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1화 〉 571. 아카데미의 구원자
571. 아카데미의 구원자
“두 눈으로 보고 영혼으로 감탄하거라. 2만의 인간의 영혼과 66마리의 불의 정령을 갈아 만든 불꽃의 심장이다.”
하르텅그가 희열에 찬 얼굴로 웃었다.
푸욱.
어디선가 날아온 검날이 하르텅그의 목에 박혔다.
하르텅그가 육중한 몸을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무심코 찰나를 사용했다. 세상이 느려지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계획한 타이밍보다 조금 빨라. 하르텅그가 사람들의 갈채를 밟으며 기분이 한껏 고조되었을 때 죽이는 게 계획이었지.’
날아와 하르텅그의 목을 꿰뚫은 검은 유리아의 공격이 아니었다. 유리아가 저렇게 단순하게 검을 던져 공격했을 리가 없다. 유리아는 주로 단검을 사용하고, 더욱 은밀하고 확실하게 기습했을 것이다.
나는 힐끗 천장을 쳐다봤다. 유리아가 그림자로 몸을 감싸고, 기척까지 완벽히 없애고 숨어 있는 곳.
‘검이 날아온 방향은 내 뒤쪽.’
몸을 움직였다.
찰나가 풀렸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 검이 날아온 곳을 쳐다봤다. 살인을 목격했다고 비명을 지르며 당황하는 어중이떠중이는 이곳에 없었다. 그런 어설픈 놈들은 애초에 하르텅그의 초대장을 받지 못한다.
‘누구지?’
검을 던진 자세를 하고있는 남자가 있었다. 붉은색의 화려한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주위에 있던 이들은 그 누구도 하르텅그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다물고 흥미롭게 남자를 쳐다봤다.
하르텅그가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는 것이다.
“재미있군.”
하르텅그의 목소리가 나왔다. 목에 검이 꿰뚫렸음에도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한다. 하르텅그의 몸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에 지금껏 태연하던 이들이 흠칫 놀라 하르텅그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질긴 놈. 성검에 당하고도 허세를 부리는군. 네가 악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몸이 본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성검? 이딴 조잡한 검이?”
하르텅그가 목에 박힌 검을 맨손으로 잡았다. 검에서 새하얀 빛이 나며 하르텅그를 저항한다. 그러나 하르텅그는 빛이 자신의 몸을 공격하든, 말든 무시하고 검을 끄집어냈다. 검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르텅그의 목에선 피 대신에 녹색의 유황불이 넙실거렸다. 그의 피부가 화산지대처럼 검게 변하고, 머리 위에 뿔이 돋아난다.
“역겨운 모습을 드러내시는군. 인간계에서 많이도 해 먹었으니, 이제 그만 그 죗값을 치러야지.”
붉은 가면은 당황하지 않고 양손에 검을 만들어냈다. 하르텅그의 목에 박혔던 검과 똑같이 생겼다.
다시 찰나를 사용해 사고를 가속했다.
‘저 붉은 가면…. 누군지 알겠다.’
젠 하이트.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활동하는 S급 히어로. 아니지. 지금 시점에선 아직 S급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는 악마를 전문으로 죽이는 히어로다. 별명은 데빌 헌터.
그가 가진 특성은 ‘성검인(S+)’으로 일시적으로 성검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몸에 성검의 능력을 부여하는 특성이다.
데빌 헌터라는 별명처럼 악마를 죽이기 위해 특화된 능력이었다.
‘근데 왜 저놈이 여기에 나타난 거지? 원작 루트 중에서 저놈이 하르텅그의 파티에서 깽판을 쳤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답은 쉽게 나왔다.
지금 이 세계는 원작에 있는 루트와는 전혀 다른 루트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뭐, 애초에 원작에는 성하리의 아들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원작이 비틀린 거지.’
그 나비 효과가 지금일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신경을 껐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지금 상황은 내게 득이 되었다. 젠의 힘을 이용하면 유리아가 한계 초월을 사용하지 않아도 하르텅그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했으니 유리아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겠지.
한계 초월은 1분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마지막 수단. 그녀는 최대한 한계 초월을 나중에, 어쩔 수 없거나, 하르텅그를 죽일 수 있는 확실한 상황에서 사용할 것이다.
‘마침 모두의 시선이 하르텅그와 젠에게 향했군. 잘 됐어. 내가 할 일은 화심을 훔치는 일이니까.’
화심은 하르텅그에서 손에서 떨어진 상태에서도 허공에 못 박혀 스스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하르텅그 쪽으로 5M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유리아가 움직였다.
천장과 지면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치솟아 하르텅그를 공격한다.
“뭣?”
젠에게 집중하고 있던 하르텅그는 속수무책으로 그림자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림자 손이 화심을 잡고 나를 향해 내던졌다.
날아오는 화심을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손에서 뜨거움이 느껴진다. 손이 타는 게 아닐까 싶지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손은 멀쩡했다.
‘젠장.’
정령안이 강제로 발동했다. 두 눈이 시큰거렸다.
‘거부 반응이잖아. 원래 계획은 내가 화심을 흡수하는 건데. 정령안을 발동한 걸 보면… 불의 정령 66마리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문제인가?’
원작에 따르면 화심의 사용법은 총 3가지였다. 흡수하거나, 무기나 방어구의 재료로 사용하거나, 누군가에게 팔거나.
‘찰나.’
세 번째 찰나를 사용했다. 나는 화심을 인벤토리에 넣고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허. 이제 보니 도둑놈들이셨군. 이렇게 당해본 게 몇 년 만이지? 40년 만인가?”
뒤에서 하르텅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힐끗 보니 공격을 받고도 멀쩡한 상태의 하르텅그가 있었다. 유리아는 그림자를 몸을 감싸 정체를 숨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새까만 오러가 검날에서 일렁인다.
“내 물건을 훔친 도둑은 많았다. 그리고 전원 손모가지와 발모가지를 자르고 불지옥의 가장 따스한 곳으로 모셨지. 흐…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도둑놈들을 모실 수 있어 기쁠 것 같군.”
하르텅그의 몸에 녹색 불이 치솟는다. 그의 뚱뚱한 몸이 3M가 넘는 거인으로 변했다.
나는 이 유람선 전체가 하르텅그의 영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건 도망갈 수 없다.
그리고 놈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하니 자존심을 버리고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줄이야. 하르텅그는 내 생각 이상으로 화심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군.’
주머니에서 공간 이동 주문서를 꺼내 찢었다. 반응이 없었다.
‘시발! 하르텅그의 권능의 영향 때문인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불의 심장을 내놓아라. 그럼 자비를 베풀어 조금 덜 따스한 곳으로 모셔주지.”
하르텅그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려고 했으나, 유리아와 젠이 동시에 그를 공격했다. 의외로 둘의 합이 맞다.
‘유리아가 전음으로 젠에게 지시를 내렸겠지.’
도망치던 걸음을 멈췄다.
밖으로 나가봤자 놈의 시선을 따돌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유람선에는 놈의 부하들이 깔려 있다. 화심 때문에 전력을 다하는 것을 보면 지금 도망쳤다가는 바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릴 것 같다.
“망할 악마 새끼…. 공작이란 작위는 폼이 아니군. 설마 인간계에서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줄이야.”
“너희들은 내 지옥불에 타지 않은 것만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 봐라, 저것들은 내 지옥불을 버티지 못하고 좋은 비명을 내지르고 있지.”
불타는 건 아까까지 여기 있었던 관중들, 하르텅그에게 초대받은 손님들이었다. 일부는 도망갔지만, 그 외의 대부분은 녹색 지옥불에 불타고 있었다.
‘내가 죽지 않는 건 화심 때문이겠지.’
이대로 유리아가 하르텅그의 빈틈을 노리고 한계 초월을 쓰는 걸 기다리면….
‘잠깐.’
유리아와 젠이 점점 밀리고 있었다.
젠의 성검은 하르텅그의 검은 피부 거적을 겨우 베어내는 수준이고, 유리아의 그림자는 하르텅그의 불타는 몸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유리아가 놈에게 데미지를 입히는 건 간간이 사용하는 검은 뇌전이다. 다만 그것도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
‘이 새끼 점점 더 강해지고 있잖아?!’
털썩. 털썩.
주위에 있던 하르텅그의 노예들이 쓰러진다. 강한 놈들부터 차례차례로 쓰러지고 있다.
무슨 일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제물. 계약한 노예들을 제물로 쓰고 있군.’
하르텅그는 원작과 달리 오만함을 버렸다. 가장 처음, 놈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놓쳤던 것은 꽤 컸다. 그때 유리아가 한계 초월을 했더라면….
‘아니. 제물이 있으니 모른다.’
화심에 관한 집착이 이 정도 일줄 몰랐다.
“화심이 그렇게 중요하나?”
“200년. 200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낸 것이 불의 심장이다. 그게 있으면 제약 일부를 풀어내고 더 자유롭게 인간계의 삶을 즐길 수 있다.”
“지금도 자유롭게 놀고 있는 주제에 욕심 하나는 더럽게 많군.”
“자유를 갈망하는 것에는 끝이 없는 법이다. 너희 인간도 그렇지 않나. 음. 제물로 낼 수 있는 출력은 이 정도가 한계인가.”
하르텅그가 주먹을 휘둘렀다. 얻어맞은 젠이 천장과 함께 밤하늘 위로 치솟았다. 그 여파에 유리아가 휩쓸려 바닥을 굴렀다. 유리아의 얼굴에 피가 흐른다.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주인님. 한계 초월을 사용하겠습니다. 지옥불의 권능이란 것은 제 그림자와 상성이 좋지 않습니다. 1분 안에 처리하기는 힘들겠지만, 주인님을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호를 보낼 테니 주문서를 준비하십시오.
“됐어.”
나는 당당히 섰다.
“생각해보니. 메킨 새끼도 죽여야 하는데 고작 이딴 새끼한테 도망치면 어불성설이잖아.”
나를 향해 다가오던 하르텅그가 멈췄다. 놈이 내게 흥미를 보였다.
“메킨? 다섯 번째 군단장을 말하는 건가. 어린 것의 포부가 대단하다 못해 경악스럽다. 도둑이여. 네 이름이 무엇이냐.”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에 살아 있는 사람은 나와 유리아 단 둘뿐이었다. 살려두고 있다는 말이 옳겠지.
“성유진. 사법의 비호를 받는 남자다.”
“크크. 웃긴 놈이로군. 이름은 기억해두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화심을 꺼냈다. 두 눈은 강제로 정령안을 개안한다. 화심은 여전히 뜨거웠다. 갑자기 거부 반응이 사라진다는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 간단히 내게 화심을 바칠 줄이야. 실망이군.”
“누가 너한테 준다고 했나? 이건 내가 사용할 거다.”
하르텅그의 입가가 쭈욱 찢어진다. 날카로운 이빨은 녹색불로 불타고 있었다.
“너 따위가? 기다려 주지. 할 수 있으면 해봐라.”
하르텅그의 오만함이 돌아왔다. 놈의 입장에서 지금 상황은 이미 정리가 끝난 상황이다. 놈의 눈에는 내가 꿈틀거리는 지렁이 정도밖에 안 보이겠지.
“순식간에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 미리 말해두마.”
“고인의 유언을 듣는 건 좋아한다. 말해라.”
“니 화심 쩔더라.”
천재의 시간을 사용했다.
화심은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거부 반응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흡수는 불가능하다. 천재의 시간이 유지되는 시간 동안 화심을 전부 흡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우선 마나를 이용해 화심을 공명시키고, 정령 계약 스킬을 사용했다.
‘계약의 대가로 화심을 주마. 화심을 가지고 싶은 놈은 당장 튀어와라.’
화심을 이용했으니 불의 정령이 튀어나올 것이다.
이곳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유람선이지만 문제는 없다. 바다 아래에도 화산이 존재하니까.
설령 수십 킬로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최상급 불의 정령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연결됐다.’
-계약하지.
바위 같은 목소리가 들린 직후, 내 앞에 붉은 용암으로 이루어진 거대 거북이가 나타났다.
“이런 망할! 불의 심장을 정령 따위에게 넘길 것 같나!”
최상급 정령의 등장에 깜짝 놀란 하르펑그가 부랴부랴 노성을 터트리며 이쪽을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나타나기 전부터 용암 거북이와 나의 계약은 완료되었다.
용암 거북이는 하르텅그를 비웃으며 화심을 삼켰다.
‘와라.’
아직 8초밖에 지나지 않았다. 천재의 시간은 유지되고 있다.
‘정령강령!’
용암 거북이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용암 거북이.
이 새낀 좋은 놈이 아니었다.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거의 100% 내가 감당하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내가 죽으면 화심만 낼름 먹고 사라질 생각이겠지. 아주 마음에 드는 정령이야. 이 일은 꼭 기억해두지.’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존재감과 힘이 느껴진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내 몸은 시뻘겋게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뜨겁지는 않았다. 현재 나는 정령강령으로 인해 정령이 된 것이다. 얼핏 보면 화염이 내 몸을 불태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 몸을 보호하고 있다. 이 화염은 나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