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2화 〉 602. 광명승천도
602. 광명승천도
“포션은 원래 3개였지만 이젠 2개뿐입니다. 예전에 기연을 통해 얻은 것이지요.”
“아현신가에 2개 모두 주십시오. 그 대가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팔라는 것도 아니라 달라고 한다.
‘힘이 있으니 오만해질 수 있는 거지. 여기선 일단 내가 숙여야겠군.’
나는 품에서 최고급 포션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신공세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설마하니 내가 선뜻 포션을 꺼내줄 몰랐을 것이다.
“제가 선뜻 건네주는 것에 놀라신 모양입니다.”
“…예. 선뜻 주실 물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준비해온 설득할 말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군요.”
“공짜로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서 포션을 끝까지 내주지 않으면 놈은 수작 부릴 것이 분명했다. 영약의 가치는 사람의 목숨보다 더 위에 있으니까.
‘놈이 거래를 할 생각이 있을 때 거래하는 편이 더 이득이야. 놈과 싸우기엔 나와 성지곤의 힘이 약해.’
신공세가 포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투명한 병에 담긴 분홍색 액체를 지긋이 보고는 내게 물었다.
“효과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군요. 효과는 알고 있습니다만, 들었던 말들이 워낙 비현실적이라서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군요.”
“손에 약간 상처를 내고 한 방울 정도 떨어뜨려 보십시오.”
신공세가 오른손 손가락을 세웠다. 손톱끝에 검기가 맺힌다. 그는 손톱으로 왼손을 긁었다. 피부가 찢어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나온다. 그는 이어서 포션 한 방울을 상처 부위에 떨어뜨렸다.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금창약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군요! 무인들에겐 절초 이상의 약이 될 것입니다!”
“포션은 외상에는 효과가 좋지만, 내상에는 큰 효과가 없습니다.”
“그것만으로 좋습니다. 무인의 경우 대부분 내상이 아니라 외상에 의해 죽으니까요. 음. 근데. 이거 참…. 이런 보물을 어떻게 값을 매겨야 할지 애매하군요.”
“저희에게 적당한 영약과 속성측계를 원합니다.”
아현신가 정도면 급이 낮은 영약 정도는 쉽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영약이라…. 의외로군요. 유성검문에서는 영약을 지원해주시지 않는 겁니까?”
“저희의 자질도 지원받을 정도로 좋은 편이 아닙니다. 그리고 최근에 유성검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서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란 당연히 내가 비약원의 영약을 싹 다 훔친 일을 말하는 것이다.
“깊게 묻지 않겠습니다. 영약과 속성측계는 내일 드리겠습니다. 포션은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저흰 내일 후단시로 떠납니다. 이대로라면 거래는 못 할 것 같군요.”
“하하. 방법이 있습니다. 석지돈을 파양시에 묶어 두면 수송단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죠.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두 분은 내일까지 기다려주십시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죠. 제가 여러분을 부르겠습니다.”
몇 마디를 더 나눈 뒤에 신공세가 일어났다. 그는 포션을 챙기고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성지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아. 괜찮아?”
“뭐가?”
“포션을 뺏긴 거나 다름없잖아. 저 사람이 내일 온다는 보장도 없고…. 차라리 도중에 도망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도망쳐도 붙잡혔을 거야. 저놈은 석지돈 보다 강해. 아마 오기(五氣)의 경지에 올랐겠지.”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우리가 도망갈 데가 어딨어. 유성검문도 안전하지 않아. 차라리 거래를 하는 편이 더 낫지.”
“우리에게 뭔가 시킬 게 있던 것 같은데…. 사냥개 꼴이 되는 거 아니야?”
“오. 너도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구나. 맞아. 우릴 사냥개처럼 쓰고 마지막엔 삶아 먹으려 하겠지.”
“그럼 도망가야지!”
“괜찮아. 나중에 도망쳐도 늦지 않아. 받을 건 받아야지.”
신공세. 놈에게 힘이 있다면, 내겐 원작의 정보가 있다.
이후에 우리는 방으로 돌아가서 쉬다가 인피면구를 쓰고 파양시 곳곳에 강간하러 다녔다.
그리고 이건 며칠 후의 이야기인데. 나와 성지곤에게 별호가 붙었다.
이과색마(二?色魔).
여자를 범할 때마다 옷을 벗고 입기 귀찮아서 알몸에 도포 한 장만 걸치고 돌아다녔다니 붙여진 별호였다.
‘별 웃기지도 않는 별호군.’
???
다음 날 아침.
석지돈은 심각한 표정으로 표객들에게 말했다.
“알아볼 일이 생겼다. 출발은 내일로 미룬다.”
정말로 출발일이 미뤄졌다.
‘알아볼 일이라…. 신공세가 일부러 아현신가의 흔적을 드러냈나 보군.’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일정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직가표국과 아현신가는 현재 적대하고 있는 관계였으니까.
그리고 오후. 우리는 수상쩍은 남자에게 안내받아 어느 저택에 들어갔다. 정원까지 딸린 대저택이었다.
신공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제 약속한 대로 영약과 속성층계를 가져왔습니다.”
그가 탁자 위를 가리켰다.
영기를 품은 약초 8뿌리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죄다 저급 영약이었다. 저 정도라면 생으로 복용하는 것보다 연단술을 이용해 영단을 만드는 편이 더 낫다.
‘연단술에 대한 책은 갖고 있지만, 직접 하는 것과는 별개지. 일단 영약은 챙겨두고….’
약초 옆에 있는 목판 쪽으로 옮겼다. 팔괘도가 그려진 나무판자 2개. 이게 바로 사용하면 자신이 가진 속성을 알 수 있는 속성측계다. 일회용이라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가져오셨군요.”
“저희 아현신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킵니다. 직가표국과 달리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죠.”
“속성측계는 바로 여기서 사용해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옆에 제가 있어도 되겠습니까? 속성측계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원래는 자리를 피해주는 게 예의다. 속성이 적에게 알려지면 약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신공세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옆에 있으려고 할 것이다.
‘어차피 여기저기 사람을 심어뒀겠지. 그리고 속성은 절대적인 게 아니야.’
나는 속성측계 하나를 들었다.
“유진 소협. 속성측계는 아래에서 위로 받치듯이 들어야 합니다. 중심에 그려진 팔괘가 잘 보일 수 있도록. 아, 고개는 똑바로 드십시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입니까?”
“네. 그대로 내기를 속성측계에 흘려보내십시오.”
나는 그의 말대로 기를 흘러 넣었다.
파직.
속성측계의 중심에서 작은 번갯불이 번쩍였다.
직후, 시퍼런 뇌전 줄기 수십 개가 동시에 나타나 꿈틀거렸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속성측계가 금이 가고 부서진다.
“오! 유진 소협은 뇌기를 타고 나셨군요!”
“……네. 다른 속성에 대한 건 전혀 없군요.”
타고난 속성을 재능으로 보기도 했다.
달리 말해서 나는 다른 속성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었다.
‘뇌기도 뇌전 특성 때문이겠지. 뇌전이 없었다면 난 아마 아무 속성도 없었을 거야.’
괜히 씁쓸해진다. 조금 정도는 다른 속성을 어느 정도 타고나지 않았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대단한 겁니다. 뇌기는 흔하지 않고, 어중간하게 여러 속성을 가진 것보다 하나의 속성을 타고나는 게 더 낫습니다. 속성에 맞는 수련법으로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약점도 확실하지만요.”
신공세는 쓴웃음을 지을뿐 내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뇌기의 약점은 토기(土氣)다. 상대가 토기를 타고나고, 토기를 이용하는 무공이나 술법을 사용하면 내 뇌전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
“성지곤. 너도 해 봐.”
“그, 그래.”
성지곤이 긴장한 채로 속성측계를 들었다.
“…속성을 하나도 타고나지 못하면 어쩌지?”
“괜찮습니다. 지곤 소협. 속성을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후천적으로 속성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영약이나, 특수한 심법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설령 어떠한 속성도 타고나지 못했더라도 무공은 익힐 수 있습니다.”
“그래도 속성은 타고나는 게 좋잖아요.”
“그렇긴 하죠. 지곤 소협. 일단 해보십시오.”
“네.”
성지곤이 양손으로 속성측계를 떠받듯이 들고 내기를 움직였다. 속성측계의 반응이 나보다 늦었다. 내가 기를 다루는 실력이 성지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성지곤의 속성측계가 반응했다.
나무판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마치 출렁이는 흙처럼 변하더니 흙으로 된 작은 언덕들이 만들어졌다.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속성측계 전체가 황금빛으로 빛나더니 그 중심에 불꽃이 화르륵 생겨났다. 이윽고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속성측계가 부서졌다.
“…….”
성지곤은 멍한 눈으로 부서진 속성측계를 쳐다봤다.
“축하합니다. 지곤 소협. 소협은 세 개의 속성을 타고나셨군요. 가장 먼저 일어난 반응이 더 타고난 속성입니다. 소협의 경운 토(土)가 가장 뛰어나고 그다음은 금(金), 다음은 화(火)입니다.”
“세 속성이나 타고나다니! 좋은 거죠?”
“속성을 타고났다는 것부터가 기재라는 증거입니다. 보통 평범한 사람은 어떤 속성도 타고나지 못합니다. 경지가 낮을 때는 한 가지 속성이 타고났을 때가 제일 좋다고 합니다만, 경지가 높아질수록 타고난 속성이 많을수록 이득이 됩니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 법이다.
어쨌든 성지곤의 경우 토기를 타고났다는 것을 알았다.
‘토기라…. 성지곤은 운이 좋군. 얼마 뒤에 토기의 무공이 손에 들어올 텐데.’
참고로 유성검문의 무공은 속성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무속성 무공이다.
???
우리는 분위기를 환기한 뒤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았다.
“유진 소협과 지곤 소헙은 나강문에 대해 아십니까?”
“150년 전 파양시에 존재했던 술법 문파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이 일대를 지배하던 뛰어난 문파였습니다. 술법뿐만이 아니라 무공도 익히던 문파였죠.”
“나강문은 문파내의 문제로 사라진 거로 압니다만.”
“그렇죠. 허나 나강문의 술법은 이 파양시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은밀한 소문이 하나 돌았습니다. 나강문주가 후계를 위해 나강문의 법기(法器)를 파양시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는 소문이.”
“법기라면…….”
“특별한 힘을 가진 물건을 말하지요. 웬만한 문파에는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유성검문의 문주도 법기를 하나 가지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설마 저희보고 그 법기를 찾으라는 말입니까?”
“예. 하지만 법기를 찾는 건 부가적인 임무입니다. 여러분이 해주셔야 할 건 직가표국의 감시입니다. 현재 나강문주의 법기를 노리고 있는 세력은 총 세 곳입니다. 아현신가, 직가표국, 남지문(南智門). 남지문에는 이미 조치를 해두었습니다. 여러분은 직가표국만 감시해주시고 적절히 방해해주시면 됩니다.”
“저희는 곧 후단시로 돌아갑니다. 직가표국에서는 다른 사람이 올 겁니다.”
“직가표국에서 유성검문에 접촉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유성검문을 앞세워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서한을 유성검문주께 전해주십시오. 그럼 여러분은 직가표국과 함께 다시 파양시에 오게 될 것입니다.”
신공세가 내게 서한을 내밀었다.
“내용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진실이 담겨 있을 뿐이지요. 도중에 읽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유성검문주께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군요.”
“열어 볼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서한을 품 안에 넣었다. 신공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진다.
“신공세 님.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입니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면 들어드리죠.”
“서한 한 장만 더 적어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원하는 내용으로.”
“흥미롭군요. 어떤 내용입니까?”
“그건…….”
그에게 내가 원하는 내용을 말했다.
신공세는 내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없군요. 꼭 필요합니까?”
“예. 꼭 필요합니다. 무리한 부탁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적어드리겠습니다.”
신공세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서한을 적기 시작했다. 성지곤은 서한의 내용을 보고 감탄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봤다. 저 서한을 어디에 쓸지 대충 감을 잡은 모양이다.
“유진 소협, 지곤 소협.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돌아가는 길에는 산적과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요.”
???
며칠 뒤 시범 수송단은 후단시의 유성검문으로 돌아왔다.
나는 성지곤과 함께 유성검문주에게 신공세에게 받은 서한을 건넸다. 유성검문주는 서한을 보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일단 돌아가서 대기하거라. 이후에 너희들을 따로 부르겠다.”
장로들이 소집되었고 문주 회의가 이어졌다.
서한의 내용은 뻔했다.
직가표국의 목적과 파양시에 일을 적어 적나라하게 적어 놓았겠지. 문주인 성고단이 화가 나도록.
‘유성검문의 멸문도 얼마 남지 않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