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4화 〉 634. 신의 아틀란티스
634. 신의 아틀란티스
엘레나에게 답서를 전해주고 임무를 끝낸 나는 에이플랜 레기온의 성으로 돌아갔다.
성에 들어서자마자 꼬마와 마주쳤다. 겉모습은 대충 5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꼬마였다. 짧은 파란색 머리와 파란색 눈동자가 특징적이다. 꼬마는 신기하게도 허공에 두둥실 떠 있었다.
비야.
에이플랜 레기온 마스터이자, 원작 주인공인 강명진에게 항상 붙어 다니던 청룡이다. 이제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줄도 알았다.
“그르르르르.”
비야는 나를 보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본능인지 뭔지 몰라도 비야는 예전부터 나를 적대시 했다.
‘이 녀석…. 나중에 제법 뛰어난 미인이 되겠군.’
그 나중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비야는 청룡이다. 인간과 동일하게 봐선 안 된다.
보통이라면 비야를 무시하고 지나쳐 강명진을 찾아 움직이겠지만, 지금은 비야에게 약간 흥미가 생겼다.
“비야. 넌 왜 날 그렇게 싫어하는 거냐?”
“몰라서 물어? 너한테서 좋지 않은 기운이 나오고 있잖아! 소름 끼쳐! 들어오지 말고 밖으로 나가!”
“좋지 않은 기운이라.”
천마신공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 내 상태창은 천마가 아니라 뇌절사다. 천마의 기운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면 기운이란 건 핑계고 그냥 본능적으로 날 싫어하는 건가?’
비야의 머리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비야는 깜짝 놀라더니 위로 도망갔다.
쿵!
“악!”
너무 높이 올라가 천장과 머리가 부딪쳤다. 멍청한 청룡이었다.
“강명진이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냐?”
“몰라!”
눈물을 글썽인 청룡은 그대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청룡을 지나쳤다. 나중을 생각하면 최대한 가까워지는 게 맞다. 그러나 저렇게 날 싫어하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억지로 친해지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다.
나는 강명진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강명진은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현재 에이플랜 레기온이 지배하는 구역은 총 4개. 인구수도 조금씩이지만 천천히 늘어나고 있으니 관리가 필요하다. 강명진이 하는 일은 영주가 하는 일과 비슷했다.
“갔다 왔나? 수고했다.”
“별거 아니었어. 환상공에게서 십년제 이야기는 들었다며?”
“얼마 전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가 십년제에 참석하는 건 의외이긴 했지만, 우리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럴 거라 생각했었다.
강명진은 원작에서도 십년제에 참석했다. 강명진의 에이플랜 레기온을 세상에 알리는 데뷔 무대가 되는 곳이 십년제였다.
그리고 나는 강명진이 십년제 무엇을 노리는지도 알고 있었다.
“십년제의 어디에 참가할 건데? 무도회?”
“무도회는 너와 나만 참가한다. 적당히 괜찮은 턱시도를 준비해둬.”
무도회는 참가하고 싶다고 해서 쉽게 참가할 수 없었다. 제국의 귀족들과 그 귀족들이 보증하는 이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함부로 평민이나 추방자를 보증하지 않는다. 엘레나가 아니었다면 나나 강명진이나 무도회 입구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건?”
십년제는 십년에 한 번 있는 대축제. 즐길 거리는 무도회만 있는 게 아니다. 평민들 입장에선 무도회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십년제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건 무도회다.
“나는 몬스터 사냥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몬스터 사냥 대회는 관중들 앞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대회다. 강명진이 노리는 건 3등 상품인 ‘인어의 눈물’이겠지. 인어의 눈물을 사용하면 비야를 좀 더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축제 기간 동안 각자 알아서 즐기기로 했다.”
“그래?”
“예정보다 귀환이 늦었군. 아르피스 공작가에 사고가 있었나?”
“특별한 일은 아니고 예트 슬러그가 많아졌어. 세이라 공녀를 도와 며칠 동안 예트 슬러그 퀸을 찾기 위해 예트 산을 들쑤시고 다녔지.”
“그게 전부인가?”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집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건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예트산에서 흑마법사를 만났어.”
“골치 아픈 놈들을 만났군. 네가 지금 내 앞에 무사히 있다는 건 그 흑마법사는 죽었다는 거겠지.”
“맞아. 겉바속촉으로 만들어줬지. 그 흑마법사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예트 슬러그 퀸을 인공적으로 배양하고 있었어. 심지어 성공했더라.”
“의뢰자의 목적은 예트가루였겠군. 의뢰자가 누구지?”
“로하드 케이스. 바클레이 레기온 연합의 간부야.”
“……!!”
“그 로하드라는 놈이 개인적으로 움직였을 리는 없을 거야. 예트 가루의 가치를 생각하면 십중팔구 바클레이 레기온 연합 전체의 뜻이겠지.”
“네 말이 맞다. 이번 일은 침묵하는 게 좋겠군.”
바클레이 레기온을 섣불리 건들었다간 에이플랜 레기온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이다. 그 사실을 강명진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내 보고는 이게 끝이야. 다른 일정은?”
“없다. 휴식을 취하면서 십년제를 준비해라.”
“준비라… 턱시도 말고 무슨 준비가 필요하려나.”
“나는 무도회에서 출 댄스를 연습하고 있다. 괜찮은 선생을 구했지. 같이 연습하지 않겠나? 무도회에서 춤을 못 췄다간 귀족들의 비웃음을 살 거다.”
“괜찮아. 사교댄스 정도는 출 수 있어. 너보다 잘 출걸?”
“…네가? 믿기 힘들군.”
나는 보란 듯이 그의 앞에서 사교댄스를 췄다. 어느 세계든 사교댄스는 비슷했다.
화려하게 밟는 스텝을 본 그는 제법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 지구에 있을 때 배웠나?”
“뭐, 비슷하지.”
[백환] 세계의 난 귀족이다. 그리고 내 댄스 스승은 유리아다. 완벽하지 않을 리가 없다.
“후우. 넌 편하게 휴식을 취하면 되겠군.”
“휴식 취하러 간다. 수고해.”
나는 강명진의 부러운 눈길을 뒤로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내 목적지는 유서희와 주서현이었다. 에이플랜 레기온에 돌아왔으니 당연히 내 좆집들부터 점검해야지.
???
며칠 뒤, 나는 에이플랜 레기온의 유일한 엘프이자, 깐깐하기로 소문난 릴스네와 함께 레기온 근처에 있는 도시로 나왔다.
릴스네는 금발에 녹색 눈동자, 슬림한 몸매를 가진 전형적인 엘프다.
그녀를 꼬셔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약속대로 유진 씨의 턱시도를 고르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대가로 제 옷도 사주셔야 합니다. 가장 비싼 옷을 고를 텐데 괜찮으시겠죠?”
릴스네는 수전노였다. 공짜를 광적일 정도로 좋아했다. 돈만 어느 정도 있으면 그녀를 꾀어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안 괜찮으면?”
“지금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농담이야. 농담.”
나는 흑심 따윈 전혀 없다는 듯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굳이 저일 필요가 있습니까? 레기온 내에 당신과 친하게 지내던 여성들이 있을 텐데요.”
“유서희의 패션 센스는 너도 잘 알잖아. 야한 옷만 잔뜩 고를걸. 그리고 주서현은 패션 센스 자체가 없어. 난 엘프의 미적 감각을 믿고 있어.”
“납득했습니다. 엘프의 미적 감각은 뛰어나기로 유명하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전 한 번 일을 맡으면 확실하게 하니 걱정 마십시오.”
릴스네가 자신있께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 미덥지 못했다. 그녀는 항상 활동하기 편한 가죽옷을 입고 있으니까. 패션에 어울리는 멋진 차림은 결코 아니었다.
“우선 배부터 채울까?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하니.”
“아니요. 원래 목적대로 옷가게로 가죠. 시간은 항상 아껴야 합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싼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네 의견이 그렇다면야… 그냥 굶지 뭐.”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유진 씨의 성의는 무시할 수 없죠. 점심은 먹고 움직이죠.”
“그러자.”
나는 지난 시간 동안 릴스네에 대해 조사했고, 그녀의 남자 취향을 확실히 파악했다. 그녀는 돈 많은 남자가 취향이다. 그건 그녀의 출신과 관련 있었다. 그녀의 출신 ‘EG 741’ 지구는 무력이나 권력보다 재력을 가장 최고로 치는 세계다.
돈 때문에 몸을 팔 정도의 여자는 아니지만, 그녀에게 재력을 과시하다 보면 마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멋진 스테이크입니다. 냄새부터가 남다릅니다.”
“5만 페니짜리 스테이크니, 돈값은 하겠지.”
“헉. 스, 스테이크 하나에 5만 페니…?! 제,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제대로 들었어. 고기도 최고급 중의 최고급이고, 여기 요리사가 황실 요리사 출신이라더라.”
“이, 이럴 수가….”
5만 페니.
무려 50만짜리 스테이크다.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팍 주고 조심히, 아주 조심히 스테이크를 썰었다.
나는 대충 썰어서 입안에 스테이크를 넣었다.
‘맛있네.’
「최상의 스테이크를 섭취합니다. 한 시간 동안 힘과 체력이 2씩 상승합니다.」
음식을 받고 버프까지 생길 정도였다. 이곳의 주방장은 요리와 관련된 스킬을 가진 모양이다.
“흐윽… 흑….”
릴스네는 눈물을 흘리면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그렇게 맛있어?”
“네. 너무 맛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입니다. 그리고… 제 입에 들어 있는 스테이크 한 조각의 가격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라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이 스테이크 소스는 얼마일까요. 흑….”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스테이크를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 미친년 같았다.
그녀는 디저트를 먹을 때도 눈물을 흘렸다.
“이 한입 크기의 아이스크림이 2만 페니짜리 디저트라니…!”
“마나 능력치를 올려주잖아. 이 정도면 싼 편이지. 그리고 맛있기도 맛있고.”
“한 시간 뒤에 사라지는 능력치입니다! 1만 페니의 가치가 있을까요?!”
“능력치 1개의 차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너도 알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흑.”
식사가 끝났다. 나는 여운에 잠겨 있는 릴스네를 데리고 옷가게로 향했다. 시내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비싼 옷가게였다.
“어서 오세요. 어떤 옷을 찾으시나요?”
마담이 나와 우리를 반겼다. 3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제법 아름답다. 릴스네를 공략하는 중만 아니었다면 한 번 꼬셔보려고 시도해봤을지도 모른다.
“나는 턱시도. 내 옆의 여인에게는 드레스.”
“십년제 때문이군요. 잘 찾아오셨어요. 여러분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찾아드릴게요.”
마담이 우리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확 풍기는 곳이었다. 옷도 하나, 하나 잘 정리되어 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릴스네는 고급스런 분위기에 압도된 듯 굳었다.
나는 옆에 있는 드레스를 보았다. 마네킹에게 입혀져 있는 붉은 드레스였다. 금색 실로 새겨진 자수 하나, 하나가 고급스러웠다.
“마담. 이 드레스는 얼마입니까?”
“1,500만 페니예요.”
“……!!”
릴스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한화로 따지면 거의 1억 5천만 원이니까.
“가격대가 너무 비싼가요?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비교적 싼 드레스들이 있어요.”
“아뇨. 적당하군요.”
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릴스네의 경악스러운 눈길이 내게 향한다.
허세가 아니다. 지난번에 엘레나 밑에서 일하면서 챙길 건 전부 챙겼다. 귀족들에게 뇌물도 있는 힘껏 받았다. 1,500만 페니? 그 열 배의 가격이라 하더라도 문제없었다.
“그래도 그 드레스는 여인분께 잘 어울리지 않을 거예요. 제가 봤을 때 여인분은 좀 더 산뜻한 느낌의 색깔과 청초한 디자인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동감입니다. 제 턱시도부터 고르고 싶군요.”
“네. 저쪽 방으로 가시죠. 준비해둔 턱시도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드시는 게 없으시면 주문 제작도 가능하니 실망하지 말아 주세요.”
마담을 따라 움직였다. 많은 턱시도가 있었다. 비슷비슷하면서도 색깔이나 분위기 등이 조금씩 달랐다.
나는 팔꿈치로 릴스네의 팔을 툭툭 건들었다.
“도와주기로 했잖아. 어느 쪽이 좋은 것 같아?”
“그, 그게….”
참고로 턱시도 한 벌의 가격은 모두 최소 천만 페니가 넘었다.
릴스네는 당황하며 주위를 오가다가 한 턱시도를 가리켰다.
“이 턱시도가 유진 씨에게 어울릴 것 같아요!”
짙은 남색의 턱시도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나도 마음에 들어. 이젠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인가? 마담. 그녀에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추천해줄 수 있나?”
“물론이죠. 저희 가게에는 엘프 아가씨를 위해 준비된 드레스들이 아주 많답니다.”
“아,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이런 건 너무 부담스럽고….”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수 없잖아. 너도 계약을 어기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지 않아?”
“그렇죠….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수 없죠….”
릴스네는 곤란해하면서도 녹색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