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0화 〉 660.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660.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덜컥! 창문이 열리고 시커먼 로브를 걸친 검은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악마의 저주가 찾아온 것이다.
디오나와 카티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문두두의 저주가 왜…?!”
“아가씨!”
나체의 그녀들은 서로를 붙잡고 몸을 떨었다. 저것이 사람을 죽게 이르는 악마의 저주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녀들의 앞으로 나섰다. 그녀들은 내 좆집이었다. 저주에 걸리게 할 수 없었다.
‘이놈은 물리 공격도, 어지간한 검기도 안 통하는 귀찮은 놈인데. 유리아는 마법의 질량으로 짓눌러 없애 버리면 쉽게 없앨 수 있다고 했지만…. 난 마법을 못 써.’
차라리 그냥 당하는 편이 낫다. 내게는 완전 회복이 있으니 저주를 말끔히 없앨 수 있으니까.
‘그래도 그냥 당할 수는 없지. 날 노리는 게 저거 하나만이 아닐 수도 있고…. 아니. 잠깐. 날 노리는 게 맞나?’
힐끗.
내 뒤에 있는 디오나를 쳐다봤다. 악마 계약의 증표가 사라지고 저주가 찾아왔다.
문두두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제한 것이다. 문두두가 디오나를 죽이려 했다면 굳이 저주를 보내는 게 아니라 계약을 해제했을 때 모습을 드러내 직접 디오나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저 저주는 문두두의 새로운 계약자가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나나 디오나가 죽기를 원하는 자. …한 사람밖에 안 떠오르는군. 제르딘. 이 새끼…. 통수를 쳐?’
악마와 계약을 했다면 내게 보고했어야 했다. 그러나 제르딘은 보고는커녕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다. 내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했다는 것 자체가 배신행위다.
파지지직.
내 손아귀에서 뇌전이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시퍼런 전기가 실지렁이 뭉치처럼 꿈틀거린다.
“크흐흐흐.”
저주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향해 다가온다. 놈을 향해 뇌전을 던지려다가 말았다. 지금 이 상태로 던져봤자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질량이라….’
유리아가 말한 마법의 질량이란 무게를 말하는 게 아닐 것이다. 애초에 마법 자체에 무게가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도 느낌이 오는군.’
파지지지직.
내 손안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뇌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줄어들고 압축되어 오직 한 줄기의 번개로 변했다.
‘현실에서 했던 폭포 수련…. 그때를 떠올리자.’
번개를 압축해서 밀도를 높여 저주를 향해 던졌다. 저주는 번개를 피할 생각도 않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번개가 저주의 몸을 찢어발긴다. 시커먼 로브가 부서지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한 방이 부족하면 콤보로 넣어주지.’
내 양손에 번개가 쥐어진다.
‘찰나.’
저주의 돌진을 옆으로 피해냈다. 저주가 방향을 틀어 나에게 날아온다. 양손의 번개를 동시에 던졌다. 저주의 몸이 멈칫거린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뇌전을 압축한 번개를 쉬지 않고 던졌다.
“그아아아아아….”
8개의 번개를 맞은 저주가 낮은 비명을 흘리며 사라졌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번개를 압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지금 내 실력으론 한계가 좀 있군.’
디오나와 카티아를 돌아봤다.
“옷 입어. 저주가 또 올 수도 있으니까.”
“남작님! 어, 어떻게 하죠? 악마가 멋대로 날뛰면 히스필드 관문은 큰 피해를 입을 거예요!”
디오나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도와달라는 의도다.
나는 그녀의 커다란 젖가슴을 입으로 물었다.
“하아악?!”
입을 떼자 내 이빨 자국이 가슴에 선명하게 남았다.
“내 말을 이해 못 했나? 옷 입어. 그리고 안내해라.”
“안내… 라니요. 어디로…?”
“제르딘에게.”
그녀들이 옷을 입는 동안 나는 인벤토리에서 무전기를 꺼내 유리아와 플로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유리아에겐 돌아다니는 저주를 없애고 권능을 사용하는 악마를 생포하거나 죽이라고.
플로이에겐 무장한 상태로 대비하라고 했다. 제르딘이 병사와 기사를 움직이면 여기사들이 나서서 전투를 벌일 것이다.
‘제르딘이 날 노린게 아니라 디오나를 노린 거라면 병사나 기사들이 움직일 일은 없겠지…. 문두두란 악마는 제르딘과 같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
“여기가 제르딘의 방이라고?”
“네.”
디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발로 찼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대로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없군. 제르딘이 어디로 갔는지 알겠나?”
“성 밖으로 도망치지 않았을까요?”
“그 욕심 많은 놈이? 병사를 일으키면 일으켰지. 조용히 성을 빠져나갔을 리 없어.”
“…실언이었어요. 남작님의 말이 맞아요. 그 더러운 놈은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은 많죠.”
내 말에 공감한 디오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아버지!”
“응?”
“아버지의 방이에요! 제르딘은 아버지를 죽이고 가문의 검을 가질 생각이에요!”
“갑자기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고? 가문의 검은 또 뭐야.”
“가문의 검은 가주의 증거예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전통을 고집하는 가신들은 다룰 때 유용해요. 그리고 제르딘이 아버지의 유언을 조작하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그래도 제르딘이 직접 아비를 죽이면 이상하잖나. 가신들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저주를 이용해 죽일 거예요! 저주를 중첩으로 걸면 아버지는 버티지 못해요!”
디오나는 히스필드 백작을 죽이지 않았다. 가신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가주 자리를 얻게 되더라도 가신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반쪽짜리만도 못한 권력이니까.
제르딘의 입장은 디오나와 달랐다. 장남인 그는 가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히스필드 백작이 당장 죽는 편이 그에게 더 도움이 되었다.
‘시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제르딘 놈에게 목줄부터 채워둘 걸 그랬군. 그럼 제 멋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텐데.’
나는 히스필드 백작의 침실로 뛰었고, 그녀들이 내 뒤를 따랐다.
???
유리아는 히스필드 백작성의 지붕 위에 올라섰다.
자정을 넘은 깊은 밤. 주위는 어두웠다. 도시는 불빛 하나 없다. 성내에는 불빛이 몇 개 있긴 하나 그 빛이 유리아를 비추는 일은 없었다.
그녀 발치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그녀가 손바닥을 펼치자 그림자 속에서 유리병 하나가 튀어나와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유리병 속에 들어 있는 건 검은색 가루였다. 진짜 가루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가루처럼 보일 뿐이다.
그녀는 유리병 마개를 풀었다. 검은색 가루, 부정한 마나가 유리병 밖으로 새어 나가 바람을 타고 사라진다.
부정한 마나.
달리 오염된 마나라고도 불리는 이 마나는 악마들이 무척이나 좋아한다. 부정한 마나가 악마의 근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악마들은 부정한 마나로 몸을 회복할 수 있고, 더 강해질 수도 있었다.
유리아가 부정한 마나를 허공에 뿌린 것은 악마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좋다! 좋은 냄새가 난다!”
성의 아래쪽, 어느 창문에서 악마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
유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악마를 확인했다. 그녀의 주인의 말에 따르며 악마의 이름은 문두두, 흑사의 악마였다.
문두두는 한 쌍의 박쥐 날개를 가진 원숭이였다. 두 개의 팔이 유독 길었는데 아래로 축 늘어졌다. 문두두는 붉은 눈으로 유리아를 보며 씨익 웃었다. 입술 사이에는 날카로운 송곳 같은 이빨이 촘촘하다.
“인간 주제에 악마에 대해서 좀 아는군.”
문두두는 부정한 마나가 자신을 끌어내는 미끼라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부정한 마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고, 고작 인간 따위에게 자신이 당한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확인 차 묻겠습니다. 당신이 문두두 입니까?”
“내 이름을 알고 있나? 기본을 갖췄군.”
문두두의 붉은 눈이 빛난다. 그의 주위로 검은색 로브, 저주가 나타났다. 총 5개. 그것들은 로브를 펄럭이며 유리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맞군요.”
“……음?”
문두두의 고개가 옆으로 껶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유리아에게 물었다.
“분노하고 있군. 왜 분노하는 거지? 내가 너와 관련된 인간을 죽였나? 아니면 악마를 싫어하나?”
겉으로 봤을 땐, 유리아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문두두는 본능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자그마한 재주가 있었다. 권능도 뭣도 아닌 말 그대로 하찮은 재주다.
“당신의 저주가 주인님을 위협했습니다.”
유리아가 손에 단검을 들었다.
“주인님? 누군가의 하인이었나?”
“주인님을 노리고도 편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까? 약속드리죠. 당신은 스스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오하게 될 것입니다.”
“흐흐. 인간은 어리석지. 감정에 휘둘러서 수준 차이를 파악하지 못하지. 나의 저주에 둘러싸여 죽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라.”
5개의 저주가 일제히 유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리아는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자는 달랐다. 그녀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늘어나더니 그대로 위로 솟구쳐 저주 자체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린 것이다.
“어… 어?”
문두두의 입에서 어벙한 목소리가 나왔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 다시 한 번 저주를 사용하려고 할 때였다. 유리아가 허공을 밟으며 문두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문두두는 또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날개도 없었다. 어떻게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허공을 걷는 건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유리아는 일정 거리에서 단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단검은 정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지금 날 놀리는 것이냐? 건방… 허억?!”
문두두의 오른팔이 베어져 아래로 떨어졌다. 검기로는 상처하나 낼 수 없는 단단한 악마의 몸이 너무도 쉽게 베였다.
“미, 미친! 공간을 벴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권능도 없는 일개 인간 따위가…!”
문두두의 몸에서 나온 저주가 유리아의 정면을 노렸다. 지상에서 그림자가 솟구쳐 저주를 삼키고 사라졌다.
그녀가 허공에 한 발짝 내디디며 단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문두두의 왼팔과 날개가 잘려나갔다. 상급 악마인 문두두는 날개가 없어도 마력을 이용해 허공에 떠있을 수 있었다.
‘잘못됐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상대가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문두두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상대는 공간을 베는 힘을 사용하는 말도 안 되는 실력자. 싸우는 건 미친 짓이었다. 문두두는 지상으로 하강하며 유리아에게서 도망쳤다.
“못 갑니다.”
달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쏘아진 그림자 사슬이 문두두의 몸을 붙잡았다. 그림자에 붙잡힌 문두두는 다급해졌다.
“계약! 나와 계약하자 인간! 죽이고 싶은 상대가 없나? 내 저주로 네가 의심받을 일 없이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
“그깟 저주. 당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할 수 있습니다.”
“뭣?”
문두두는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갑자기 고통이 밀려온다. 팔과 날개가 잘렸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이.
“끄아아아아아아악!”
악마의 비명은 끔찍했다. 허나 그 비명은 그림자에 삼켜져 퍼지는 일은 없었다.
“제르디이인! 날 불러라! 지금 당장 날 부르란 말이다!!”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저를 제외하고 누구도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계약에 의한 소환은 제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림자는 더욱 문두두를 옭아맸다.
“두 번째 가축이 손에 들어왔으니 주인님께서 기뻐하시겠군요. 잘된 일입니다. 분명 칭찬해주시겠죠. 그리고 어쩌면….”
유리아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그려졌다가 사라졌다.
???
히스필드 백작의 침실의 문을 박살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디오나의 예상대로 제르딘이 있었다. 침실 안을 뒤지고 있던 제르딘이 깜짝 놀라 우리를 쳐다봤다. 그의 손에는 화려한 검이 손에 들려 있었다. 디오나가 말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검이리라.
“프루커스 남작님! 디오나! 왜 둘이 함께 있는 겁니까?!”
침대 위를 쳐다봤다. 히스필드 백작은 죽었다. 저주로 인한 죽음이다.
“제르딘.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였군. 네가 악마와 계약한 것도 알고 있다.”
“빌어먹을! 저주가 실패했군!”
“긴말하지 않겠다. 꿇어라.”
“웃기지 마라! 프루커스 남작! 일은 이미 끝났다! 내가 히스필드 백작이다! 남작의 도움은 감사하고 있다. 약속대로 디오나를 주지. 죽이든지, 성노예로 삼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물러나라!”
제르딘이 내게 검을 겨누었다.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제르딘은 지나치게 악마를 믿고 있다.
“선 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