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0화 〉 580. 고대의 신비
580. 고대의 신비
우리는 알체리의 도움을 받아 열쇠가 가리키는 섬에 도착했다. 기껏해야 고등학교 크기의 작은 섬이었다.
이 섬에 알체리의 병사 천 명과 알체리의 간부, 그리고 알체리의 보스가 나타났다.
알체리의 보스는 의외로 신사처럼 생긴 남자였다. 검은 정장 위에 회색 코트를 걸친 그는 우리를 보고 씨익 웃었다.
“내가 알체리의 보스인 롤란이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군. 브루노 테일러. 자네와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지?”
“…5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잠깐 만났죠. 사업가라고 들었는데 설마 당신이 알체리의 보스였을 줄이야.”
브루노는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알체리의 보스는 하하 웃고는 에이미와 맥을 스쳐 지나가듯 보고 나를 쳐다봤다.
“자네가 유진 코헨이군. 다이나에게 들었네. 전투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던데. 기대되는군.”
“그 기대에 충족시켜드리겠습니다.”
“날 실망시키지 말아주게.”
간단한 대화가 끝나고 우리는 섬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중심에는 커다란 고인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두 개의 바위 위에 크고 널찍한 바위가 올려져 있는 모습은 문과 흡사했다.
바위 표면에 적혀 있는 고대 문자를 확인한 브루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말했다.
“제대로 찾아왔군. 저게 바로 열쇠가 말하는 문이라네.”
롤란은 팔짱을 꼈다.
“저 고인돌의 성분을 조사해봤지. 이 근처에 없던 화강암이더군. 특별한 성분은 없었네. 신기한 건 부수거나, 옮기려고 시도해봤네만 전혀 소용없더군. 폭탄을 터트려도 부서지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더군.”
“저 고인돌 자체가 고대의 신비니까요.”
“궁금한 게 있군. 고인돌은 무덤이 아니었나? 왜 저게 문이 되는 거지?”
“저건 아마 고인돌이 아닐 겁니다. 고인돌처럼 비슷하게 보이는 문일 뿐이죠.”
브루노가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직후, 열쇠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고인돌 바위를 비추었다. 고인돌 문이 은은하게 비치기 시작하며 문이 활성화된다. 고인돌의 중심에 전혀 다른 공간과 이어져 있는 포탈이 나타났다.
“맙소사.”
말도 안 되는 일을 목격한 롤란이 경악한다. 그의 주위에 있는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브루노! 저게 뭔가?!”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른 세계일지. 아니면 지구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세계일지. 다만 확실한 건 저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겁니다. 저희는 저 안에서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시는 것 같으니 저희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누가 두려워했나. 자네들이 먼저 들어가는 건 보스로서 허락할 수 없네. 함께 들어가도록 하지.”
우리들은 포탈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그곳은 정글이었다. 온도가 좀 올라가고 공기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정글을 돌아다니는 동물들을 봤다. 호랑이, 곰, 사자, 거미, 도마뱀…. 정글에 살지 않는 동물까지 있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몸집이 컸다. 호랑이 같은 경우 최소 2배 이상 컸고, 거미는 30배 이상 큰 것 같았다.
나는 첫 번째 열쇠를 구할 때 총으로 쏴 죽였던 거미를 떠올렸다.
‘그 거미의 존재가 바로 이곳의 복선이었지.’
병사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벌벌 떨었다. 이곳에서 냉정함을 가지고 미지를 직시하고 있는 사람은 10%도 되지 않았다.
“브루노. 보물이 있다면 어디에 있을 것 같나?”
“이곳에 들어온 건 저도 처음입니다.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일단 이곳의 지리부터 파악할 생각입니다.”
“그렇군. 그럼 따로 움직이지. 자네들에게 병사들을 붙여주겠네. 다행히 무전기는 터지는 것 같으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게.”
“예. 보스. 저흰 남쪽부터 움직일 생각입니다.”
“나는 서쪽이다. 네르만. 너는 동쪽부터 움직이고, 지그, 넌 북쪽이다.”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나뉘어 움직였다.
동물은 크게 두려워할 필요 없다. 덩치가 크긴 하지만 머리나 심장에 총알이 박히면 죽는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문제는 동물이 아니라 벌레들이지. 몇십 배 커진 그놈들의 스펙은 인간을 초월해서 인간을 먹이로 삼지. 특히 가장 성가신 건 파리 계열이지.’
이곳에 들어온 사람 중 절반은 벌레에게 죽을 것이다.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건….’
내 양옆에 있는 여자들이었다.
다이나와 에이미. 그녀들이 내 옆에서 걷으며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인기있는 남자로서 흐뭇하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곳은 나도 어느 정도는 긴장해야 하니까.
‘원작대로 브루노가 알체리 보스를 상대로 수작을 부렸어.’
산전수전 다 겪은 브루노다. 아무 이유 없이 남쪽을 택한 건 결코 아니었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브루노가 가지고 있던 보물 지도 뒤쪽에 새로운 지도가 나타났겠지. 진짜 보물이 그려진 이 세계의 지도가.’
브루노는 지금 어떻게 알체리를 떨어뜨려 놓을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왼손을 뻗어 에이미의 허리를 휘감았다. 옆에 안기 좋은 여자가 있는데 내 손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평소였다면 에이미는 내 손을 뿌리쳤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많은데 어딜 만지냐면서. 하지만 지금은 내 손길을 받아들였을 뿐만이 아니라 좀 더 내 옆으로 붙었다.
‘다이나를 의식하고 있군. 크크.’
다이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내 반대로 내 팔을 잡았다. 그녀의 뭉클한 가슴 감촉이 팔목을 통해 느껴진다.
“잠깐.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에이미가 다이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땅바닥이 걷기 힘들어서 지지할 게 필요해.”
“네 부하들은 놔두고 왜 유진에게 기대는데?”
“그걸 몰라서 물어? 유진이 더 믿음직스러우니 그렇지. 내 부하들을 봐. 겁에 질려서 소총을 들고서 덜덜 떨고 있지. 한심한 것들이야.”
“내 눈에는 너도 한심해 보여. 유진은 내 연인이야. 좋은 말할 때 떨어져.”
“언제까지고 네 연인이라는 법은 없지. 유진이랑 섹스는 해봤어?”
“……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에이미가 언성을 높이자 다이나가 보라색 입술로 웃음을 그렸다.
“네 주위를 조사해보니 유명하던데. 혼전 순결을 유지하고 있다며? 너 같은 미련한 여자는 처음이야. 유진이랑 섹스도 해본 적 없는 주제에 너무 나대지 마. 그리고 어차피 유진과 결혼할 생각도 없잖아?”
“너, 그걸 어떻게…. 그 말의 뉘앙스는 꼭….”
에이미가 고개를 획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뺨을 타고 식은땀 한줄기가 흐른다. 원래 내 계획은 여기서 에이미를 따먹고 밝힐 생각이었다. 일단 내 좆맛을 보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으니까.
근데 다이나 이년이 에이미를 따먹기 이전에 밝혀버렸다.
다이나가 이쪽을 빤히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만약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지랄을 해댈게 분명했다.
바로 들킬 거짓말을 하며 발뺌할까. 아니면 당당하게 받아드릴까.
고민하는 순간부터 늦었다. 에이미의 눈초리가 험악해졌다.
“정말 저년이랑 한 거야?”
“에이미. 이건 다 너 때문이야.”
나는 적반하장으로 나가기로 했다.
“뭐?”
그녀가 자신의 허리에 올려져 있는 내 팔을 쳐냈다. 나는 아쉬워하면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가 학교 다니는 애새끼도 아니고 연인 사이인데 섹스를 안 하는 게 말이 돼? 요즘은 애새끼들도 섹스를 한다고. 가슴이랑 엉덩이만 허락해주고 만족하라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하다못해 펠라치오 정도는 해줬어야지. 넌 성욕을 오랫동안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하, 네가 이런 남자 일 줄은 몰랐어. 너랑 나랑은 끝이야. 앞으로 아는 척도 하지 마!”
짜악!
그녀가 내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치고는 몸을 돌렸다. 화끈해진 뺨을 느끼면서 에이미를 붙잡을까 잠시 망설였다.
‘아니야. 어차피 보물을 찾는 동안 며칠은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어. 기회는 아직 있어.’
정말 안 될 것 같으면 마지막에 강제로 따먹으면 된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아쉽긴 하지만, 저 보지를 한 번도 안 따먹고 끝낼 수는 없다.
“하하하하. 저년은 패배자 꼴이 딱 어울려.”
다이나가 대놓고 에이미를 비웃었다. 에이미의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그녀가 잠깐 뒤돌아보고는 나와 다이나를 죽일 듯이 쳐다봤다.
미친년인 다이나가 겁먹을 리 없었다. 오히려 다이나는 더욱 도발적으로 움직였다. 내 몸을 끌어안더니 내 목에 보란 듯이 키스를 한 것이다.
“망할 빗치년이….”
에이미가 살벌한 음성으로 중얼거리고는 브루노와 맥이 있는 선두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오, 젠장. 다이나. 너 때문에 다 망했잖아.”
“망하기는. 떨어져 나갈 년이 떨어져 나갔을 뿐이야. 나 같은 여자가 붙어 있는데 저런 여자가 뭐가 중요해?”
다이나가 눈웃음을 치며 내 사타구니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이나의 몸이라도 즐겨야겠다. 나는 손을 뻗어 다이나의 풍만한 가슴 하나를 붙잡고 주물럭거렸다.
뒤쪽에서 다이나의 부하들이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무시했다. 어차피 저것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보는 것밖에 없다.
???
“아아아아아악! 괴물! 괴물이다!!”
알체리의 병사들의 비명과 함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거대 잠자리 몇 마리가 나타나 병사들을 공격한 것이다.
반짝이는 날개를 고속으로 움직이며 허공을 날아다니는 거대 잠자리의 속도는 인간의 반응속도로 대응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힘도 강력하다. 놈에게 머리가 붙잡히면 그대로 머리가 뜯겨 나간다고 보면 된다.
나무에 앉아 사람의 머리통을 끄적이며 먹는 모습이 그로테스크했다. 몇몇 병사들은 싸우기는커녕 패닉에 빠져 오줌을 지리며 도망치기도 했다. 도망친 놈들의 미래는 쉽게 예상된다. 포식자가 넘쳐나는 이 세계에선 흩어지는 건 자살 행위니까.
“뭐해! 총은 폼이냐?! 저 새끼들도 생물이다! 총에 맞으면 죽는다고!”
나는 총을 쏘면서 외쳤다.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며 거대 잠자리 머리에 총알을 몇 발 박아 넣었다. 잠자리는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으, 으아악! 죽어! 죽어라! 몬스터!”
“빌어먹을! 난 곤충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어느 정도 냉정함을 되찾은 병사들이 잠자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탄피가 바닥으로 쏟아지지만 여기서 괜히 총알을 아꼈다간 오히려 죽는다.
약 10분간의 전투 끝에 거대 잠자리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었다. 그 절반은 내가 죽인 거지만.
“…수고했네.”
다가온 브루노가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브루노 씨. 표정이 좋지 않군요. 혹시 제게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브루노는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내 근처에는 거대 잠자리 사체밖에 없었다.
브루노가 목소리를 낮추고 내게 말했다.
“다이나를 죽여야 하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다이나가 자네에게 호의를 보이지만, 그 여자의 목적은 젊음의 약일세. 우리에게서 젊음의 약을 가로채서 알체리에 가져갈 목적이네. 전 세계를 위해서라도 그건 막아야 해. 자네가 다이나를 죽여서 위험을 없애주게.”
“……브루노 씨. 제가 예전에 분명 청부 살인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자네는 살인 정도는 아무렇지 할 수 있지 않나. 이건 세계를 위해서라네! 왜 몰라주나?!”
“제가 알체리의 병사들을 죽인 건, 그게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브루노 씨는 전쟁도 뭣도 아니라 살인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다이나의 목적이 어떻든, 아직 우리를 배신한 것도, 우리에게 총구를 겨눈 것도 아닙니다.”
“그건….”
“젊음의 약이란 것도 우리가 먼저 발견하고 없애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만일의 가능성도… 아니네. 내가 너무 신경이 날카로워졌었군. 방금 했던 말은 잊어주게.”
브루노가 떠났다.
나는 브루노의 태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원작에서는 이러지 않았다. 정말 필요하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남자이긴 했으나, 지금은 좀 선을 넘었다.
‘왜지?’
브루노의 뒷모습을 보니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원작에선 항상 당당했는데…. 나 때문에 원작이 틀어졌다고 해도 이런 영향을 끼칠 리가…. 음. 에이미 때문인가?’
원작에선 브루노와 에이미의 러브라인이 이어진다. 그러나 에이미는 나랑 사귀게 되었고, 브루노는 나가리가 되었다. 커다란 짐을 지고 있는 브루노는 에이미라는 정신적 기둥이 없어서 스트레스로 변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내 좆집을 내 손으로 죽이라고? 돌았군, 브루노. 방금 일은 잊지 않는다.’
???
밤이 되었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야영을 차리고 텐트 안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다이나는 부하들과 함께 새벽 동안 경계를 담당했고, 이 무리 중에서 최대 전력인 나는 불침번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1인용 텐트를 받았다. 말단 병사마저 납득하는 특혜였다. 나처럼 거대 곤충을 잘 죽이는 놈은 없었으니까. 나는 이곳에서 영웅 취급을 받고 있었다.
지이이익.
텐트의 지퍼가 열리는 기척에 나는 정신을 바로 깨웠다. 내 감각은 날이 서 있었다. 믿을 수 있는 놈 없는 이곳에서 푹 잠들 수 있을 리가 없다.
‘누구지? 다이나인가?’
실눈으로 텐트 안으로 들어오는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에이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