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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6 - 656.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436/2,000)

〈 656화 〉 656.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656.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나는 옅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유리아. 화났어?“

”…저는….“

유리아는 입을 뗐다. 그녀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그녀는 사소한 거라도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네. 화났습니다. 주인님을 지키지 못한 저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불가항력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말들은 오히려 그녀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내가 뭐라 하지 않더라도 그녀 스스로가 반성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른 손으로 유리아의 뺨과 턱을 잡아 고정했다.

”화난 얼굴 보여줘.“

”…네?“

유리아가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곧 당황스러움을 수습하고 내 요구대로 화난 표정을 지었다. 미간이 좁아지고 힘이 들어간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앙다문 분홍색의 입술. 꼴리는 표정이었다.

유리아와 내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던 나를 제지한 건 플로이였다.

”주군.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주군의 몸 상태를 봐라! 주군은 지금 저주에 걸렸다. 하얀 나뭇잎은 주군에게 써야 한다!“

”무슨 소리야. 플로이. 난 저주에 걸리지 않았어?“

”헛소리를. 당장 주군의 피부만 봐도… 음?!“

플로이가 하나밖에 없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몸에는 어느새 저주의 증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져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떨리지 않았고 푸른색 점도 사라졌다. 내 안색은 보나 마나 뻔하다. 방금 자고 일어난 것처럼 상쾌해 보이겠지.

”머, 멀쩡하군. 내가 잘못 봤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나중에 설명해줄게. 돌아가자. 저주의 정체가 악마라는 것도 알았고….“

돌아가면서 제르딘과 베롤에게 윽박질러 오늘 본 것을 잊으라고 말했다. 악마에 대한 소문이 퍼지게 되면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몰랐다.

귀환 도중에 놈이 또 다시 나타났다. 놈은 하늘에서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음산한 웃음을 흘린다.

”크흐흐흐.“

유리아가 마법을 사용했다. 파란 마법진 4개가 놈의 몸을 포위한다. 유리아는 악마를 구속할 목적인 듯했다. 허나 악마는 아무렇지 않게 마법진을 통과해 유리아를 향해 날아왔다. 어쩌면 유리아의 옆에 딱 붙어 있는 나를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것!“

지면에서 온천수 터지듯 그림자가 솟아올라 악마를 붙잡아 지면으로 떨어졌다. 악마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유리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악마가 있었던 곳을 한 차례 노려보고 말했다.

”……본체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저주를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추적할 수는 있겠어?“

”정보가 부족합니다. 당장 추적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됐어.“

좀 빡치긴 하는데 악마 한 마리를 잡겠다고 하르렝 산맥을 떠돌고 싶지 않았다. 빨리 여관으로 돌아가서 유리아를 비롯한 메이드들과 알몸으로 놀고 싶었다.

그런데 악마의 저주는 또 나타났다.

”으흐흐흐흐.“

유리아는 저주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물리 공격은 아예 통하지 않았고, 마법의 높은 질량으로 짓눌러 없애는 게 최선이었다.

”성가신 저주입니다.“

유리아가 드물게 짜증을 냈다. 그녀의 마음속에 풀리지 않은 화가 쌓여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화도 풀어줄 겸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으응….“

유리아의 분위기가 풀어졌다.

이후에도 우리는 저주의 습격을 몇 차례 받은 뒤에 도시로 귀환했다. 저주의 습격은 더 이상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 저주는 왜 날 노린 거지?“

”저주는 주인님을 노린 게 아닙니다.“

”……아.“

나는 제르딘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받은 그는 놀라서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내가 아니라 널 노린 거였군.“

”저, 저 말입니까?!“

”네 아버지와 넬로오만 자작이 저주에 걸렸다. 이상함을 못 느끼나?“

”……모두 제 아군들이군요.“

”네가 이전에 말했던 대로 네 여동생이 저주를 걸었을 확률이 높군.“

”그 저주는 악마의 힘이라고 하셨는데… 설마 제 여동생이 악마와 계약한 것입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네 여동생의 부하가 악마와 계약했거나.“

”미친년….“

제르딘이 두려움에 떨었다.

넬로오만 자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집사장은 하얀 나뭇잎을 갈아 넬로오만 자작의 입에 넣었다. 넬로오만 자작을 괴롭히던 저주가 사라진다. 넬로오만의 안색이 좋아진다. 오한이 멈추고 피부를 가득 채웠던 파란 반점이 사라졌다.

병상에서 벌떡 일어난 넬로오만은 제르딘의 몸을 껴안았다.

”제르딘! 오오! 나의 형제여! 고마워! 제르딘!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넬로오만! 형제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야!“

그들이 형제애를 과시했다. 토가 쏠리는 장면이었다. 친형제도 아닌 사촌 형제인 주제에.

”넬로오만! 네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 히스필드 관문은 디오나가 지배하고 있다! 히스필드의 가신들이 디오나에게 휘둘리고 있다! 나의 아버지와 네가 저주 당한 것도 모두 디오나 때문이다. 디오나가 날 없애기 위한, 히스필드 가문에서 몰아내기 위한 수작이다! 넬로오만! 네가 날 지지해준다면, 네가 나와 함께 히스필드로 향해준다면 다시 모든 걸 바로 잡을 수 있다!“

제르딘이 열변을 토했다. 모두 준비해둔 것들이었다. 나는 저놈이 여기 오기 전에 저 말을 달달 외우는 것을 직접 들었다.

저주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넬로오만은 이를 뿌득 갈았다.

”난 당연히 널 지지해! 디오나! 예전부터 불길한 여자라는 걸 난 알고 있었어! 제르딘. 내가 널 도울게!“

제르딘은 그의 사촌 형제였으며, 생명의 은인이었다. 제르딘이 히스필드의 가주가 되어야 넬로오만이 얻을 이득이 많았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순식간에 일치되었다.

넬로오만은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제르딘과 함께 히스필드 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흘 동안 쉬지 않고 도로를 걸어 하르렝 산맥을 돌아 히스필드 관문에 당도했다.

히스필드 관문의 후방. 제르딘은 성문을 앞에 두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는 제르딘 히스필드다! 히스필드 가문의 적통이다! 내가 가문으로 귀환했으니! 문을 열고 길을 열어라! 나는 가장 먼저 아버지를 만나겠다!“

제르딘의 허세에 감탄이 나왔다. 이놈은 겁만 없으면 뛰어난 사기꾼이 될 것이다.

성문에 서 있던 병사와 기사이 바쁘게 움직였다.

제르딘은 히스필드 가문의 장남이었다. 그가 말했던 대로 적통이었다. 제르딘이 혼자 왔다면 의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넬로오만 자작과 그 병사들과 함께 왔다.

성문이 열렸다.

제르딘은 당당하게 앞장서서 요새 중심에 있는 성으로 걸어갔다.

백성들이 나와서 제르딘의 귀환을 구경했는데 분위기가 묘했다. 누군가는 제르딘을 반겼고, 누군가는 제르딘을 꺼렸다. 그리고 제르딘의 뒤에서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나는 마나를 이용해 청력을 높여 백성들의 수군거림을 엿들었다.

”제르딘 공자가 돌아왔어. 병사들을 버리고 라펠리 왕국으로 망명했다는 소문은 거짓이었나?“

”히스필드 백작 각하께서 위독하신데 왜 이제야 온 거지?“

”솔직히 난 제르딘 님이 아니라 디오나 님이 가주가 되어 영지를 이끌어주셨으면 해. 디오나 님은 현명하고 아름답고 베풀 줄 아시는 분이야.“

”제르딘 님이 장남이란 걸 잊지 마. 그리고 우리들 따위가 함부로 입을 놀려선 안 돼.“

디오나가 수작을 부려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지민들 대부분이 제르딘이 영주가 될거라 확신했다. 이유는 하나. 제르딘이 장남이기 때문이다.

성앞에 기사와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제르딘과 같은 보라색의 긴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졌다. 하얀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가슴은 D컵이고 허리는 군살 하나 없다. 엉덩이는 드레스 치마에 가려져 있어서 확인할 수 없었다.

”돌아오셨군요. 오라버니.“

목소리는 차분했고 기품이 있었다. 보석이 장식된 화려한 파란색 드레스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제르딘이 흠칫 떨었다. 그는 주위에 있는 가신들을 의식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일이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하겠다.“

이곳에서 디오나를 질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공식적으로 디오나를 끌어내릴 수 없다. 혈육의 죄를 밝히기 위해선 증거가 필요한데, 물질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은 아버지다. 아버지를 뵙고 싶다.“

”오라버니. 아버지는 위독한 상태예요. 치료사는 함부로 사람을 들리지 말라 했어요.“

”난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정말로 병에 걸린 게 맞나?“

”치료사와 마법사는 병이라고 했어요.“

”무능한 놈들….“

제르딘의 말대로 정말로 무능한지는 확신하기 일렀다. 디오나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는 저주에 당했다.“

”저주?!“

”저주라니?!“

”제르딘 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신들이 화들짝 놀랐다.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넬로오만이 아버지와 같은 증상을 겪었고, 내겐 저주를 없앨 방법이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한시가 급한 일이다. 아버지께 안내해라.“

”오라버니의 말이 맞아요. 무엇보다 아버지가 중요하죠. 오라버니가 아버지의 병세… 아니, 저주를 없앨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기쁜 일은 없죠. 제가 직접 오라버니를 안내 할테니 여러분은 이곳에서 대기하세요.“

제르딘이 와락 인상을 썼다. 가신들의 태도 때문이다. 가신들은 디오나의 말에 거부하지 않고 따랐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헌데 오라버니. 뒤에 계신 상인분들은?“

”코리아 상단의 상인들이다. 저들의 도움 덕분에 넬로오만도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은인이 될 자들이고, 믿을 수 있는 자들이다.“

”흐음. 그렇군요.“

디오나는 우리를 한 번 훑어 보고는 몸을 돌려 히스필드 백작의 침실로 안내했다.

히스필드 백작의 상태는 심각했다. 피부가 검게 변하고 푸른색 반점의 크기와 양도 많았다. 두 눈을 감고 몸을 덜덜 떨고 있다. 눈 꺼풀이 꽉 닫혀 있는 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침대 옆에는 중년의 치료사가 앉아서 히스필드 백작을 간호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를 이 꼴로 만들다니…!“

제르딘이 디오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오라버니는 제가 아버지를 저주한 것처럼 말 하시는군요.“

”가증스러운 것. 네년의 짓이란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누군가 오라버니에게 이상한 말을 한 모양이네요. 제가 아버지를 저주할 리 없잖아요.“

”넌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거다…!“

제르딘은 디오나에게 한 차례 으르렁거리고는 품 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하얀 나뭇잎을 갈아 준비해둔 가루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병을 기울여 히스필드 백작에게 먹였다.

히스필드 백작의 증세가 좋아진다. 허나 넬로오만처럼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검은 피부는 사람의 피부처럼 돌아왔으나 파란색 반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왜, 왜 이런…?!“

넬로오만이 당황하는 제르딘의 어깨를 잡고 차분히 말했다.

”진정해 제르딘. 효과는 있었어. 엘스트의 나뭇잎이 더 있으면 저주를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 거야.“

”그, 그래. 아버지의 증세는 호전되었으니 시간은 있어.“

나는 혀를 찼다.

이러면 일이 귀찮아진다. 원래 계획은 저주에서 벗어난 히스필드 백작을 이용해 제르딘의 후계자 자리를 견고히 하는 것이다. 히스필드 백작의 말이면 디오나의 수작은 전부 박살 나니까. 디오나는 처형당하거나 유배당하게 될 터.

‘그리고 내가 디오나를 빼돌리는 거지. 제르딘과 짜서 디오나가 도망친 것으로 만들고 나는 디오나를 저택으로 데려가 따먹고 조교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이러면 다른 수단을 써야 한다. 유리아를 이용해 강제적으로 납치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뒷수습은 제르딘이 알아서 하라고 시키고.

‘어?’

디오나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디오나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마치 내 정체와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이.

”오라버니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네요. 아버지는 안정이 필요해요. 우선 나가시죠, 오라버니. 나가서 그간 무슨 일이 겪으셨는지 말씀해주세요.“

”크으읏….“

제르딘은 이를 악물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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