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3화 〉 643. 종갓집
643. 종갓집
2,227 포인트.
나는 고민하다가 꼭 지금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포인트를 쓰지 않고 모아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나중에 포인트가 급하게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급하게 랜덤 소환을 하게 될 때가 온다거나.
‘랜덤 소환 쿨타임도 끝났고…. 한 번 해볼까?’
미령 같은 꼴리는 여자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아니지. 위험한 놈이 나올 수 있으니 나중에 창작물 속에서 소환하자.’
이미 한 번 사용해봤으니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랜덤 뽑기는 못 참지.’
요새 랜덤 뽑기를 안 해서 욕구가 쌓였다.
나는 227 포인트를 모조리 랜덤 뽑기에 사용했다.
“가즈아아아!”
[엘릭서
모든 상처를 회복하고, 모든 상태이상에서 회복됩니다. 선천적인 장애와 질병 역시 모두 회복됩니다.
가격: 15,000 포인트
※주의
병에 담긴 엘릭서가 정량입니다. 정량을 한 번에 복용해야 제대로 효과를 발휘합니다.]
엘릭서가 떴다.
원래 한 병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일본에 있는 내 무녀 섹스돌에게 사용했다.
‘모든 상태이상 제거라….’
그건 저주도 포함일 것이다.
박수호가 떠오른다. 듣기로는 그의 여동생이 백택의 저주에 걸렸다지. 박수호가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이유가 여동생 때문이다. 백택의 저주 중화제의 가격이 제법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화제를 구입하지 않으면 그의 여동생은 죽는다.
‘박수호가 엘릭서에 대해 알면 어떻게든 구하려고 하겠군.’
박수호에게 엘릭서를 줄 생각은 없다. 설령 엘릭서를 주더라도 정당한 대가는 받을 것이다.
‘아직 150 포인트 남았다. 가즈아아아!’
[과거의 편린
1회에 한해 원하는 과거를 볼 수 있습니다.
가격: 1,300,000 포인트
※주의
원하는 과거가 실제로 일어난 장소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돋보기처럼 보였으나, 그 효과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죽은 자의 소생과 연계해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자의 소생의 조건 중 하나가, 소생시키려는 대상의 이름과 얼굴을 알아야 한다는 거지.’
유명한 위인이나 영웅을 소생시킨다고 하자. 이름은 문제없다. 유명했던 만큼 기록되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정확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면 죽은 자를 소생시킬 수 없다.
이 과거의 편린을 사용하면 죽은 자의 얼굴을 확인하여 소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랜덤 뽑기에서 대박이 터졌군. 나머지는 정령옥같은 자잘한 것들이 전부고….’
어쨌든 손해는 보지 않았다.
홧김에 2,000 포인트 전부를 랜덤 뽑기에 사용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이 행운이 끝까지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다.
???
영천검관에 찾아갔다.
굉장히 오랜만에 온 느낌이지만, 유희 세계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현실 시간으로 일주일의 절반 이상 찾아가는 곳이다. 영천검관 만큼 수련하기 딱 좋은 곳은 없었다.
“응? 유진아. 오랜만에 보네?”
현실에서 내 동정을 가져간 여자. 진세영을 만났다.
요즘은 영천검관에 와도 진세영을 만나기 힘들었다. 그녀는 A급 헌터가 되고 나서부터 부쩍 던전 공략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누나. 대련 한 판 어때?”
당연히 알몸으로 하는 대련이었다. 나는 그녀가 수락할 줄 알았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알몸으로 대련했고, 대련이 끝나면 섹스에 돌입했다. 그게 정해진 일정이었다.
허나 진세영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오늘은 대련할 시간이 없어.”
다른 남자라도 생겼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 좆맛을 한 번 본 이상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왔냐?”
영천검관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
왼쪽 눈에 안대를 찬 40대 남자. 건장한 체격은 구릿빛이고 눈동자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진세영의 아버지이자, 영천검관의 관장인 진우성이다. 그리고 그가 영천류의 11대 종주(宗主)다.
“관장님이 왜 여기에 있으세요?”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있으니 진세영의 태도도 이해가 갔다. 아버지가 있는데 알몸으로 나랑 대련할 수는 없지.
“내 집에 내가 있는 게 뭐.”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시더니.”
“내가 얼마나 바쁜지는 너도 알잖냐. 오늘만 해도 겨우 시간 낸 거다.”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옛날부터 매우 바쁘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절 기다린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습니까?”
“큰일은 아니고. 너도 이제 B급 헌터니 이번 기회에 영천류의 극기에 대해 알려주려고.”
내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영천류의 극기(極技). 다른 무공으로 따지면 오의나 비기같은 특별한 기술이다. 나는 그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수준이 낮아 배우지는 못했다.
“정말입니까? 전 못해도 A등급 헌터가 되어야 가르쳐줄 줄 알았는데….”
“원래라면 그랬지. 극기를 배우겠다고 무리하게 수련했다가 몸이 망가질 수 있으니까. 근데 넌 내 예상 이상의 천재다. A급 헌터도 조만간에 달성할지도 모르니, 지금 시간 날 때 알려주려고 한다.”
“기대 되는군요!”
“그래. 대충 일주일 정도 시간 되지? 다른 건 됐고 몸만 있으면 되니 지금 가자.”
“네? 가다니요? 영천검관에서 보여주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랬다간 영천검관이 박살 날 테고, 난 세영이에게 등쌀이 밀리겠지.”
그가 진세영을 쳐다봤다. 진세영은 팔짱을 낀 채로 웃고 있었다. 다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럼 어디로 갑니까?”
“전라도 어느 마을.”
“일주일이나 전라도 어느 마을에 있어야 한다고요?”
“수련이다. 수련. 원래는 못 해도 한 달은 해야 한다만…. 너라면 일주일이면 될 거다. 세영이가 널 도와주기도 할 거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씀하시면 좀 그렇습니다만….”
“너 반쯤 백수잖냐. 던전도 내킬 때 가는 놈이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다른 헌터와 다르게 길드에 속해있지 않은 나는 프리랜서에 가까웠다. 고급 던전을 공략하긴 힘들어도 낮은 등급의 던전은 자유롭게 공략할 수 있었다.
“후. 알겠습니다.”
진우성이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차 키였다.
“운전해라.”
???
운전대를 잡고 전라도 어느 마을로 내려갔다. 내비게이션도 있었고, 조수석에 앉은 진세영이 길을 안내해줬기에 헤매는 일은 없었다.
전라도 어느 마을.
그곳은 도시와 제법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이름은 진수못. 어느 시골들이 다 그렇듯 노인들이 많았다.
‘평범한 마을은 아닌 것 같은데.’
마을이 제법 컸다. 거기에 마을 내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한옥이었다. 한옥이 아닌 건물을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마을 사람들은 죄다 한복을 입고 있고….’
여기가 사극 드라마 촬영장 중 하나라 해도 믿을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저 집. 궁궐이라 해도 믿겠네.’
으리으리하게 큰 한옥이 마을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야 해.”
“어.”
도착한 곳은 마찬가지로 한옥이었다. 마을 중심에 있는 한옥에 비하면 그 절반의 절반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집이다. 집 앞에는 늙은 부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여긴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집이야. 저분들은 이 집을 관리해주시는 분들이고.”
“이 마을이 누나의 고향이야?”
“아니. 난 서울 태생이고, 여긴 아버지의 고향이야.”
백미러로 뒤를 봤다. 진우성은 이미 차에서 내려 노인들과 인사하고 있었다.
노인들은 인사를 한 후에 옆집으로 들어갔다. 따로 삯을 받고 집을 관리해주는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걸로 갈아입어라.”
진우성이 내게 한복을 건넸다. 한복을 받아들긴 했지만 영 마뜩잖았다.
“꼭 입어야 합니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이 마을에선 한복을 입는 게 기본이다. 한복을 입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외지인 취급을 받을 뿐이다.”
“알겠습니다.”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나는 권한이 없었다.
진우성과 진세영도 한복을 입었다. 진세영은 검은 머리를 땋고 하얀 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입었다.
‘보기 좋네. 이거 밤이 기대되는데.’
진세영과 두 눈이 마주쳤다. 진세영이 싱긋 웃었다.
“입었으면 가자.”
진우성이
“또 어디를 갑니까?”
“마을에 왔으면 큰 어르신에게 먼저 인사하는 게 순서다.”
그가 가리킨 건 마을 중심에 있는 커다란 한옥이었다.
???
정씨(鄭氏) 종갓집.
이 마을에서 400년 이상 지내 온 가문이라 한다. 나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안의 분위기 만큼은 조선 궁궐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정숙하고 고요하다는 것이다.
대충 30명 정도가 함께 생활하는 것 같은데 소란스러움은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집이 아니라 사찰에 와있는 느낌까지 들었다.
“종주께선 안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입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것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검은 긴 머리를 하나로 땋았고, 깔끔한 한복을 입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청초했고, 걸음걸이에는 느긋한 기품이 담겨있었다.
‘자빠뜨리고 싶을 정도로 꼴리는 여자군.’
참아야 한다. 여긴 유희 세계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안채에 들어간 우리를 맞이한 것은 자리에 앉아 있는 노인이었다. 우리는 노인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바닥에 앉았다.
“우성이! 오랜만에 찾아왔군!”
“예. 어르신.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진우성은 웃음기를 쫙 빼고 진중하게 말했다.
“세영이도 이제 시집을 가도 될 정도로 자랐구만.”
“하하…. 네.”
진세영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노인의 시선은 내게도 향했다.
“이 아이는 처음 보는 구나. 네 사위냐?”
“아닙니다. 영천류의 제자입니다.”
“성유진입니다.”
“정소운이다. 이 아이를 여기에 데려왔다는 건… 영천류의 정식 제자로 받아들인 모양이구나.”
“네. 유진에게는 그 자격이 있습니다.”
“영천류의 종주는 너다. 네가 선택했으니 내가 할 말은 없구나. 그래. 마을에는 며칠 동안 머물고 갈 것이냐?”
“저는 일이 있어 오늘 저녁에 떠날 것입니다만, 세영이와 유진이는 일주일 정도 마을에 머물 것입니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바쁜 모양이구나.”
“요새 신종 괴이들이 많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쩝…. 오랜만에 너와 술잔이라도 나누려고 했는데…. 바쁜 이를 오래 잡아 둘 수는 없지. 이만 나가서 일들 보거라.”
“하하. 나중에 다시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너무 늦지만 말거라.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여전히 받아치기 곤란한 농담만 하시는군요.”
노인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
우리는 이후에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도착한 곳은 꽤 넓은 공터였다. 옆에는 폭포수까지 흐르니 수련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영천류의 극기(極技)는 정해진 게 없다.”
넓적한 바위 위에 선 진우성이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다. 극기란 극한의 이른 기술. 네가 가진 기술 중 무언가가 극한에 이르렀다면 그것 또한 극기라 할 수 있다. 즉, 영천류의 극기란 하나가 될 수 있고, 여러 개가 될 수 있다. 언젠가 너는 너만의 극기를 만들어내겠지.”
“……극기를 가르쳐주시지 않는 겁니까?”
“아니. 가르쳐 줄 거다. 내 말은 이 기술 하나에만 매달리지 말라는 소리다.”
“알겠습니다.”
“……진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군.”
진우성이 의심 어린 눈으로 날 쳐다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빨리 극기란 걸 보여줬으면 한다.
“내가 보여줄 건 뇌광의 극기다.”
“암영의 극기도 따로 있습니까?”
“있다. 그러나 내 대에 이르러선 실존 됐다. 전해져 내려오는 극기는 오직 하나, 뇌광의 극기일 뿐이다.”
진우성이 칼을 뽑고 양손에 쥐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칼을 겨누었다.
파지직, 파직.
칼날에 번개가 서린다.
나는 시큰둥했다. 칼날에 뇌전을 일으키는 건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저렇게 무게 잡으면서까지 선보일만한 기술이 결코 아니다.
‘……뭐지?’
이상함 눈치챈 건 조금 지나서였다. 칼날에 서린 번개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느낌이 받았다.
“후우우. 두 번은 보여주지 않을 테니 잘 봐라.”
길게 숨을 내쉰 진우성을 두 눈을 번쩍 뜨고 땅바닥에 칼을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