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1화 〉 631. 신의 아틀란티스
631. 신의 아틀란티스
내 허벅지에 누워 있던 세이라가 두 눈을 끔뻑이더니,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맙소사! 예트 슬러그 퀸이 한 마리가 아니라고…?!”
세이라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공감했다.
예트 슬러그 퀸이 한 마리가 아니라면 어제 있었던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대급으로 많은 예트 슬러그들.
‘예트 슬러그를 낳는 예트 슬러그 퀸이 두 마리면 전부 말귀가 맞아떨어져.’
세이라가 다급해졌다. 그녀가 여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임무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세이라. 우선 진정해.”
벽에 세워둔 대검을 들고 뛰쳐나가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예트 슬러그 퀸이 살아 있다는 건 도시는 지금도 예트 슬러그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예트 슬러그 퀸을 찾아내 제거해야 한다.”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그 몸으로 밖으로 나갈 거야?”
“…….”
세이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세이라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옷이 없었다. 어제 예트 슬러그 퀸에게 당해 대검을 제외하고 전부 녹아버렸으니까.
“이 산에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알몸으로 다니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내가 급했다는 걸 인정하지.”
세이라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자신의 몸을 가렸다. 젖가슴과 보지를 가린 것이다. 그래봤자 가슴은 너무 커서 전부 가려지지도 않았다. 유륜이 삐져나왔다. 그나마 보지는 손바닥으로 가려졌지만.
“우린 이렇고 저렇고 다 한 사이잖아. 지금 와서 겨우 알몸을 내보이는 정도로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어?”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만졌다. 내가 남긴 키스 자국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세이라는 내 손길이 간지럽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는 말했다.
“경. 그것과 이건 다르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그러려니 했다.
나는 이대로 밖에 나가도 상관없었지만, 그녀가 몹시 신경 쓰는 듯하니 내 코트를 그녀에게 주었다.
알몸에 코트를 걸친 그녀는 묘한 색기를 흘렸다. 나와 키와 비슷했기에 코트의 길이도 허벅지의 절반까지만 내려왔다.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와 다리가 전부 보이는 것이다.
‘커다란 엉덩이와 가슴 때문에 음란한 굴곡이 보이는군.’
특히 가슴이 너무 커서 코트 앞자락을 여미지 못했다. 새하얀 가슴 계곡을 훤히 드러내고 아슬아슬하게 젖꼭지 부분만 가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분홍색 유륜이 삐져나온 걸 볼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코트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괜히 더 꼴렸다.
힐끔.
코트를 입은 세이라는 잠깐 내 눈치를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곤 대검을 들었다.
“경은 언제까지 거길 세우고 있을 거지?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해라.”
“난 이 상태로도 상관없지만…. 뭐. 세이라를 생각해서 입기로 할까.”
옷을 입고 검을 허리에 찼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재촉해서 최대한 빠르게 입었다.
“경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뭔데?”
“예트 도시에 신호를 보내 우리가 무사하다는 걸 알리고 싶다. 생각보다 일이 길어지고 있다. 그들이 나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기사들을 보내거나, 아버지가 직접 나설 가능성도 있다.”
“지원군은 나쁘지 않지만 지금 그 모습을 보이는 건 위험하겠네. 신호는 번개를 말하는 거겠지?”
“가능하겠나?”
“마나가 좀 많이 소모되긴 하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벼락을 글자 형태로 떨어뜨리면 도시에 상황을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을 거야. 너무 긴 문장은 안 되고.”
“우리가 무사하다는 걸 알리면 된다.”
밖으로 나간 우리는 도시가 보이는 위치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번개를 떨어뜨려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성벽에 있는 병사들은 전부 보았을 것이다.
“만족해?”
“잘해주었다. 이걸로 기사와 병사들도 어느 정도 안심하겠지.”
“난 이걸로 마나의 8할 이상을 썼어.”
“경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에 경이 나설 필요도 없다. 내 몸 상태는 이전과 달리 정상이다. 예트 슬러그 정도는 혼자서 처리할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건 말뿐인 감사 인사가 아니야.”
“……뭘 원하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잡고 가까이 다가갔다.
“미리 말해두지만, 섹스는 안 된다. 예트 슬러그 퀸은 시급히 처리해야 한다.”
“알아. 그냥 키스만 하는 거야. 키스만.”
“으읍….”
입을 맞추었다.
내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엉덩이와 가슴 쪽으로 향했다.
???
그 후로 몇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동굴을 발견했다. 큼지막한 동굴이었는데 커다란 바위를 통해 그 입구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근처를 지나지 않았다면 발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와 세이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동굴은 어딘가 인위적이었기 때문이다.
“세이라. 원래 여기에 동굴이 있었어?”
“글쎄. 이런 동굴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다.”
세이라는 성큼성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예트 슬러그는 어둡고 습기 가득한 곳을 좋아한다. 예트 슬러그 퀸도 예외는 아니기에 동굴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스으으윽.
예트 슬러그 특유의 소리가 났다. 내가 칼을 뽑기도 전에 세이라의 대검이 예트 슬러그의 몸을 썰어댔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예트 슬러그가 더 많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세이라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계단과 문이 나왔다.
“세이라.”
“……그래. 이건 누가 보더라도 인위적이다. 누군가 이곳의 동굴을 개조했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내부에서 빛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안에서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예트 슬러그의 기척마저도.
“아무도 없는 거 아니야?”
“그런 것 치곤 지나치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기척이나 소리를 숨기는 결계 때문이겠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감히 허락받지도 않고 아르피스 구역에, 그것도 예트 산에 자리를 잡다니…. 아르피스 가의 후계자로서 용서할 수 없다.”
화가 난 듯한 세이라가 문을 난폭하게 밀어 열었다.
문 너머의 광경은 꽤 충격적이었다. 수십 개의 투명한 배양관이 있었다. 배양관 안에는 작은 예트 슬러그들이 갇혀서 꿈틀대고 있다.
한쪽에는 탁자가 있었다. 알 수 없는 기구들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누군가 예트 슬러그를 가지고 실험했나 보군. 무슨 실험인지는 몰라도…. 세이라?”
세이라는 방에 들어오고부터 조용했다. 그녀가 말수가 적은 편이긴 해도 이 정도까지 조용하니 이상했다. 세이라는 안쪽에 있는 배양관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배양관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예트 슬러그 퀸…?!”
약 30cm 정도의 새끼 예트 슬러그 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확실해졌군. 누군가 여기서 예트 슬러그 퀸을 인공적으로 배양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세이라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예트 슬러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한 가지다.
예트 가루.
예트 가루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면 철광산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예트 가루는 이미 그 효과가 입증되었으니까.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벌이는군.”
세이라에게서 살기가 느껴졌다. 그녀가 대검을 한 손으로 들고 횡으로 휘둘렀다. 검기가 주위에 있는 배양관을 박살 내며 예트 슬러그들을 죽인다. 요란한 소음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렸다.
“경. 이곳의 주인을 찾아야 한다. 흔적을 찾을 수 있겠나? 지금 당장 추적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
“일단 주위를 한 번 뒤져봐야지. 여러 가지 물건이 있는 것 같으니 단서가 될 만 한 것도 있을 거야.”
끼이이이이익.
우리가 배양관에 눈이 팔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왔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이었다. 노인의 손에는 마치 살아 있는 촉수를 만들어 엮은 듯한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소란스럽더니 의외의 손님들이 오셨구만.”
노인의 시선은 나를 무시하고 세이라에게만 향했다.
“네가 이곳의 주인인가?”
“맞다. 내가 이 공방의 주인이지. 아르피스의 괴물 대신 그 딸이 왔군. 그 괴물이 왔다면 자리를 피했겠지만… 운이 좋구만.”
노인은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칼을 뽑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정체를 밝혀라.”
“나는 텔마스. 흑마법사다. 그런데… 내가 공방에 박혀 있는 사이, 바깥의 문화가 바뀌기라도 했나? 공녀가 아니라 창녀의 꼴을 하고 있군.”
세이라는 텔마스의 말을 무시했다. 뒤로 물러서지도, 몸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저 적의를 담아 텔마스를 노려봤다.
“흑마법사. 네가 감히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그리 당당히 나오는 것이냐?”
텔마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양팔을 벌렸다.
“물론 알고 있다. 예트 슬러그를 인공적으로 배양하는 일이지. 그리고 나는 목적을 이루었다. 예트 슬러그 퀸을 성공적으로 배양했고, 그 예트 슬러그 퀸이 예트 슬러그를 낳고 통솔하는 것도 확인했다. 너희 아르피스 가문이 예트 가루를 독점하는 나날은 끝났다. 이 나의, 텔마스의 업적이지!”
“이 정도의 일을 흑마법사 혼자서 벌일 수 없다. 말해라. 네 뒤에 누가 있지? 누가 널 지원한 거냐.”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군. 그래. 지원을 받았다. 정확하게는 그놈들에게 의뢰를 받은 거지.”
“그게 누구냐.”
“그거야 당연히… 알려 줄 수 없다. 위험한 계약을 해서 말이야.”
“반드시 그 입에서 정보를 끄집어 내주지.”
“크크크.”
텔마스가 낮게 웃었다.
“공녀여. 너는 날 보자마자 검을 휘둘러 목을 베야 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나와 대화한 것은 너의 실수다. 그 실수를 뼈저리게 통감하라.”
세이라가 대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텔마스의 지팡이가 바닥을 찍었다.
쿵!
지팡이로부터 시커먼 어둠이 나와 세이라를 덮친다.
세이라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멍청한 것. 이것은 저주의 어둠이다. 너희는 저주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아르피스의 공녀여. 너의 시체는 내가 잘 사용해주마. 넌 좋은 제물이 될 것이다.”
나는 다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세이라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세이라!”
내가 놀라서 대답했다. 너무 무모해 보였기 때문이다.
“괜찮다.”
세이라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어둠이 그녀를 덮쳤다. 허나, 직후 그녀의 몸에서 따뜻한 주황빛이 흘러나와 어둠을 물리쳤다.
“뭐, 뭐냐. 그건…!”
“나는 따뜻한 화로의 여주인과 계약했다. 어떠한 저주도 내게 해를 끼칠 수 없다. 너는 차라리 평범한 마법을 사용해야 했다.”
“이런 빌어먹을!”
텔마스는 도망치기 위해 허겁지겁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나 너무 늦은 판단이었다. 세이라가 대검을 휘둘렀고, 그의 두 다리와 지팡이가 베어진다.
“끄아아아악!”
“시끄럽다. 고작 이 정도로 비명을 지르지 마라. 이보다 더한 고통이 널 기다리고 있으니.”
세이라가 바닥에 쓰러진 텔마스에게 다가갔다. 기절시킬 생각으로 보였다.
나는 옆에서 텔마스를 보다가 서둘러 뇌전을 일으켰다. 놈은 고통스럽다는 듯 비명을 지르면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세이라의 시야에선 놈의 등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세이라 그놈은 수작을 부리고 있어!”
“뭐?”
“멍청한 것들. 늦었… 크으으으으으!”
뇌전이 텔마스의 몸에 떨어졌다. 파지지직. 시퍼런 뇌전이 텔마스의 몸에 흐른다. 감전당한 놈은 마법진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즉사했다.
마지막 마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 했던 것보다 별 볼 일 없는 놈이었다.
‘아니지. 세이라에게 상성이 너무 좋았나? 설마 저주 면역이라니.’
세이라는 텔마스의 시체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세이라. 내가 괜히 나섰지?”
“아니다. 경에겐 감사하고 있다. 놈은 내게 저주가 통하지 않는 걸 알고 다른 위험한 마법을 준비했겠지. 흑마법사와 싸우는 건 처음이라 너무 방심했군.”
“그래도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나는 흑마법사에게 다가갔다. 온갖 약품들이 뒤섞인 역겨운 냄새가 났다. 로브를 벗기고 얼굴을 확인한다. 대부분의 머리카락이 빠져있고, 얼굴 곳곳에 검버섯이 피어 있는 노인이었다.
“본 적 있어?”
“아니. 모르겠다.”
놈의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마석과 예트 가루를 제외하면 특별한 건 없었다. 나는 노인의 옷을 벗겼다. 토가 쏠릴 정도로 역겨웠지만, 단서를 찾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세이라는 텔마스의 등에 그려진 문신을 보고 놀란 듯 눈을 치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