈동자로 지긋이 쳐다봤다.
“어머니. 아버지. 이제 저와 당신들이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이번 한 번만, 유진 님의 말씀대로 당신들을 미워하겠습니다.”
쨍.
부부의 몸이 금이 가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미움의 시험을 극복했습니다.』
‘남은 건 4개인가. 뭐, 이것도 빠르게 할 수 있겠지.’
에스테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를 향한 채로 싱긋 웃었다.
『이스테의 호감도 : 47』
???
『특수 던전 욕도의 모든 시험을 극복했습니다.』
『보상으로 감정을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역시 그렇군.’
에스테는 시험 도중에 감정을 버린 것이 아니다. 지금의 에스테를 보면 알겠지만, 결코 인형이 아니다. 애초에 감정을 버린다고 해서 쉽게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특별한 힘이 없다면 말이다.
“그런 기회는 필요 없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감정이 있어야 재밌다. 애초에 절대정신을 가진 내 감정을 지우는 게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저도 감정을 없앨 생각은 없어요. 유진 님 덕분에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았으니까요.”
이스테가 웃으며 말했다.
『이스테의 호감도 : 50』
호감도는 딱 50. 내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호감도 50으로는 부족하지. 앞으로 이스테와 자주 만나는 게 중요하겠군.’
호감도는 사람에 따라 올라가는 속도와 떨어지는 속도가 다르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너무 오래 만나지 않으면 호감도는 내려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 교주님의 마법이에요.”
“그렇군.”
던전 공략을 끝낸 우리의 발밑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우리는 마법진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섰다.
마법진이 번쩍거리고 풍경이 바뀌었다. 구목교 교주의 방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두 번째 사도와 아홉 번째 사도여.”
“교주님!”
이스테는 꽃이 만개한 것처럼 미소지으며 카산드라를 향해 뛰어갔다. 할머니와 손녀를 보는 것 같았다.
“이스테 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많이 지치신 것 같군요. 방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세요.”
“네. 교주님. 사실 조금 힘들긴 했어요. 먼저 실례할게요. 유진 님도 나중에 다시 꼭 만나요.”
이스테는 비틀거리며 방 밖을 나갔다. 매우 피곤해 보였다. 3개월 전에 특수 던전에 들어갔다고 하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카산드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첫 번째 사도. 이제 만족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아홉 번째 사도여. 이스테는 구목교의 좋은 성녀가 될 것입니다.”
“그렇겠죠. 저도 이번에 살짝 무리한 것 같으니 휴식을 취하고 싶습니다.”
“정식으로 아홉 번째 사도가 되셨으니 이곳을 얼마든지 이용하셔도 됩니다. 아홉 번째 사도시여. 제게 원하는 것은 없습니까?”
습관적으로 카산드라의 몸을 훑어보았다. 늙은 몸. 성욕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아십니까? 구목교 한국 지부가 궤멸했습니다.”
벌써?
예상보다 빠르긴 한데 예상하고 있었으니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들이 성하리를 막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주먹을 쥐며 카산드라를 경계했다.
“괜찮습니다. 아홉 번째 사도여. 한국 지부 정도는 언제든지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구목교가 아홉 번째 사도께 먼저 무례를 저질렀지요.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한국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구목교의 한 지부가 궤멸했는데 화는 나지 않습니까?”
“구목교의 교인들은 얼마든지 다시 채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아홉 개의 눈을 가진 신과 마주할 수 있는 사도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아홉 번째 사도여, 그대는 특별합니다.”
요컨대. 사도 이하의 교인들은 같은 인간으로도 안 본다는 뜻이다. 나나 이스테에게 친절하다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까지 친절하다는 건 아니다. 카산드라는 수백, 수천 명을 망설임 없이 학살할 수 있는 여자다.
“첫 번째 사도. 도움을 받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네. 말씀만 하십시오. 성의를 다해 돕겠습니다.”
날 도와주겠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는 없다.
???
관악구 지하, 구목교의 숨겨진 한국 지부를 찾은 것은 진령성가의 정령들이었다. 진령성가는 곧바로 사람을 모아 한국 지부를 습격했다.
구목교 한국 지부는 진령성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진령성가는 역사 깊은 명문가다. 반면에 구목교 한국 지부는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을 한해 진령성가와 성하리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성한구는 진령성가의 정령사들에게 냉정히 명령했다.
“설령 광신도라고 할지라도 일반인은 제압만 해라. 히어로 협회의 트집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하리야! 알아들었느냐?!”
“……죽일 생각 없어요. 유진이를 찾아야 하니까.”
“내가 지켜볼 것이다. 고문할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