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7화 〉 597. 광명승천도
597. 광명승천도
표두인 석지돈을 비롯해 표사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잔뜩 무게만 잡던 석지돈은 쟁자수들에게 살갑게 대했다. 휴식 시간이 많아지고 쟁자수들의 편의를 봐줬다. 반면에 표사들에겐 온갖 잡일을 명령했다.
쟁자수 보다 못한 표사들.
석지돈은 노골적으로 표사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표사들은 불만하나 토로하지 않고 명령에 따랐다. 3명의 표사들은 모두 석지돈의 이름을 적었다. 여기서 석지돈에게 반항했다가 석지돈의 이름을 적은 한 명으로 몰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되는 순간 표사 일은 끝이지. 석지돈 저 새끼도 무인이야. 옷을 벗기는 거로만 끝내지 않겠지.’
표사들 3명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상사인 석지돈을 배신 때린 놈들이다. 동료라고 해서 애틋하게 생각할 리 없었다. 오히려 경쟁자라 생각하겠지.
표사들도 쟁자수에게 잘해주기 시작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명령하지 않았고,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간혹 길을 가다 객잔에 들리면 쟁자수들에게 술 한 병씩 대접하기도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쟁자수들은 표사들의 변명과 한탄을 들어 줘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동료를 비방하는 목소리도.
“자네들은 잘 모르겠지. 황비건 표사가 얼마나 치사한 인물인지. 나는 그자와 거의 5년을 함께 일했는데 괜찮은 대접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네. 그리고 이건 지나가다 들은 건데… 황비건 표사는 시정잡배 출신이라 하더군. 그 왜 있지 않나. 선량한 백성들을 무력으로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는 무리들. 황비건 표사는 가까이하지 말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자네들의 재산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네.”
“아까 영탄 표사가 헛소리를 하고 지나간 것 같군. 예전에 영탄 표사가 거짓말을 한 탓에 큰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지. 표국주께선 자비를 베풀어 내쫓진 않으셨지만…, 가까이해서 좋을 것 없는 마뜩잖은 자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팔 할은 거짓말이니 귀담아들을 필요 없다.”
표사들은 치열하게 정치질을 해댔다. 쟁자수에게 잘해주는 것도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는 일종의 청탁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낄낄 웃으며 그들의 발악을 지켜봤다.
“유진아. 표사들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순진한 성지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그를 구석으로 끌고 가 현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어, 고두막을 죽인 건 인피면구를 쓴 너잖아. 근데 너한텐 복수심도 가지지 않고 있는데…?”
“내가 저들보다 강하니까. 강자에게 당하고 복수심을 가지는 약자는 별로 없어. 복수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걸 잘 알거든.”
“석표두는 자기 이름을 적은 한 명을 찾고 있는 거지? 복수하려고?”
“그렇지. 자기보다 약한 놈들에겐 복수해야지.”
“근데 정작 석표두의 이름을 적은 건 표사들 전원이고….”
“표사들은 그 사실을 몰라. 누군가가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석표두의 이름을 적었다는 걸 들키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거지.”
“그냥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면 안 돼?”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자기 목숨을 죽이려 한 놈이야. 너라면 용서해주겠어?”
“……안 그러겠지.”
“크크. 우린 떡이나 먹으면서 저놈들을 구경하기만 하면 된다고. 돌아갈 때까지 심심한 일은 없을 거야. 뭐, 저들 중 한 명은 돌아가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지만.”
“좀 많이 실망이야. 저들은 몇 년 동안 함께 일한 동료 사이 아니었어?”
“지곤아. 강호는 생각보다 냉정해. 동료라고 해서 쉽게 믿을 수 없지. 가족 사이에도 서로 등에 칼을 꽂는 게 강호야. 너랑 나같이 우애 좋은 관계는 별로 없어.”
“으음….”
“크크. 그리고 여기서 표사들 사이에 이간질 좀 해두면 칼부림도 날 거야. 한 번 해볼까?”
“이간질은 위험하지 않아?”
“조심스럽게 하면 돼. 그게 아니면….”
나는 씨익 웃으며 계획을 설명해줬다. 성지곤을 나를 보며 경악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진아. 넌 진짜 무서운 놈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인데 뭘.”
밤이 되었다.
운송단은 날이 어두워지면 바로 야영을 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도시 밖의 밤은 요괴들의 시간인지라 매우 급한 일이 아니라면 되도록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나는 밤에 막사에서 몰래 나왔다. 일루시터를 이용해 모습을 투명하게 만들고 기척을 최대한 죽인 후 표사들의 막사로 들어가 쪽지를 남겼다.
‘사이가 나빠져서 그런지 같이 자지도 않는군.’
쪽지의 내용은 다른 표사가 네가 범인이라고 석지돈에게 고발했다는 내용이다. 전형적인 이간질. 그러나 표사들은 이 내용을 마냥 무시하지 못하리라. 왜냐면 저들은 진짜 석지돈의 이름을 적었으니까.
‘내일은 한층 더 분위기가 싸해지겠군.’
???
표사들간의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서로 눈만 마주쳐도 눈살을 찌푸리고, 살기를 흘린다. 관계없는 쟁자수들도 바짝 긴장해서 입을 꾹 다물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표두인 석지돈은 표사들의 관계를 조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운송단은 살벌한 분위기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경치가 좋군. 여기서 휴식하겠다.”
운송단은 절벽 위에서 잠깐 멈춰 섰다.
나는 주위를 획획 돌아봤다.
‘원작에 나온 곳이다! 여기다!’
성지곤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유진아. 여긴 왜 온 거야?”
“여기에 기연이 있으니까.”
“뭐?! 진짜?!”
깜짝 놀란 성지곤이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절벽과 초목뿐이다.
“장난치는 거야? 이런 장난은 재미없어. 안 그래도 요즘 나 힘들어.”
“뭘 심각하게 엄살 부리고 있냐. 어차피 여자 못 안아서 힘든 거 다 아는데. 그리고 기연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이렇게.”
나는 단검을 꺼내 나무 몸통에 박아 넣었다. 안쪽이 비어 있는 게 느껴졌다. 나무 몸통 일부를 뜯어내자 안쪽에 있는 피어 있는 꽃 3송이가 보였다.
“나무 안에서 꽃이 자라잖아?!”
“목침화(木侵花). 저래 보여도 불의 기운을 품은 영약이야.”
나무 안쪽에서 피어나 나무의 생명력과 영기를 빨아먹으며 자란 영약이다.
“난 하나면 돼. 두 개는 너 먹어라.”
“이, 이걸 내가 먹어도 되는 거야?! 이걸 발견한 건 너잖아!”
“우린 형제야. 그리고 네가 나보다 약하잖아. 네가 너무 약하면 내가 곤란해. 평생 내가 네 뒤치다꺼리 할 생각도 없고. 두 개 먹고 강해져라.”
“유진아…!”
성지곤이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 세계에서 영약은 보물 중의 보물이다. 영약 때문에 마을 하나가 전멸하는 일은 쉽게 벌어지고, 피를 나눈 자식에게조차 영약을 잘 주지 않는다.
“이런 건 가지고 있으면 일이 귀찮아질 수 있으니 바로바로 복용해야 해. 여기서 먹어.”
“여기서? 하지만 곧 휴식 시간이 끝날 텐데?”
“글쎄. 아마 2시간 정도는 여기에 있어야 할걸?”
“무슨 소리야?”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파란색 깃털을 가진 거대한 새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청광조(靑光鳥).
최소 삼정의 경지에 이르러야 상대할 수 있는 영물이다.
“저게 하늘에 떠 있으니 함부로 못 움직여. 가뜩이나 석지돈은 조심성이 많으니까.”
“청광조! 저 괴물이 우릴 공격하진 않는 거야?!”
“뭐하러. 청광조 입장에선 우린 굴러다니는 돌멩이 수준이야. 거슬리게 하지 않으면 지나치지. 빨리 목침화나 먹고 소화나 시켜.”
나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본래라면 원작의 주인공처럼 광명승천도를 이용해 목침화를 강화한 뒤 복용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광명승천도는 내 무기이자 갑옷인 스톰브레이커를 강화 중이다. 강화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만큼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원작 주인공보다 내가 더 강해. 그리고 영약은 나중에 또 얻을 수 있어.’
목침화를 잡아 입안에 욱여넣었다. 쓴맛이 느껴진다. 옆을 보니 성지곤이 긴장하며 목침화를 복용하고 있다.
‘그리고 내겐 천강성 시스템이 있지.’
영천기공을 이용해 목침화의 화기를 다스린다. 현실에서 할 때보다 영천기공의 효율이 좋았다.
이 세계가 무공에 특화된 세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천강성 시스템의 영향이거나. 개인적으로 후자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한참을 목침화의 기운을 흡수하던 나는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지는 걸 느꼈다.
『축하합니다! 출지(出志) 1단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보상으로 천옥(天玉) 30개와 지성단(智城丹)이 주어집니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몸에 활기가 넘쳐난다.
‘지금 내가 가진 천옥은 31개. VIP 1로 올라가려면 69개가 더 필요하군.’
『지성단(智城丹)
출지의 경지에 오를 때 도움을 주는 영약.』
이미 출지의 경지에 오른 내겐 도움이 1도 되지 않는 영약이었다.
‘이건 나중에 성지곤에게 넘겨주면 되겠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지곤은 아직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열심히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다.
‘성지곤. 이놈이 빨리 쓸만해 져야 더 일이 수월해질 텐데.’
성지곤은 출발하기 직전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환희로 가득했다.
“어때? 경지는 올랐어?”
“응! 이제 입식 8단으로 올랐어! 전부 네 덕분이야! 유진이 넌?”
“출지로 올랐어.”
“헉! 진짜?! 축하해! 와! 그 나이에 벌써 출지의 경지라니! 다른 사람들이 알면 놀라 까무러칠 거야!”
“당분간은 숨길 거야. 너도 입단속 잘해.”
“왜? 문파에 알리면 더 좋은 지원도 받을 수 있을 건데.”
“너무 뛰어나면 의심하고 질투하는 놈들이 있으니까.”
“하긴…. 알았어. 네 뜻대로 아무한테도 안 말할게.”
운송단은 다시 출발했다.
???
표사 중 한 명,
황비건이 일을 저질렀다.
휴식 시간 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석지돈에게 영탄 표사를 고발한 것이다.
“석 표두님! 그때 석 표두님의 이름을 적은 건 영탄 입니다! 영탄이 석 표두님의 이름을 적자고 저희를 선동했습니다!”
“황 표사의 말이 모두 맞습니다!”
장오국 표사가 황비건의 말을 옹호했다.
나는 바로 눈치챘다. 저 둘은 서로 짠 것이다.
“이, 이런 미친 것들이! 석 표두님! 저들이 망발을 내배고 있습니다! 서로 짜서 저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전 석 표두님의 이름을 적은 적 없습니다! 제 단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석지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표사 전원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들 중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는 분명히 있다. 어쩌면 전원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쿵!
황비건과 장오국이 바닥에 무릎 꿇었다.
“석 표두님! 저희의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 증인도 있습니다!”
“증인?”
“그때 종이에 이름을 적을 때…. 뒤에 있던 쟁자수 중 한 명이 영탄이 석 표두님의 이름을 적는 걸 보았습니다!”
“헛소리입니다! 모두 헛소리입니다! 석 표두님!”
“시끄럽다. 영탄. 경고하건대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것이다. 황비건이 말하는 증인은 앞으로 나와라.”
“저, 접니다!”
쟁자수 중 한 명이 긴장한 채로 앞으로 나갔다. 그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영탄 표사가 석 표두님의 이름을 종이에 적었습니다! 제,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위증이다.
황비건이 쟁자수를 회유한 게 확실하다. 두둑한 돈을 줬거나, 미래를 보장했겠지.
석지돈의 눈이 영탄에게 향했다.
“영탄. 증인까지 나왔다. 할 말 없나?”
영탄은 석지돈의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 모두 거짓말입니다! 저 미친것들이 석 표두님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럼 진짜 범인은 누구지?”
“황비건입니다! 황비건이 석 표두님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증거는?”
“증인이 있습니다! 쟁자수 중 한 명이 그 모습을 봤습니다!”
“허…. 너희들의 말은 서로 모순되는군. 너희들 전원이 내 이름을 적었다면 그때 고두막이 아니라 내가 죽었겠지. 하…. 그 증인이 누구지? 앞으로 나와라.”
그러나 쟁자수 중 누구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영탄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영탄도 쟁자수를 포섭한 것 같은데, 쟁자수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고 영탄을 배신한 것이다.
“노식! 뭐하냐! 왜 나오지 않는 거냐! 석 표두님! 저자, 저자가 증인입니다!”
“아, 아닙니다! 전 아무것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이 새끼가!!”
영탄이 노호를 터트렸다. 살기가 줄기차게 뿜어져 나온다.
석지돈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결론이 난 것 같군. 황비건, 장오국. 놈을 잡아라.”
“네!”
영탄은 검을 들고 발악했으나 동시에 덤벼드는 2명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석 표두님! 제가 아닙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석 표두님!!”
“넌 예전에도 거짓말을 해서 일을 벌인 적이 있지. 이제 네 말은 믿을 수 없다. 널 표사로 거둬들인 건 내 인생 최대의 오점이다. 이제 그 오점을 내 손으로 치우겠다.”
“아아아아악! 석지돈!!”
영탄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범인은 죽었다.
이번 일은 여기서 공식적으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석지돈과 표사들의 관계는 여전히 싸늘했다. 석지돈도 머리가 있으니 영탄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크크. 석지돈 병신 새끼. 나같으면 진즉에 다 죽였다. 그럼 그 중에 범인이 있을 테니까.’
저들의 관계는 이미 끝장났으니 원래대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