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5화 〉 65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65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국경을 넘어 발트 왕국에 들어왔다.
국경 전체를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발트 왕국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규모를 줄이고 상인으로 위장했다.
지금은 전쟁을 앞둔 민감한 시기다. 내 정체가 들키면 전쟁의 시발점이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미러 터널이 정말 쓸만하군.’
미러 터널을 통해 여기사와 메이드들은 보내거나 데려올 수 있었다.
무리의 규모를 줄였다.
마차는 2대. 하나는 나와 메이드들이 타는 마차. 다른 하나는 상인인 척 하기 위해 상품들을 넣어둔 짐마차다. 짐마차에 제르딘과 베롤이 몰래 타고 있다. 베롤은 며칠 전에 독기를 몰아냈지만, 아직 완벽히 회복하진 못했다. 충직한 기사인 그는 동료 기사들이 제르딘에게 살해당했다는 걸 모른다.
나의 골드 로즈 기사단은 5명을 제외하고 모두 영지로 돌려보냈다. 플로이를 포함해 남은 5명은 용병으로 위장했다. 번쩍번쩍한 갑옷을 벗고 용병들이 주로 입는 가죽 갑옷을 입었다.
“용병 노릇을 해야 한다니…. 이번 임무는 썩 마음에 안 드는군.”
플로이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뿐이었다.
나와 메이드들은 상인의 차림을 했다. 상인의 차림이라고 해봤자 특별한 건 없었다. 일반 평민의 복장보다 조금 더 화려한 복장일 뿐이었다.
마차는 넬로오만 영지로 향했고 어떠한 사건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짐마차에 숨어 있던 제르딘은 더 이상 숨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냈다. 덕분에 넬로오만 자작가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허나 일은 생각했던 만큼 쉽게 풀리지 않았다.
넬로오만 자작은 병에 걸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안색은 시커멓고 간질에 걸린 환자처럼 몸을 덜덜 떨고 있다. 피부에는 푸른색 반점 같은 것들이 올라와 있다.
“넬로오만! 이게 무슨 꼴이냐…! 넬로오만…!”
제르딘이 비틀거리며 넬로오만에게 다가가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렸다고 하기에는 뭔가 어색했다.
‘이 새끼… 내 눈치를 보잖아? 지금 연기하고 있군.’
사촌 형제인 넬로오만에게 다가가지 않는 이유도 병이 옮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거로 보인다.
“제르… 딘….”
넬로오만이 푸석푸석하고 검게 변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무척 작았다.
“넬로오만!”
제르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넬로오만의 손을 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르딘… 도와…. 날 도와줘… 제르딘….”
“도와달라니? 내가 뭘 하면 돼? 넬로오만?!”
“……집사…. 집사에게….”
넬로오만은 그 말을 남기고 두 눈을 감았다. 죽은 게 아니라 잠든 것이다.
직후, 중년 집사가 제르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영주님은 잠드셨습니다. 아마 내일까지 깨어나지 않으실 겁니다. 접견실로 안내하겠습니다.”
빌마드. 넬로오만 자작가의 집사장이었다. 우리는 집사상을 따라 접견실로 들어갔다.
“……집사장. 넬로오만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상세히 말해다오. 넬로오만의 지금 이 증세는… 아버지의 병세와 똑같다.”
“영주님은 저주에 걸렸습니다.”
집사장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르딘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진다.
“병이 아니라 저주라고…?!”
그의 눈동자는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흔들린다. 넬로오만의 증세는 그의 아버지와 증세가 똑같다. 다시 말해 제르딘의 아버지 또한 저주받은 것이 된다.
“그 말! 확실한가? 집사장!”
“확실합니다. 치료를 위해 초청한 마탑의 마법사들의 판단입니다. 그들 중에는 상급 마법사도 있었습니다.”
“저주라니. 대체 누가…. 아니, 그년 말고는 없다. 디오나…!”
제르딘이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얼핏 보면 분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집사장…. 넬로오만은 내게 도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난 저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도와줄 일이 있나?”
“마법사들은 떠나기 전에 저주를 해제할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어떤 방법이지?”
“하스렝 산맥의 깊은 곳. 부정한 것들을 씻겨내는 하얀 나뭇잎이 있다고 합니다. 그 하얀 나뭇잎으로 저주를 해제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왜 넬로오만은 그대로 누워 있는 거냐?”
제르딘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다. 그는 눈앞의 질사장을 질타하고 있었다. 집사장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마법사들은 겁에 질려 이 일에 손을 뗐습니다. 저주의 수준이 저들의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뛰어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0억 네르도 마법사들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망할 것들. 원래 마법사란 것들은 제 안위를 지독히도 챙기는 놈들이지.”
“…모험가와 용병을 고용하여 하르렝 산맥으로 보냈습니다만, 열흘이 넘도록 어떠한 소식도 없습니다. 다른 모험가와 용병을 고용하려고 하나… 소문이 났는지 누구도 의뢰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병사들은? 기사와 병사들을 보내지 않았나?”
“영지를 지켜야 합니다. 최근에 대륙의 정세가 급격히 변하기 시작해서인지 치안이 불안정해져서 기사와 병사들을 보낼 수 없습니다.”
“……넬로오만이 내게 도와달라는 건… 직접 하르렝 산맥에 들어가 하얀 나뭇잎을 가져와 달란 말이로군.”
“염치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르딘 님 밖에 없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저희 영주님을 도와주십시오.”
제르딘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을 받으러왔다가 도움을 주게 생겼다. 무시하기에는 지금 그에겐 넬로오만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제르딘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판단을 내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내 눈치를 보면서 집사장에게 말했다.
“집사장.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잠깐 나가 있도록.”
“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생각이 정리되신다면 불러 주십시오.”
집사장이 나갔다. 나는 거만하게 의자에 앉았다. 지난 시간 동안 날 경험한 제르딘은 감히 나와 두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유리아. 너라면 그 저주를 풀 수 있겠어?”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유리아의 실력을 알고 있는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아크 메이지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그녀의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올 줄 몰랐다.
“제가 알고 있는 저주들과 궤를 달리하는 저주입니다. 저주를 완벽히 해석하고 해제하기 위해선 최소 일주일 이상의 연구 시간이 필요합니다.”
“궤를 달리하는 저주? 마법 저주가 아니야?”
“마법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마법으로 발현된 저주가 아니란 말이었다. 아리송해졌다. 이 세계에서 마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저주를 걸 수 있었던가?
잠깐 고민하다가 답이 나왔다.
‘고대 유물이면 가능하지.’
고대 유물이란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었다. 만능의 단어였다.
‘선택지는 두 개군. 유리아에게 저주를 연구시키는 것과 하르렝 산맥에 들어가서 하얀 나뭇잎을 찾는 것.’
나는 의문을 느꼈다.
“하얀 나뭇잎이란 게 진짜 존재하긴 해?”
“엘스트의 나뭇잎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게 있어?”
”달빛을 흡수한 나뭇잎입니다. 부정한 것을 씻어내는 효과가 있어 저주에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귀찮은데. 그냥 넬로오만을 무시하고 히스필드 관문으로 갈까?’
제르딘이 눈에 들어온다. 저놈이 성공적으로 가주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선 넬로오만의 지지가 있는 편이 낫다. 조금의 지지기반도 없다면 히스필드 가문 자체가 제르딘을 외면할 수 있었다.
‘하르렝 산맥을 뒤지다가 못 찾을 것 같으면 넬로오만을 포기하고 히스필드 관문으로 가는게 낫겠지. 어차피 하르렝 산맥은 지나쳐야 했으니.’
하르렝 산맥은 히스필드 관문 왼쪽에 있는 산맥이었다.
”일단 그 하얀 나뭇잎을 찾아보긴 하자.“
내겐 상태 이상을 없앨 수 있는 엘릭서가 있었으나 넬로오만 자작에게 사용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
산맥을 걸었다. 나무가 빼곡해서 마차를 탈 수 없었다. 제 발로 걸어야 했다. 힘들지는 않았다. 이 정도로 힘들 정도로 약한 몸은 아니었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플로이가 알아서 처리했다. 하르렝 산맥에서 최상급 오러 익스퍼트인 그녀를 막을 수 있는 몬스터는 없었다.
”허억. 헉…. 헉!“
제르딘이 헉헉 거렸다. 그는 베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산맥을 걸었다. 나는 그를 배려하지 않았다. 베롤이 없었다면 제르딘은 낙오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쓸모없는 놈.’
우리는 유리아가 가리키는 방향을 움직였다. 유리아는 달빛이 쏟아지는 위치를 찾아 움직였다.
”찾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약 12시간 만에 새하얀 나뭇잎을 찾을 수 있었다.
작은 나뭇가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하얀 나뭇잎은 신비하게 생겼다. 만져보니 다른 평범한 나뭇잎보다 딱딱했다. 그리고 나뭇잎으로부터 깨끗한 기운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쉽게 발견했잖아. 하나 더 찾고 돌아가자.“
다른 하나는 제르딘의 아버지, 히스필드 백작에게 사용할 나뭇잎이었다. 2시간이 지나서 하나 더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자.“
돌아가는 와중에 누군가가 우리를 막아섰다.
시커먼 로브를 입은 자였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앞에 있는데도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에 마나를 집중하고 놈의 로브 속을 쳐다봤다. 그림자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다.
”플로이.“
”알겠다.“
플로이가 검을 빼 들며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은 애꿎은 나무만 베어 갈랐다. 적이 하늘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아직이다.“
플로이가 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적을 향해 날아갔다. 적은 플로이를 비웃듯이 하늘을 유영하며 모든 공격을 피했다.
원거리 공격이긴 하나 플로이의 공격을 모조리 피했다. 보통이 아니 놈이다.
‘이것도 피할 수 있나? 뇌전.’
벼락이 떨어졌다. 놈은 벼락까지 피하고는 나를 향해 날아왔다.
”방해자들이여.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라.“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내 앞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동시에 유리아가 움직였다. 그녀가 손에 쥔 단검에서 정제된 검은 오러 블레이드가 적의 몸을 가른다. 잘려나간 로브 속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와 내 몸을 감싼다.
”주인님!“
유리아가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그녀까지 휘말리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한 번 당해주는게 낫다. 내겐 완전회복이 있었으니까.
”크흐흐흐흐흐.“
검은 연기는 내 몸속에 스며들고는 사라졌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그리고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부정한 마나를 느꼈어. 처음엔 고스트 계열의 몬스터라 생각했었는데… 악마놈이었군.’
나는 몸을 덜덜 떨었다.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무심코 본 손등 위에 푸른색 점들이 두드러기처럼 올라왔다.
넬로오만 자작의 증세와 똑같았다.
‘저주에 걸렸다. 마법의 흔적이 없는 저주라더니…. 악마의 권능이 깃든 저주였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마나를 이용하니 저주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저주가 내 정신력과 체력을 갉아먹겠지.
”주, 주군! 괜찮나?!“
”남작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증상… 서, 설마 저주에…!“
플로이와 제르딘이 내 앞으로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괜찮으니 진정해라. 제르딘. 내가 저번에 분명 달라붙지 말라고 했을 텐데.“
”히익. 죄, 죄송합니다!“
제르딘이 뒤로 물러났다. 플로이가 내 몸을 만졌다. 플로이가 내 몸을 만지는 건 얼마든지 허락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유리아를 봤다. 그녀는 묘하게 조용했다. 원래라면 플로이보다 앞서 내 몸을 확인할 사람이 그녀였다.
유리아는 동요하고 있었다. 푸른색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다물어진 입술에는 힘이 들어가 있고, 단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났나?’
오랫동안 살을 맞대며 지내 온 만큼 유리아에 대해 잘 안다. 그녀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나를 향한 분노는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악마에 대한 분노다. 분노의 이유는 나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유리아는 내가 가진 완전 회복 스킬을 알고 있어.’
냉정하게 생각해서 유리아가 분노할 일은 아니었다. 분노하더라도 제 감정을 철저하게 숨길 여자다. 그런데 그녀는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저토록 분노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니까.
나는 옅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유리아. 화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