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8화 〉 568. 아카데미의 구원자
568. 아카데미의 구원자
계속 이렇게 원하는 여자를 품에 안으면서 노는 것도 좋지만, 미래를 위해서 지금 치워둬야 할 것들도 있었다. 기왕 원작 시작 전 시간대로 왔으니 볼 수 있는 이득은 최대한 봐야 할 것 아닌가.
‘문제는 내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거지.’
어린아이로서 이런저런 혜택을 받지만, 동시에 나는 감시 당하고 있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내게 필요한 시간은 3박 4일.
3박 4일 동안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성하리는 물론이고 히어로 협회가 나서서 날 찾을 것이다. 난 몇 년 전에 구목교에 납치당한 이력이 있으니까.
‘이건 알리바이를 만들어야겠어.’
운이 좋게도 날짜는 딱 맞아떨어진다. 그때쯤이면 여름 방학이었다.
‘이시은의 집에서 지낸다고 구라치는 거야. 이시은이랑 한이정과 말을 맞추면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미러 터널을 이용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 주면….’
성하리와 히어로 협회를 성공적으로 속일 수 있다.
이상적인 계획을 짠 나는 광대 가면을 쓰고 공간 이동 주문서를 찢었다.
얻어야 할 것이 있었다.
???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도시에 나타난 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나를 힐끗거렸다. 광대 가면을 쓰고 있는 어린아이는 좀처럼 볼 수 없으니 당연했다.
내가 가는 곳은 어느 한 저택이었다.
안드레이 가문.
이 지역 유지다. 겉으로는 식품 유통업을 하고 있지만, 진짜 사업은 암거래다. 법으로 인해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거래한다.
가면을 쓴 나는 저택 정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검은 정장을 입은 경비원들이 나를 주시한다. 이들은 평범한 경비원들이 아니라 마피아다. 안드레이 가문은 유명한 마피아 조직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거기서 정지. 꼬마 광대가 여긴 무슨 일이지?”
선글라스를 낀 한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손에는 나이프가 들려 있다. 내가 진짜 어린아이 인지도 의심하고 있다. 좋은 자세다.
다만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탈리아어는 모른다. 대신 영어로 말했다.
“루이스 안드레이를 만나러 왔다.”
다행히 남자는 영어를 알아들었다.
“가주님을 만나러 와? 너 같은 작은 손님이 온다는 말을 못 들었다만?”
“예약하지는 않았다. 나와 그는 초면이니까. 거래하고 싶어서 왔다고 전해줄 수 있나?”
“이거 참…. 가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아는 것 같은데….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만나게 해달라고하면 만나게 해줄 정도로 안드레이 가문이 만만해 보이나? 적어도 가면은 벗고 말하는 게 예의 아닌가?”
“너희들이랑 문제 일으킬 생각 없다. 경비견이면 경비견답게 주인에게 달려가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려라.”
“하….”
남자가 살의를 담아 나를 노려본다. 나는 정말 여기서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아쉬운 쪽은 내 쪽이었으니까. 문제를 일으켰다간 거래자체를 못 할 수도 있었다. 그건 좀 많이 곤란했다.
그리고 저들의 실력은 못 해도 D등급 이상이다. 싸우면 내가 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물건들을 꺼내지 않고 순수하게 싸웠을 때의 이야기지만.
“…가주님은 평범하지 않은 손님이 오면 자신에게 먼저 알리라고 하셨지. 넌 딱 봐도 평범하지 않으니 가주님께 보고는 해주마.”
그가 무전기에 입을 대고 이탈리아어로 뭐라 지껄였다.
철컹!
정문이 열렸다.
“들어와라. 가주님이 만나시겠다는군.”
나는 말 없이 그를 지나쳐 저택 정문으로 걸어갔다. 정문 앞에는 비서가 이미 마중 나와 있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작은 광대가 온다길래 뭔소리인가 했더니 진짜 작은 광대였군. 그래. 나와 어떤 거래를 하려고 왔지?”
회색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기고 갈색 정장을 입은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외눈 안경을 썼고, 눈동자는 흑갈색이었다.
루이스 안드레이.
안드레이 가문의 가주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네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을 거래일 거야.”
“수상하군. 정말 수상해.”
루이스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본다. 조금이라도 내 정체를 유추해내려는 듯했다.
“동양인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드러난 피부 색깔. 눈동자. 그리고 동양인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군. 난쟁이는 아니고 몸 자체가 어리군. 변신 마법을 썼나? 그게 아니면 성장이 멈췄나?”
“내 정체가 그렇게 궁금하나?”
“궁금하지. 너처럼 막무가내로 날 찾아오는 인물은 3년 만에 처음이거든. 여긴 나밖에 없어. 정체를 알려주지 않겠어? 거래를 위해 서로에게 신뢰를 주자고.”
“내 정체를 몰라도 거래는 할 수 있지 않나.”
정체를 밝히 생각 따윈 없었다. 루이스는 원작에서도 그렇고 믿을 만한 놈이 못 된다. 적당히 서로 이용하는 관계가 딱 좋다.
“우리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다니… 현명하지 못하군.”
“쓸데없는 소리가 길다.”
“내게 원하는 물건은 뭐지?”
“초대장.”
“초대장? 무슨 초대장?”
“알고 있으면서 넉살을 떠는군. 하르텅그의 파티 초대장을 원한다.”
“아! 하르텅그의 파티 초대장!”
그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그리고 나를 보며 입가를 비죽였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고는 계시나? 적어도 1억 달러는 가지고 오셨겠지?”
하르텅그.
뒷세계에서 유명한 존재다. 주로 미국 쪽에서 활동하는데 다르게 밀수왕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진짜 정체는 3군단 소속의 악마다. 작위는 공작.
“물건은 있긴 하나?”
“있고말고. 얼마 전에 하늘에서 내 앞으로 쑥 날아왔지. 이게 편지가 아니라 칼이었으면 그날이 내 장례식 날이었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기하학적인 문양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검은색 초대장이었다. 초대장 자체에서 마법적 힘이 느껴진다.
“하르텅그. 그는 몇 년에 한 번씩 비정기적으로 파티를 열지. 이 파티에 초대되는 인물은 수백 명이 고작. 이 초대장은 다른 1명과 동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지. 아, 초대장을 구하러 오셨으니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시나?”
“그 초대장에는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는 거로 안다.”
“이 초대장이 없으면 파티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시겠군.”
“얼마지?”
“이건 값을 매기기 힘든 물건이야. 그쪽이 먼저 제시해봐.”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루이스가 선제시충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인벤토리에서 준비해둔 상자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오. 아공간인가? 그 물건이라면 초대장과 바꿔도 될 것 같군.”
“이걸 팔 생각은 없으니 꿈 깨라.”
“마음이 바뀌면 말하라고. 값은 섭섭지 않게 쳐주지.”
루이스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10개의 유리병이 들어있었다. 루이스는 그중 한 개를 꺼내 들어 병 속에 든 녹색 액체를 주시했다.
“이건?”
“헤빌의 촉진제. 식물의 씨앗을 땅에 심고 촉진제를 뿌리면 식물이 순식간에 자라난다.”
“…호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루이스의 눈이 빛난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오가는지 뻔하다. 이 촉진제를 연구해서 대량으로 만들어낼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이 세계에는 특별한 효과를 가진 식물이 있다. 사람을 기르기에 까다로운 식물들. 그 식물들을 대량으로, 순식간에 기를 수 있다면 부와 권력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헤빌의 촉진제를 만들 수 있다면 말이지.’
루이스는 외눈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안경에서 마나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 외눈 안경은 물건을 감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루이스가 입을 벌렸다. 그는 아까보다 더 진지해진 태도로 나를 쳐다봤다.
“물건이 진짜인 걸 확인했습니다.”
“말투가 변했군.”
“손님이 거물이라는 걸 알았는데 당연히 태도를 바꿔야죠. 부디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상관없다. 거래는 성사되나?”
“예. 부디 제 몫까지 하르텅그의 파티를 즐겨주십시오. 애인과 함께 가려고 했는데 조금 아쉽긴 하군요.”
루이스가 공손히 내게 초대장을 건넸다.
초대장을 받은 나는 내용을 확인했다. 시간은 5일 뒤의 자정. 장소는 테베레강 상류 쪽이다.
“잠깐. 질문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이 촉진제.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던전에서 우연히 구했다.”
“음. 그렇군요.”
루이스는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하르텅그의 초대장을 구하는 이유도 궁금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으니 묻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름 정도는 가르쳐주실 수 있으십니까?”
“…적광이다.”
“네. 적광 님. 다음 거래도 기대하겠습니다.”
그가 웃으며 내게 명함을 건넸다.
???
자정이 되기 30분 전, 초대장에 적힌 장소에 도착한 나는 주위를 살펴봤다. 로마 도시 쪽은 아니어서 주위가 어두컴컴했다. 특히 오늘 밤에는 달이 뜨지 않아서 더더욱 어두웠다.
‘내 목적은 하르텅그를 죽이는 것.’
1회차 때 내 뒤통수를 때린 악마왕이자, 다섯 번째 군단장인 메킨에 대한 복수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놈을 죽이기 위해선 언젠간 내 적이 될 군단 소속의 악마들을 없애둘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로는 하르텅그를 죽이기 힘들지.’
죽이겠다고 설쳐봤자 오히려 내가 죽을 뿐이다.
하지만 내게는 유희 생활 어플이 있었다.
[캐릭터를 소환합니다. 대상: 유리아 그레이스]
[유리아 그레이스의 남은 소환 유지 시간: 30일]
메이드가 나타났다.
“주인님을 뵙습… 니다.”
유리아는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잡고 내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다가 말을 더듬었다. 유리아 답지 않은 실수였다.
“환영해. 유리아. 네 도움을 받고 싶어서 소환했어. …유리아?”
유리아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이 예상 밖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지라 조금 놀랐습니다.”
“내 어린 모습이라면 저번에도 보지 않았나?”
“그때보다 좀 더 어려 보이시는군요. 그리고 그때는 주인님을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나는 유리아에게 이번 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그녀는 내 말에 토 한 번 달지 않고 전부 듣고 이해한 뒤에 말했다.
“어쩌면 한계 초월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네. 제가 해야 할 일은 확실히 숙지했습니다.”
유리아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몸을 낮추었다.
“옷이 흐트러지셨군요. 그리고 파티에도 어울리지 않는 옷입니다. 5분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으니 차라리 옷을 바꿔 입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옷이 없어. 파티를 즐기려고 가는 것도 아니고.”
“남들의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기회가 올 때까지 파티에 녹아들어야 하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좋습니다. 주인님의 옷이라면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유리아의 그림자 속에서 파티용 턱시도가 나타났다. 턱시도는 허공에 두둥실 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어린아이용은 아니잖아.”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턱시도가 점점 축소되더니 어린아이 사이즈로 변했다.
“마법은 편리하군.”
“만능은 아닙니다. 원래는 주인님의 옷은 직접 손으로 재단하는 걸 선호합니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자, 팔을 벌려 주세요.”
양팔을 벌렸다. 유리아가 능숙하게 내 옷을 벗겼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주인님.”
“응?”
“외람됩니다만, 옷을 입으시기 전에 잠깐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안는 거 정도야. 뭐.”
“감사합니다.”
유리아가 양손으로 날 꽉 끌어안았다. 몸 곳곳에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유리아는 역시 냄새도 좋았다. 자지가 발기하려는 순간, 그녀는 내 몸에서 떨어졌다. 유리아는 살짝 붉어진 뺨으로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유리아는 이어서 내 몸에 턱시도를 입혔다.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어. 편해.”
“잘 어울리십니다.”
“고마워. 유리아 누나.”
“……!!”
유리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반응에 나는 킬킬 웃었다.
자정이 되었다.
어두운 구름 속에서 낡은 나룻배가 땅 위로 내려왔다. 나와 유리아는 서둘러 가면을 썼다. 난 광대 가면을, 유리아는 무늬 없는 가면을. 내 신분이 노출되면 일이 꼬이게 된다. 가면은 필수다.
나룻배에 서 있던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르텅그 님의 마부입니다. 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파티 초대장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기.”
그는 생기 없는 눈동자로 초대장을 훑어보고 다시 내게 건네줬다.
“확인했습니다. 배에 올라타시죠. 파티장까지 안전하고 신속하게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