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8화 〉 598. 광명승천도
598. 광명승천도
이 세상에서 표객은 극한직업이라 할 수 있다.
주로 하는 일은 물건을 운송하거나 사람을 호위하는 일. 그게 꼭 산적이나 도적으로부터 지키는 것만이 아니다.
요괴.
어떻게 보면 표객 입장에서 가장 성가신 상대다. 산적이나 도적은 적어도 말은 통하니까. 요괴 중에서 말이 통하는 놈은 극소수다. 말을 알아듣는 요괴가 있어도 사람의 말을 일부러 듣지 않는다.
“토귀다! 땅을 주시해라!”
석지돈이 외쳤다.
토귀(土鬼).
땅속에서 움직이는 요괴다. 경지로 따지면 대충 입식 6단계의 요괴들이다. 땅속에서 움직이는 게 많이 성가시지만 강한 요괴는 아니다.
나는 검을 빼 들고 지면을 노려봤다. 땅속에서 토귀의 기척이 느껴진다. 내 근처에 있는 건 두 마리다.
“으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쟁자수 중 한 사람이 토귀에게 다리가 붙잡혔다. 토귀의 긴 팔이 그의 몸을 옥죈다. 옆에 있는 동료가 황급히 그를 돕기 시작했다. 토귀는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 도망쳤다. 다행히 쟁자수는 죽지 않았다.
‘온다.’
지면에 검을 박았다.
지상으로 올라오던 토귀의 머리에 검이 무자비하게 박혔다. 요괴여도 머리가 꿰뚫리니 바로 즉사했다.
출지의 경지에 이른 나는 토귀의 기척을 파악하며 쉽게 놈들을 죽일 수 있었다.
옆을 쳐다봤다.
성지곤도 토귀가 올라오는 타이밍에 맞춰 검을 휘둘러 어렵지 않게 사냥했다. 확실히 입식 8단이 되고부터 성지곤의 감각이 날카로워진 것 같다.
토귀의 습격이 끝나고 석지돈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죽은 자는 없군. 부상을 입은 자들은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표사들에게 보고해라. 그리고 마차의 짐이 무사한지 확인해라. 여유가 있는 자는 토귀의 심장을 꺼내라. 토귀의 심장은 뼈의 회복력을 높여주는 좋은 약재다.”
석지돈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는 요괴의 습격이 익숙해 보였다. 괜히 표두가 아니다.
나는 성지곤을 쳐다봤다. 성지곤은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성지곤이 이 전투가 제대로 된 실전이었다.
“야, 괜찮냐?”
“어? 응. 괜찮아. 다만 좀 아쉬워.”
“뭐가?”
“내가 지금껏 배운 무공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니까. 이번엔 무공도 뭣도 없이 검을 아래로 내려찍은 거에 불과해.”
“무공에 너무 집착 하지 마라. 죽일 수 있을 때 죽여.”
“어. 알았어.”
성지곤은 떨리는 손으로 마른 천을 쥐고 피가 묻은 검을 닦아 냈다.
???
요괴의 습격을 몇 번 받아넘긴 뒤에 산적과 마주쳤다.
총 100명이 넘는 산적들이 운송단을 포위한 것이다. 규모가 좀 있긴 했으나 석지돈은 담담했다.
겨우 산적이라고 깔보는 게 아니라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산적에게 얕보이면 그 순간부터 약탈만 당할 뿐이다.
“손님들의 행색이 영 초라하시군. 요괴들과 싸우셨나? 요즘 토귀가 극성인 시기지.”
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른 산적 두목이 껄껄 웃었다.
근육질의 커다란 체격이었다. 손에는 사람 따윈 한 번에 반으로 갈라버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칼을 쥐고 있다.
그의 실력이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지만, 느낌상 석지돈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해 보인다.
“나는 직가표국의 표두인 석지돈이오.”
“오영채(烏嶺砦)의 두목인 오손모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두목인 오손모를 제외하면 다른 산적들은 전부 어중이떠중이들이다. 그러나 100명이 넘는 숫자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저들 중 30명이상이 활을 들고 있다.
‘싸우면 이쪽이 전멸하겠군.’
내가 본 실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겠지.
“우리는 현재 시범 운송 중이오. 이곳이 오영채의 영역이란 걸 몰랐소. 통행료를 내드릴 테니 지나가게 해주시오.”
나중에 직가표국의 무력부대를 데려와 산적들을 쓸어버리더라도 지금 당장은 전투를 피하는 게 현명했다.
가능성은 있다. 산적들이 당장 공격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직가표국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군.”
“이번에 직가표국에서 활동 영역을 확대하기로 했소. 시범 운송을 하는 것도 길을 찾기 위함이오. 우리 직가표국은 녹림도들과 사생결단을 벌이는 일은 최후로 미루고 있소. 직가표국은 오영채와 공생할 수 있소.”
“크크. 사람은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이지. 내가 병신도 아니고 너희의 말을 믿을 것 같나?”
“싸울 것이오? 미리 말해두겠소. 우리 직가표국은 호락호락하지 않소. 갚을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갚는 곳이 직가표국이오.”
“…표국을 칭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갖췄겠지. 적으로 돌리는 것도 껄끄러우니 통행료만 받겠다. 한 사람당 은자 10냥. 13명이니 총 은자 130냥이군.”
“통행료 치곤 너무 많은 돈이오. 우리가 가진 돈은 그 정도는 아니오.”
“직가표국은 거지 집단인가?”
“직가표국을 모욕하지 마시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건 그쪽이오.”
공기가 차가워졌다. 산적들의 살기가 공기에 섞여서 표객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은자 10냥. 한화로 따지면 대충 그 가치가 100만 원이 넘는다. 통행료 치곤 지나치게 비싸긴 했다.
정색하던 오손모는 곧 일그러진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농담 한 번 해봤다.”
“……농담치곤 재미가 조금도 없었소.”
“그랬나? 난 재밌었다만. 통행료는 한 사람당 은자 1냥이다. 총 13냥. 내기 싫다면 지금 말해라. 알아서 가져갈 테니.”
산적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표객들도 무기를 들고 자세를 잡는다.
“누가 주지 않는다고 했소? 여기 13냥이오.”
석지돈이 돈을 꺼내 오손모에게 주었다. 오손모는 은자 13냥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적들이 무기를 내리고 히죽 웃었다.
“만족스러운 거래로군. 산을 이용해도 좋다.”
“감사하오.”
“다음에 또 보자. 크하하.”
오손모가 호통한 웃음을 터트리며 부하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사라졌다.
표객들은 산적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겨우 긴장을 풀었다. 다만 몇몇 쟁자수들의 얼굴은 불만스러웠다. 유성검문 출신의 무인들이었다.
“…후. 너희들의 얼굴을 보니 전투를 치르지 않은 게 불만스러운가 보군.”
“석 표두님! 겨우 산적들이었습니다! 싸웠다면 저희가 이겼을 겁니다!”
“멍청한 것. 산적을 무시하지 마라. 산적도 사람이다. 간사한 꾀를 낼 줄 안다. 산적이라고 무공을 익히지 못할 줄 아느냐? 당장 놈들의 두목이었던 오손모는 나와 비슷한 경지의 실력자다.”
“……!!”
“그리고 보지 않았나. 산적들은 활로 무장했다. 너희의 실력으로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완벽히 막아내거나 피할 수 있나?”
“…….”
“충고해두지. 자신을 너무 과신하지 마라. 무공은 너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석지돈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를 확인했다. 13냥.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여라. 산적들이 언제 마음을 바꿔 기습해올지 모른다.”
운송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6시간 뒤, 저녁 시간에 다시 산적들과 마주쳤다.
낮에 보았던 오영채의 산적들이었다.
“크하하! 다시 보니 반갑구만!”
오영채의 두목 오손모가 커다랗게 웃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벼락을 떨궈버리고 싶으나, 여기서 내 힘을 대놓고 드러낼 순 없다.
“……오손모. 이게 무슨 짓이오? 우리는 낮에 통행료를 지불했소.”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낮의 거기랑 저녁의 여기는 다른 곳이지. 물론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역이긴 하다만, 통행료는 따로 계산해야지. 긴말하지 않겠다. 한 사람당 은자 1냥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녹림의 도리는 어디로 간 것이오?”
“크하하하! 네놈이 알고 있는 녹림의 도리가 뭔지 모르겠군! 내가 알기론 산적인 내가 행하는 것이 녹림의 도리다! 우리의 도리에 따르지 않겠다면 검을 뽑아라! 고슴도치로 만들어주지!”
활을 든 산적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석지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검을 뽑는 대신 주머니를 열었다.
“……13냥이오.”
“받았다. 이 길을 지나는 걸 허락해주지. 얘들아! 돌아가자!”
“예! 두목!”
오영채 산적들이 떠났다.
석지돈을 비롯해 표객들의 얼굴을 밝지 못했다.
석지돈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명령을 내렸다.
“가자. 조금 더 움직이다가 적당한 곳에서 야영한다. 힘들어도 움직여라. 내일이나 모레쯤에 파양시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간단히 밥을 먹고 출발하려고 할 때, 오영채의 산적들이 또 찾아왔다.
“크하하하하! 잠은 잘 잤나? 산의 정기가 좋았을 테니 잠도 잘 왔을 테지!”
“왜 또 온 것이오?!”
“통행료를 받으러 왔다.”
“통행료라면 어제 냈소! 어제 낸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소!”
“어제의 통행료와 오늘의 통행료는 다른 법이다!”
“순 억지를 부리는군!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시오?!”
“왜 덤비기라도 하시려고? 좋지. 덤비려면 덤벼봐라. 너희들을 죽이고 속옷까지 전부 약탈해주지!”
“……큭.”
돈보다 목숨이 더 귀하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석지돈은 주머니에서 13냥을 꺼냈다.
“잠깐. 한 사람당 2냥이다.”
“왜 갑자기 가격이 두 배로 뛴 것이오?!”
“어제와 오늘은 다르기 때문이다. 통행료를 내기 싫다면 검을 뽑아라.”
“……돈이 부족하오. 내가 지금 가진 건 17냥이 전부요.”
“다른 놈들이 차고 있는 주머니는 주머니가 아닌가 보군? 그게 아니면 내 눈이 병신이라 천 쪼가리를 주머니로 보고 있는 건가?”
석지돈은 몸을 돌려 표사들을 쳐다봤다.
“……너희들이 돈 좀 써야겠다. 돈은 표국에 돌아가면 바로 갚아주마.”
“다, 당연히 석 표두님을 도와야죠.”
“여기 있습니다!”
표사들은 바로 주머니를 열었다. 석지돈과의 관계도 있고, 코앞에 산적들이 두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버틸 수는 없었다.
“24냥…. 2냥이 부족하오.”
“자꾸 얼타지마라. 저기 졸개들도 있잖나.”
오손모가 쟁자수들을 가리켰다. 굴욕을 느낀 석지돈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쟁자수들에게 다가와 돈을 빌려 갔다.
“……26냥이요.”
“크하하하! 역시 돈이 최고군!”
산적들이 떠났다.
그러나 정오 무렵이 되어서 다시 오영채의 산적들이 우리를 포위했다.
“4번째 만남이군. 이러다 정들겠어.”
“…대체 우리에게 왜 그러는 것이오?”
“우리 녹림은 손님을 홀대하지 않는다.”
“개소리를….”
“한 사람당 2냥이다. 죽기 싫다면 내놔라.”
쟁자수들이 가진 돈을 거뒀다. 은자 10냥도 되지 않았다.
“돈이 없소. 이게 전부요.”
“마차에 실은 물건이 있지 않나. 말도 돈이 될 테고…. 너희들이 걸친 옷과 무기도 돈이 되지.”
“…이것들은 돈과 다르오. 운송품을 넘길 수 없소. 비록 시험 운송이라곤 하나 직가표국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오. 산적들에게 굴복해 운송품을 넘겼다는 말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누가 직가표국에 물건을 맡기겠소.”
“그럼 무기와 옷을 넘겨라.”
“옷이 없으면 밤이 되면 얼어 죽을 것이고, 무기가 없으면 요괴들에게 죽을 테지. 이래저래 죽을 바에야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낫소. 우리는 이래 보여도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무인들이오. 저들은 유성검문 출신이지. 우리가 전멸하더라도 그대들의 절반은 저승으로 함께 데려갈 것이오.”
오손모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곧 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이토록 저항할 줄이야. 어쩔 수 없지. 돈이 없으면 몸으로 갚아야 하는 법. 따라와라. 너희들에게 맞는 일을 시켜주마. 따라오지 않겠다면 전투를 벌이겠다.”
석지돈은 입을 꾹 다물고 고민했다. 약 10분이 넘게 고민했다.
우리를 사방에서 포위한 산적들이 두 눈을 번뜩인다.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거지? 대답해라.”
“……알겠소. 뜻대로 하겠소.”
“크하하하! 잘 생각했다! 따라와라! 우리 산채를 보여주지!”
산채에 끌려간 우리는 강도 높은 노동을 해야 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하거나, 나무를 패며 장작을 만들었다. 무거운 통나무를 옮기며 목책을 만들고, 산채 내에 있는 바위를 들고 날라야 했다.
저들의 의도는 뻔했다.
우리의 체력을 최대한 빼놓는 것. 그리고 한밤중에 우리를 습격해 죄다 죽이려는 것일 테지.
자신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계책이다.
운송단은 저녁까지 일하고 난 뒤에야 산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저들이 실수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산채를 우리에게 보여줬던 것이다.
오영채의 산채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산적들의 가족들이다. 그중에는 꽤 반반한 얼굴의 미인이 있었다. 물론 성지곤 취향의 늙은 여자도 있었다.
나와 성지곤은 여자들을 보고 잔뜩 흥분했다. 지난 며칠 동안 여자의 뒤꽁무니조차 보지 못했다. 강제 금욕의 영향은 컸다. 우리들의 불알은 빵빵하게 부푼 상태였다.
늦음 밤.
우리는 막사에서 몰래 빠져 나와 인피면구를 썼다.
“준비됐어, 진?”
“아아…. 물론이지, 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