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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5 - 625. 신의 아틀란티스 (405/2,000)

〈 625화 〉 625. 신의 아틀란티스

625. 신의 아틀란티스

세이라와 함께 검의 무덤을 나왔다.

그녀는 도복 차림에서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움직이기 쉽도록 몸에 달라붙으면서도 고상함이 느껴지는 옷. 기사들이 자주 입는 예복과 흡사하게 생긴 옷이었다.

함께 움직이니 자연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한 번 말문이 트여서 그런지 그녀와 함께하는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졌다.

“아르피스 공녀께선 대검을 사용하셨군요?”

그것도 그냥 대검이 아니었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츠바이 헨더다.

“검의 무덤의 단점은 연습용 검의 형태가 롱소드도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지.”

“결투 때 많이 불편하셨겠습니다.”

“내겐 검도 익숙하다. 검의 길이는 약간의 차이일 뿐이다.”

남들 입장에선 그 약간의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차이다.

세이라는 다른 평범한 귀족 영애들과 다르게 수련, 무술, 기사 등의 주제로 말을 걸어야 했다.

“공녀님께선 언제부터 검을 손에 드셨습니까?”

“음…. 기억나지 않는군.”

세이라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양손은 아름다운 외모와 다르게 거칠었다.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오래된 흉터도 보였다.

나로서는 좀 아쉽다. 기왕이면 손도 매끈했으면 좋았을 테니까.

그리고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세이라의 가문의 힘이라면 마법이나 아이템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손을 관리하는 건 쉬울 테니까.

“정확히 언제부터 검을 들었다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군. 그저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검을 들었다는 걸 기억한다. 경은 어떻지?”

“저는 검을 잡은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현실 기준으로 검을 든 지 4년도 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목검을 들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진검을 들었다. 특성인 영천류가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검술의 기초도 떼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 경은 추방자였지. 이해한다.”

세이라가 손을 내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공녀님. 손의 흉터는 왜 지우시지 않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굳은살이 형성되며 검을 잡기에 최적인 손의 형태가 되었다. 라는 변명을 하기에는 그녀의 경지가 높았다. 세이라의 경지가 되면 굳은살의 유무는 아무 상관 없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수련에 대한 증거다. 내 손을 볼 때마다 내가 해온 수련들이 떠오르고, 마음가짐을 되잡을 수 있다. 그리고 손을 볼 때마다 깨닫게 되지. 내가 걸어가는 길이 무엇인지.”

“…대단하십니다. 아르피스 공녀님.”

“그저 고집이다.”

나는 세이라와 대화하면서 의도적으로 엘레나의 이름을 꺼냈다. 세이라는 엘레나에게 어느 정도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으니 그녀를 자극하기에 딱 좋았다.

“엘레나의 도움을 받은 일이 여러 가지로 많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레기온도 엘레나의 후원을 받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레기온을 후원하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 그보다 호칭이 조금 거슬리는군.”

“호칭 말입니까? 어느 부분이 거슬리는지 말씀해주신다면 시정하겠습니다.”

“경은 그 마녀를 이름으로 부르는데, 날 부를 땐 성으로 부르는군.”

“아르피스 공녀님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발데르트 공작은 함부로 대해도 되고? 날 부를 때도 이름으로 불러라.”

“…공녀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세이라 공녀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래.”

호칭 문제는 내심 바라던 바였다. 호칭이 가까워지면 관계도 가까워지니까.

그때였다. 세이라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고개가 위로 올라간다. 나도 멈춰서서 그녀의 시선을 따랐다.

하늘에 비둘기 한 마리가 아르피스 영지 방향으로 힘차게 날아가고 있었다.

“세이라 공녀님. 이 주위에 야생 비둘기도 있습니까?”

“저건 비둘기가 아니라 마법이다. 경도 알다시피 이 주위는 공간 이동 주문서나, 통신 마법이 먹히지 않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물리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이 발달했다. 저 마법 전서구가 대표적이지.”

공간 이동 주문서를 쓰려면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야 했다.

“혹시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모르겠군. 단순한 보고일 수도 있고, 사건이 터졌을 수도 있다.”

“서둘러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다. 도시에는 아버지가 있으니까. 그리고 경과 내가 빠르게 가봤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맞는 말이었다.

이곳은 아르피스 공작의 영역. 외부인인 내가 사사건건 간섭할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똑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아르피스 도시에 도착했다.

???

세이라와 함께 내성으로 들어갔다.

기사와 병사, 하인과 시민들은 세이라는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겉모습이 아름다운 미인이고, 성격도 깐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기사와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로 들어갔다.

드디어 우검공(愚劍公), 노이트 아르피스 공작을 만났다.

그는 화려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앉아 있음에도 그의 몸이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자리에서 일어선다면 키가 2M는 가뿐히 넘을 것이다. 또한 근육으로 단련된 탄탄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세이라와 똑같은 애쉬그레이의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남자였다. 눈가에 있는 주름은 부드럽다. 공작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자유분방한 용병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긴다.

나는 노이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노이트를 비롯해 가신과 기사, 시종 등 온갖 사람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발데르트의 기사인 성유진입니다.”

“환영한다. 발데르트의 기사. 검의 무덤을 통과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그리고… 용케도 내 딸을 데려왔군. 3개월 만인가? 변함없어 보이는구나. 세이라.”

노이트는 씨익 웃으며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반면에 세이라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아버지도 여전하시군요.”

“딸아. 수련도 좋지만, 세상 또한 둘러 보거라. 나는 내 딸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검사에게 있어 중요한 건 끊임없는 수련입니다. 아버지가 했던 말인데 벌써 잊으셨습니까?”

“후우.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는군.”

노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성유진 경. 내게 전할 것이 있을 거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품에서 서한을 꺼냈다. 기사 하나가 서한을 확인하고는 노이트에게 공손히 건넸다.

노이트는 조용히 서한을 펼쳐 내용을 읽었다. 그의 표정 변화는 없었다. 눈동자도 처음 봤을 때와 같이 진중했다.

“경은 이 서한의 내용을 알고 있나?”

“모릅니다.”

몰라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제국의 십년제와 관련된 이야기로 엘레나가 그에게 협력을 바라는 내용일 것이다.

“서한의 답신은 경을 통해 보내라는군. 경은 발데르트 공작의 신뢰를 받는 모양이군.”

“기사로서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한의 내용은 지금 바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주제가 아니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기다려줄 수 있겠나?”

“답신을 받는 것도 제 임무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들어라.”

그가 말했다. 노이트를 향해 모든 가신과 기사, 시종들의 정신이 집중된다.

“성유진 경은 내 장난에 어울려 검의 무덤을 통과했고, 세이라까지 데려와 주었다. 그를 귀빈으로서 극진히 대접하도록. 경은 물러가도 좋다.”

축객령이었다.

나는 노이트에게 예를 표하고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

알현실을 나선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도중부터 노이트의 기세가 나를 압박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몰라도 그가 보통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게 느꼈다.

‘제국오공. 그 위명이 거짓일 리가 없지.’

싸우면 내가 100% 진다.

???

노이트는 세이라를 쳐다봤다.

그는 성유진이 세이라를 데리고 올 줄 몰랐다. 그를 검의 무덤에 보낸 건 세이라를 자극하기 위해서였으나, 세이라를 데리고 오리라곤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검의 무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네가 그와 함께 돌아왔는데 그 말을 믿으라고?”

“…….”

세이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노이트는 그녀의 입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역효과만 난다는 것을 아비로서 잘 알고 있었다.

“됐다. 깊게 묻지 않으마. 어차피 그와 결투라도 했을 테지.”

세이라가 잠깐 움찔거린 걸 노이트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세이라. 네가 그 기사에게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몰라도. 그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뛰어난 기사가 아니다. 나는 네가 그 기사에게 흥미를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와 대화를 나눠봐서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 대체 그에게서 뭘 본 거냐?”

“…….”

세이라는 잠깐 두 눈을 감았다. 성유진과 싸웠던 결투가 떠오른다.

그건 목숨을 건 결투가 아니라 대련에 가까운 결투였다. 그러나 그는 그 결투에 목숨을 걸었다. 까딱 잘못하면 내상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검의 무덤에선 회복 속도가 빨라지지만, 그 안에서 죽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정식 기사가 아닙니다.”

“…호오. 그건 좀 뜻밖의 말이군. 그런데?”

“그가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혹시 반하기라도 했느냐?”

“…….”

딸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노이트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네가 그의 무엇을 보았는지 몰라도, 그의 행적은 결코 기사라 불릴만한 행적이 아니다.”

노이트는 시종을 불러 성유진에 대한 자료를 가져오라 명했다. 그는 자료를 세이라에게 건넸다.

“얼마 전에 그는 에스토르 남작을 죽였다. 남작의 병사와 기사를 무참히 죽이고 떠났지.”

“에스토르 남작은 그를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고용했군요. 조금 파격적이긴 하지만 죽을 만 했습니다.”

“조금 파격적? 발데르트 공작가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쫓기고 있었을 거다.”

“아버지가 그의 상황이었다면 에스토르 남작을 살려뒀을 겁니까?”

“날 죽이려 한 놈을 왜 살려둬야 하지? 세이라. 나와 그는 다르다.”

“네. 다릅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군요.”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군데군데 빠진 곳이 있다. 아마도 발데르트 공작이 조작했겠지. 결론을 내리자면 그는 발데르트의 사냥개다.”

사냥개.

공식적으로 알릴 수 없는, 더러운 일을 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거라. 그를 아르피스의 기사로 삼으려는 이유의 절반 이상은 발데르트 공작 때문이겠지?”

“그 마녀의 아래에 있기엔 그가 너무 아깝습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으마. 단, 이 일과 관련하여 널 도와줄 생각은 없다. 사람을 얻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직접 겪어 보거라.”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충고하나 하자면 그가 여자를 밝힌다는 소문이 있다. 네가 미인계를 펼치면 바로 넘어오지 않겠느냐?”

“……”

세이라는 노이트를 찌릿 노려보고는 말없이 방을 나섰다.

???

나는 아르피스 공작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음식도 맛있었고, 하인들도 내 눈치를 보며 설설 기었다.

그러나 만족스럽진 못했다. 아르피스 공작가의 눈치를 보느라 여자를 품에 안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녀를 덮쳤다간 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도시 내에 있는 창관을 찾아가는 것도 힘들다. 세이라 때문이다. 지금 나를 향한 세이라의 호감도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여기서 내가 창관에 간다? 그녀의 호감도를 깎아 먹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충 일주일 정도 머물러야 할 것 같으니…. 세이라와 최대한 친해져야지.’

나는 세이라를 찾아 움직였다. 시종들에게 물으니 그녀가 있는 곳을 바로 대답했다. 지하 수련장. 그녀는 본가에 있을 때 거의 매일 지하 수련장에 처박히는 모양이다.

시종을 통해 그녀의 양해를 구하고 수련장에 들어섰다.

검은색 도복을 입은 그녀가 츠바이헨더를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다.

“경도 수련하고 싶다고?”

“세이라 공녀님과 함께 수련하고 싶습니다. 세이라 공녀님에겐 배울 것이 많으니까요. 싫으시다면 당장 물러나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경과 함께하는 수련은 나쁘지 않으니까. 다만, 대련이나 결투는 할 수 없다. 여긴 검의 무덤이 아니니 저번 같은 일이 일어나면 곤란하다.”

“하하. 그건 그렇죠. 그런데….”

나는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쳐다봤다. 물과 하얀 가루가 올려져 있었다.

“저 가루는 무엇입니까? 설마 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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