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3화 〉 663.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663.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라펠리 왕국의 국왕이 서거했다.
히스필드 백작과 다르게 라펠리 국왕의 죽음에는 어떠한 음모도 없다. 히스필드 백작과 라펠리 국왕은 지위부터가 달랐다. 국왕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조사가 있을 것이고, 그 조사 결과 라펠리 국왕의 사인은 노환으로 밝혀졌다.
문제가 되는 건 라펠리 국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장남인 에이든 왕자가 왕위를 차지하는 게 맞다. 허나 에이든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망나니였다. 유능했다면 모를까. 그는 무능했다. 헬브리트 공작은 그를 왕으로 삼아 꼭두각시처럼 부릴 생각이었지만, 헬브리트 공작가는 유리아의 손에 멸족했다.
그래도 에이든의 지지자는 남아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에이든은 적장자였고, 욕심 많은 귀족들의 입장에서 에이든이 왕이 되는 편이 이득이니까.
그러나 귀족중에는 제 욕심만 챙기는 인물만 있는 게 아니다.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는 귀족들은 아일린 공주를 지지한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재상의 일을 완벽히 수행할 정도로 유능했다. 귀족들은 그녀가 여왕이 된다면 라펠리 왕국은 앞으로의 50년을 황금기로 누릴 것이라고 칭송했다.
‘지금 라펠리 왕국에는 왕의 대리자도 없고, 전쟁이 진행 중이지.’
때문에 왕을 정하는 건 귀족들이었다. 에이든과 아일린. 두 명의 직계왕족 중 하나를 선택하여 왕위를 계승시키게 하면 된다. 허나 귀족들의 의견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있다.
‘원작과 달라. 원작은 에이든이 유리했지. 헬브리트 공작가가 에이든을 선택했으니까.’
그럼에도 끝에 왕이 되는 건 아일린이었다. 아일린을 선택한 건 원작의 주인공인 카일이었으니까.
“유리아. 국왕의 장례식은? 장례식은 어떻게 한데?”
“장례식은 이주일 뒤에 전통 방식으로 진행할 것 같습니다.”
“지금 전쟁 중인데도 전통 방식으로 진행한다고? 하여간 꼰대 새끼들은…. 크크.”
라펠리 국왕의 장례식은 유명하다. 국왕의 시체가 담긴 관에 부패방지 마법을 걸고, 그 관을 호위하며 라펠리 왕국 전역을 한 바퀴 돌고 난 뒤에 화장한다.
지금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장례를 감행하는 이유는 전쟁이 국경지대에서 소규모로만 일어나는 것도 있지만, 아마 정치적인 이유가 더 클 것이다.
“유리아. 우린 장례식에 참가해야겠어. 플로이에게 말하고 준비해. 검은 옷이 필요해.”
“네. 준비하겠습니다.”
국왕의 장례식이라 해서 모든 귀족이 참가할 필요는 없다. 결국, 장례식이 진행되면서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니 귀족들은 어떤 의미로 강제로 장례식에 참석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장례식 대열에서 시작하면 좀 다르지.’
라펠리 왕국의 중심 권력을 노리는 자들은 모두 장례식 대열에 참가할 것이다. 장례식은 약 100일 동안 진행되고, 100일 동안 차기 국왕과 함께 장례를 치르면서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
‘에이든의 최대 지지자인 헬브리트 공작이 없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장례식이 끝났을 무렵 귀족들은 아일린을 여왕으로 추대하겠지. 내가 참가해서 아일린을 견제해야 해.’
물론 이 일로 에이든을 국왕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내 목적은 아일린 공주를 견제하는 것이다.
???
장례식의 첫째 날은 우중충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에는 새벽부터 회색 먹구름이 가득했다.
국장(國葬) 기간 동안 어두운색의 옷을 입어야 하는 왕도의 시민들은 하늘까지 국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며 수군거렸다.
백성들에게 있어 죽은 라펠리 국왕은 성왕이었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큰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고, 큰 자연재해도 없이 무탈했기 때문이다.
‘무능하지도, 유능하지도 않은 국왕이었지.’
그가 유능했다면 살아있을 때 아일린에게 왕위를 계승했을 것이고, 무능했다면 에이든은 이미 왕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유리아를 대동한 채로 에이든 왕자의 방을 찾아갔다. 에이든 왕자는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프루커스 남작! 왜 이제야 오나?! 왕도에 왔으면 날 보러와야 하지 않나!”
“시끄럽습니다.”
차갑게 대꾸하자 에이든이 흠칫 놀라 입을 다물고 내 눈치를 살폈다. 에이든은 내가 하루아침에 헬브리트 공작가를 없애버렸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없으면 왕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침묵했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 에이든은 입을 떼지 못했다.
“국왕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유언…. 남겼다. 하지만 전부 시시한 것들이었지. 중요한 왕위계승에 대한 말은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빌어먹을! 장자는 난데 아버지는 아일린만 예뻐하셨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뭐, 진정하십시오. 아일린 공주가 왕이 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진정할 때가 아니다! 그년을 따르는 귀족들만 몇인줄 아나? 내가 알기로 30명이 넘는다! 그중에 선하이츠 공작이 그년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남부의 대귀족. 선하이츠 공작. 왕도에 있는 귀족 중에선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귀족이었다.
“이러다가 장례식이 끝나고 아일린이 왕좌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그럴 일은 없으니 진정하십시오. 아니면 내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꿀꺽.
에이든이 마른 침을 삼켰다.
“미, 미안하다. 남작. 너무 초조해져서 내가 남작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괜찮습니다. 왕자님.”
“그래도 남작… 아일린은 위험하다. 그 영악한 년은 날 밀어내기 흉계를 꾸미고 있을 거다. 지금 당장 해치워버리는 게 어떤가? 남작이라면 가능하지 않나.”
“왕자님. 왕좌를 차지했다고 절대 왕권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귀족이 따르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의 자리입니다. 아일린 공주가 죽으면, 아일린 공주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누구를 의심하겠습니까?”
“그들까지 전부 죽인다면….”
“왕자님은 개판이 된 왕국을 가지고 싶습니까? 다 때가 있으니 기다리십시오.”
유리아 혼자서 전부 죽일 수도 없었다. 그녀는 강하지만 마스터급의 강자는 왕국에도 몇몇 있었다.
“기다리기만 하라고? 내가 따로 할 건 없나?”
에이든이 말했다. 국왕이 죽고 왕좌가 공석이 되면서 몸이 달아오르는 모양이다. 제 아비가 죽었는데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사고만 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알겠다. 남작.”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찾아온 건 사고 치지 말라는 말을 당부하기 위해서였다.
???
왕성 앞에 사람들이 늘여 섰다. 앞에는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왕실 기사들이 대열을 갖추었고, 그 뒤에 화려한 마차가 줄줄이 일어졌다. 국왕의 시체가 안치된 마차는 가장 맨 앞에 있는 마차였다. 그 뒤로 에이든 왕자의 마차, 라펠리 공주의 마차, 다른 귀족들의 마차들이 줄줄이 잇는다.
이 대열에 참가한 귀족들의 수는 100명이 넘고, 무장한 병사와 기사의 숫자는 3,000명이 넘었다. 하인들의 수까지 합치면 5,000명에 달한다.
대열이 출발하기 전, 나는 아일린 공주와 마주했다.
빛나는 금발과 사파이어처럼 푸른 눈동자. 하얀 피부와 청초한 이목구비.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음에도 태가 나는 뛰어난 몸매.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다.
“프루커스 남작. 남작도 참석하셨군요. 듣자 하니 어제 저녁에 왕도로 오셨다던데… 전 지금에서야 남작을 보는군요.”
난 그녀의 주위를 둘러봤다. 귀족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절반 이상이 어중이 떠중이들이지만, 몇몇은 나도 무시할 수 없는 귀족들이다. 저들 모두가 나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어제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고, 오늘은 너무 일렀던지라 이제야 공주님에게 인사를 드리는군요.”
“그랬습니까. 에이든 오라버니와 대화는 잘 나누셨습니까?”
오늘 아침에 에이든과 만날 걸 알고 있다. 놀랍지 않았다. 왕성은 아일린의 영역이다. 그녀의 손과 발, 눈과 귀가 지천에 널렸다.
“네. 잘 나누었습니다. 왕자님은 매우 큰 슬픔을 느끼고 계시더군요.”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술을 찾았다고 들었는데….”
“슬픔을 술로 달래시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왕자님을 오해하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가 말하고도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에이든 왕자는 항상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 국왕의 죽음에 슬픔을 느꼈다면 오히려 술을 멀리해야 옳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에이든에게 술을 뺏지 않을 것이다. 술주정뱅이가 술을 먹지 못하면 사고를 칠 것이 분명했기에. 차라리 술먹고 얌전히 있어 주는 쪽이 낫다.
“프루커스 남작. 남작은 국경지대의 일과 가문과 관련된 일로 바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오셔도 됩니까?”
그녀가 말하는 건 후계자 경쟁이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라펠리 왕국의 동부는 저의 아버지께서 철저하게 방어하고 계십니다. 저는 왕국을 수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왕 폐하를 추모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주님. 아버지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걸 제가 대신하여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변경백이 목숨을 걸고 동부를 수호하고 있는걸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아, 이제 곧 출발할 것 같군요.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공주에게 다가갔다. 그녀 주위의 귀족들이 기함한다. 고작 나 따위가 공주랑 맞먹으려 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그러나 정작 아일린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제게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남작?”
“공주님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내 발은 옆으로 틀어 한 귀족 남성에게 향했다. 쥐처럼 생긴 귀족이었다.
“바르마르마 남작.”
“뭐, 뭔가. 프루커스 남작.”
“왜 여기에 계십니까? 제가 주문한 물건은 무사합니까?”
“주문한 물건이라니….”
“하하. 기억력이 쇠퇴하신 모양이군요. 2년 전에 주문한 물건 말입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건가. 남작과 난 오늘 만나지 않나.”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새낀 눈치가 없었다. 중요한 일을 맡기진 못하겠다.
“지금은 없는 헬브리트 공작과 관련된 일입니다. 제가 꼭 그를 언급해야겠습니까?”
“어, 어. 어….”
바르마르마 남작은 어벙하게 입을 벌리고 몸을 떨었다.
그는 헬브리트 공작의 개중의 하나였다. 주로 하는 일은 헬브리트 공작의 명령을 받아 전쟁 물자를 밀무역하는 일.
“바르마르마 남작. 왜 여기에 있습니까? 저랑 좀 대화합시다.”
“아, 알았다.”
“알았다?”
“……알겠습니다.”
바르마르마 남작은 절망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힐끗 아일린 공주를 쳐다봤다. 그녀는 나를 막지 않았다. 대신 관찰을 하듯 이쪽을 쳐다본다.
나는 다른 귀족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했다.
“레이타놀 남작. 저와 할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바르카스 자작. 자작의 딸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 있습니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것이오? 내겐 딸이 없소!”
바르카스 자작은 화들짝 놀라며 내 뒤로 왔다. 그는 혼외 자식이 있었다. 딸이었는데 제 아들보다 더 좋아했다.
“야스프린 자작. 저번에 내게 빌려 간 돈은 어떻게 됐습니까?”
“도, 돈은 투자한 상태입니다. 갚아야 할 기간은 아직 많이 남지 않았습니까!”
“확인차 물어본 겁니다. 계속 거기에 있을 겁니까?”
야스프린 자작은 나와 아일린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내 뒤쪽으로 왔다.
그는 줄을 잘 섰다. 유능한 아일린 공주를 따르면 훗날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는 내게 빌린 돈의 절반은 아일린 공주에게 투자하고, 나머지 절반은 병력에 투자했다. 다만 그는 채무자였고 나는 채권자였다. 그리고 계약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내게서 설설 기어야 했다. 안 그러면 파산이니까.
뒤를 돌아봤다. 내 뒤에는 6명의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고 감히 들지 못했다.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날 얕잡아 보던 귀족들은 대귀족을 보는 것처럼 경계심 섞인 눈으로 날 쳐다봤다. 자신의 지지자를 빼앗긴 아일린 공주는 덤덤한 눈으로 날 봤다.
“공주님. 이제 진짜 물러나겠습니다. 날씨가 추우니 옥체 보존하십시오.”
“……네. 남작님도 조심하십시오.”
인사를 끝내고 내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내 등에 따가운 시선이 꽂힌다. 나의 파벌은 지금 이곳에서 탄생한 거나 다름없다. 이제 대귀족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날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