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6화 〉 616. 생존의 무인도
616. 생존의 무인도
“자만하지 마. 이제 겨우 열흘이 지났을 뿐이야. 앞으로가 문제야.”
한하린의 말이 맞았다. 이제 겨우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우린 아직 던전의 절반도 공략하지 못한 것이다.
생존 20일이 되던 날 또 변화가 일어났다.
<생존하기>
<남은 시간 동안 생존하십시오.“
무인도에 폭풍우가 몰려왔다.
비바람과 함께 파도가 높이 치솟았다. 그 높이가 어찌나 높은지 해변가에 가까이 갈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먹구름도 같이 몰려왔다는 거지. 하늘을 가득 채우는 먹구름…. 뇌전을 사용하는 내겐 유리한 상황이지. 저 먹구름을 이용해 벼락을 마음껏 떨어뜨릴 수 있으니.’
대낮부터 몬스터가 나왔다.
크래커와 엘리자드라는 몬스터다.
엘리자드는 도마뱀을 닮은 몬스터였다. 기본적으로 4족 보행을 하지만 날개가 있어서 날아다닐 수 있다. 그리고 입에서 화염이나 얼음덩어리를 내뿜는다. 달리 별명으로 작은 드래곤이라고도 불리는 몬스터다.
‘그래봤자 C급 몬스터지. 작은 드래곤이란 별명이 아까운 놈들이야.’
크래커 쪽이 상대하기 더 어려웠다.
“성유진! 하늘이야! 하늘에서 엘리자드 3마리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어!”
“네. 저도 봤어요. 제가 처리할게요. 이 날씨에 감히 하늘을 날아오더니 겁도 없군요.”
뇌전을 사용했다.
먹구름에서 하얀빛이 번뜩거리더니, 이쪽으로 날아오는 엘리자드 3마리를 향해 벼락이 떨어졌다. 엘리자드 놈들이 아래로 추락한다. 허나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확인 사살을 하듯 다시 벼락을 놈들에게 떨어뜨렸다.
콰르르릉쾅!
무인도를 가득 채우는 천둥소리는 날 들뜨게 만든다.
“하린 선배. 마석을 회수하기엔 좀 많이 멀어요.”
“지금 상황에서 마석 하나, 하나에 집착할 리가 없잖아!”
“하린 선배도 보면 돈 욕심이 없다니까.”
“시끄럽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생각해 봐!”
“생각하고 자시고 우리 목적은 생존이잖아요. 그리고 저놈들은 우리의 생존을 방해하는 것들이고.”
“네 말대로 생존이 우선이란 걸 잊지 마.”
“그러니 놈들을 없애야죠. 놈들은 무인도에 계속 나타나고 있어요.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없애지 않으면… 나중에 이 섬 전체에 몬스터가 바글바글 거릴 지도 몰라요.”
“……네 말도 일리가 있어. 하, 보통 생존은 전투를 최대한 피하는 편이 이득인데….”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도 하잖아요.”
나는 몬스터를 발견하면 곧바로 먹구름에서 벼락을 떨어뜨렸다. 한하린도 마찬가지로 몬스터를 보자마자 능력을 사용했다. 우리는 능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원거리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해나갔다.
그리고 생존 28일째.
생존 33일까지 5일을 남겨두고 우리는 잔뜩 지쳤다. 몬스터를 죽이고 죽여도 계속해서 나타났다. 이틀 전부터는 바다에서 이족 보행 하는 물고기 몬스터까지 나타나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수면도 취하지 못했다. 번갈아 가면서 호위를 서며 쪽잠을 청했지만, 하루 고작 2~3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전부 전투를 벌였다.
“아오, 젠장. 이러다가 놈들에게 당하는 것보다 먼저 지쳐서 쓰러질 것 같아요. 하린 선배는 괜찮아요?”
“…괜찮아.”
그럴 리가 있나. 그녀는 나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두 눈은 퀭했고 입술은 파리했다. 휴식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다.
“하린 선배. 이대로는 안 돼요.”
“다른 방법은 없잖아. 무인도에서 도망칠 곳은 없어. 우리가 머물던 동굴은 들킨 지 오래고, 바다로 도망가는 건 자살 행위야. 5일. 5일만 버티면 돼.”
“그 5일을 버티기 힘들 것 같으니 그러죠.”
“하아. 성유진. 쓸데없는 말은 기력만 잡을 먹을 뿐이야. 네게 다른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잖… 아…?”
한하린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진다. 나는 서둘러 다가가 그녀의 몸을 쓰러지지 않게 붙잡았다.
“선배는 한계에요. 아까부터 중력 조작이 불안정한 것도 알고 있죠?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어요.”
“……휴식을 취할 곳이 없잖아. 지금 이 무인도에서 안전한 곳은 없어.”
“아뇨 한 곳 있어요. 우리가 들어가지 않은 딱 한 곳.”
“거긴….”
이 섬에는 두 개의 동굴이 있었다.
하나는 얼마 전까지 우리가 사용하던 얕은 동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끝이 모를 정도로 깊은 동굴이었다.
깊은 동굴은 탐색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보통 그런 곳에는 보스 몬스터가 존재한다. 괜히 동굴 속에 들어갔다가 잠들어 있는 보스 몬스터를 깨워 일이 곤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던전이 제시한 목적은 33일간의 생존이지 보스 몬스터의 죽음이 아니었으니까.
‘보스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사냥하더라도 던전이 공략될 일은 없으니까. 괜히 힘만 뺄 뿐이지.’
내 부축을 뿌리치려는 한하린을 강제로 안아 들었다. 한하린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뺨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거기가 꺼림칙한 곳이란 건 저도 알아요. 보스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없을 수도 있어요. 지금으로선 그 동굴이 우리의 희망이에요.”
“알았어. 네 의견에 따를게. 그러니 일단 날 내려줘. 잠깐 피곤해서 균형이 흔들린 거지 못 걸을 정도는 아니야.”
“하린 선배. 제가 힘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고 계시죠? 제겐 하린 선배는 깃털이나 다름없으니 가만히 계세요.”
나는 한하린을 안아 들고 동굴로 뛰었다. 도중에 몬스터를 만나면 벼락을 떨어뜨려 죽였다.
동굴 입구에서 동굴의 안을 들여다봤다. 어두웠다.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무턱대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뇌전을 동굴 속으로 쏘았다. 동굴의 안이 잠깐 밝아졌다. 그러나 전부를 밝히진 못했다. 내 예상보다 동굴이 훨씬 더 깊었다.
‘뇌전을 3번이나 쏘아내고 5분을 기다렸는데 아무 반응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동굴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건가?’
너무 조용해서 꺼림칙했다.
뒤를 돌아봤다.
50마리가 넘는 엘리자들이 폭풍우 치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우리를 찾고 있었다. 무인도를 돌아다니는 크래커의 숫자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대로 있다간 진짜 위험해.’
나는 인벤토리에서 랜턴을 꺼내 한하린에게 주었다.
“하린 선배. 그거 들고 있어요.”
“날 내려줘. 나도 걸을 수 있어.”
“싫은데요.”
“…….”
여전히 그녀를 안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5분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무언가가 나왔다.
“하린 선배. 저거 석문이죠? 제 눈이 이상한거 아니죠?”
“내 눈에도 석문으로 보여.”
돌로 만들어진 육중한 석문이었다. 석문은 옆으로 열려있었다. 그 표면에는 100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요? 여기 무인도에서 인공적인 건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문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더 있겠어? 여길 막고 있던 거겠지. 그것보다 나는 저 문에 적혀 있는 100 이란 숫자가 더 신경 쓰여.”
“함정도 없고 몬스터도 없고…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도 탐사하는 건대.”
솔직하게 말하자면 섹스에 빠져 있던 나날들이라 탐사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긴장 풀지 마. 안쪽에 함정이나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열려있는 석문 너머로 들어갔다.
따뜻했다.
석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따뜻함을 느꼈다. 한하린 또한 나와 마찬가지인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네요.”
일주일 넘게 비바람을 견디며 몬스터와 싸운 몸이 따뜻함을 반겼다. 내 발걸음이 느릿해진다. 그냥 여기서 한숨 자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저 멀리서 들리는 몬스터의 괴성이 내 등을 떠민다.
두 번째 석문이 나왔다.
이번 석문 역시 열려 있었고, 표면에는 200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석문 안으로 들어갔다.
졸졸졸.
옆에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냇물을 힐끔거리며 걸어갔다.
“하린 선배. 목말라요? 저거 먹을 수 있는 담수 같아요.”
“괜찮아. 네가 준 생수 쪽이 훨씬 안전해.”
세 번째 석문이 나왔다.
표면에 300이란 숫자가 적혀 있고 석문은 열려 있었다.
석문 너머로 열매가 맺혀 있는 과일나무가 보였다.
“하린 선배 여긴 꼭….”
“이곳에서 살라고 만들어 놓은 듯한 공간이야. 마치 쉘터처럼.”
“뭔가 억울하네요.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진즉에 오는 건데.”
“왔다고 하더라도 석문을 여는 조건이 있었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석문이 존재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 조건이란 것도 석문에 적혀 있는 숫자와 관련 있는 걸까요?”
“그렇겠지.”
“하린 선배는 조건이 뭔지 짐작하고 있어요?”
“아마 이 석문들은 정해진 수만큼 몬스터를 죽여야 열리는 구조일 거야.”
“그거라면 말이 되네요. 저흰 이 던전에 오고 나서부터 꾸준히 몬스터를 죽였으니까요. 아마 천 마리 이상 죽였을 테죠. 돌아가서 얻은 마석들을 처분하면 못해도 수십억은 벌겠죠.”
“내려줘.”
“갑자기요?”
“나를 안고 갈 거면 제대로 해. 은근슬쩍 엉덩이랑 가슴 만지지 말고.”
“아. 들켰네.”
나는 실실 웃으며 동굴의 더욱 안쪽으로 걸어갔다.
네 번째 석문 안에는 아예 사람이 쉬라고 하는 듯 오두막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두막 안은 깨끗했다. 침대나 테이블 같은 가구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한하린이 머물기엔 부족한 곳이다.
“여기서 쉴까요?”
“아니. 다섯 번째 석문을 보러 가자.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다섯 번째 석문도 발견했다. 표면에는 500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고, 마찬가지로 열려 있었다.
석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나쳐온 곳들과 달랐다. 오래된 벽화들이 가득 채우고 있는 곳이었다.
나와 그녀는 정면의 벽화를 보고 굳어졌다.
벽화에 그려져 있는 건 검은 나무와 새하얀 인간. 아니,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한 다른 생물.
”저거 파이론이죠?“
”…….“
파이론.
중국에서 만난 최악의 몬스터. 검은 나무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순식간에 A등급까지 강해지며 사람과 의사소통까지 할 수 있는 몬스터다. 헌터 중 누군가는 파이론을 인간과 비슷한 다른 종족이라고 말하지만, 내게는 몬스터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한하린은 내 품 안에서 내려와 바닥에 섰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벽화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도 벽화를 둘러봤다. 제법 지워진 부분도 있었기에 정확히 뭘 말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다만 내 시선을 끄는 벽화가 하나 있었다.
커다란 붉은 나무.
수많은 파이론들이 숭배하듯 커다란 붉은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붉은 나무의 뿌리는 매우 복잡하고 구체의 형태라 마치 태양같이 보였다.
‘뭐, 이 벽화를 해석하는 건 협회와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이지.’
???
생존 33일째. 마지막 날.
나와 한하린은 알몸인 상태로 벽화가 그려진 방안에 앉아 있었다. 내 왼손은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고,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석문 너머로 몬스터들이 보였다.
30일째 되는 날에 몬스터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세 번째 석문 앞까지 들어오더니 하루가 지나자 네 번째 석문 앞까지 모였고, 오늘이 되자 다섯 번째 석문 바로 앞에 우글우글 모여들었다.
그러나 전혀 두렵지 않았다. 저것들은 다섯 번째 석문을 넘지 못하니까.
<33일 생존 완료.>
<생존을 축하드립니다.>
<보상으로 생존의 돌을 드립니다.>
나와 한하린의 앞에 돌멩이가 하나씩 나타났다.
‘생존의 돌? 그거?’
생존의 돌이라면 들어본 적 있다. 이 돌을 사용하면 3초 동안 어떤 피해도 받지 않는 상태가 된다.
효과는 뛰어나다. 그러나 일회용이고 개인에게만 통하며 유지 시간도 짧아서 세기의 보물 같은 엄청난 물건은 아니었다. 시세는 대충 150억 정도로 알고 있다.
‘게임으로 치자면 3초 무적 아이템이지. 3초가 지나면 예외 없이 피해를 받으니 잘 사용해야 하지.’
이윽고 우리 앞에 포탈이 열렸다.
”하린 선배. 여유는 어느 정도 있는데 조금 더 여기서 놀다 갈까요?“
한하린이 눈썹을 찡그리며 나를 흘겨봤다.
”여긴 지긋지긋해. 돌아가자.“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보지에서 내 정액이 미끈한 다리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으로 보지를 닦은 뒤 옷을 입었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옷을 입고 그녀를 따라 포탈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