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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9 - 66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449/2,000)

〈 669화 〉 66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66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아일린 공주를 비롯한 귀족들은 대열을 습격했던 자들의 정체를 비트라세 왕국으로 거의 확정했다. 명확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나 정황상 비트라세 왕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알고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대응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외교관을 파견해 따지는 것이 전부다. 국왕이 죽고 왕좌의 자리가 비었으며 국장이 진행중인 지금 라펠리의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억지로 따졌다간 오히려 비트라세 왕국이 본격적으로 침략 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일린 공주는 일단 이 일을 묻어두고 훗날을 기약했다. 선하이츠 공작은 다혈질이지만 현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수긍했다.

에이든 왕자는 별 생각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한 중년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흑갈색 머리카락에 가진 별명과 다르게 평범한 키를 가진 남자.

북부의 거인. 루크만 페트라스 후작.

동부에 프루커스 백작이 있다면, 북부엔 페트라스 후작이 있다. 그는 라펠리 왕국을 대표하는 오러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허나 나는 그를 뚱하게 맞이했다. 그가 없었다면 내 계획은 완벽하게 끝났을 것이다. 선하이츠 공작은 죽고 아일린 공주는 납치당하며, 에이든 왕자는 높은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제 마차엔 뭐하러 오셨습니까?”

페트라스 후작은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는 프루커스 백작과 다르게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해 내 앞에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라펠리 왕국의 부흥을 바라고 있다.

“그대의 얼굴을 보러왔다. 공주의 수호기사.”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낯간지럽습니다.”

“그러지.”

페트라스 후작은 내 옆에 앉아 있는 유리아를 힐끔거렸다.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유리아의 정체를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아일린 공주에게 모종의 언질을 받은 것 같긴 한데.

“진짜 어떤 목적으로 절 찾으셨습니까?”

“그대가 에이든 왕자를 따른다는 말을 들었다.”

지루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예. 에이든 왕자님을 따릅니다. 에이든 왕자님은 라펠리의 적자입니다. 국왕 폐하가 서거하신 지금, 왕좌의 후계자는 오직 에이든 왕자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이든 왕자가 남자라서 그런가?”

“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인으로서 어처구니없어도 이곳에선 통하는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옳은 상식이다.

“라펠리 왕국의 역대 국왕들은 모두 장자는 아니었어도, 모두 남자였습니다. 국왕 폐하의 유언에는 후계자에 대한 말이 없었습니다. 에이든 왕자님이 왕위를 계승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대의 말은 틀리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귀족은 옳다고 생각하겠지.”

“보아하니 후작 각하께선 저와 생각이 다르신 모양이군요.”

“지금의 대륙은 어지럽다. 시각이 지날수록 더욱 어지러워지며 난세가 펼쳐지겠지. 난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뛰어난 지도자가 필요하다. 에이든 왕자로선 안 된다. 심기가 약하고 능력도 없다. 반면에 아일린 공주에겐 능력이 있다. 라펠리 왕국을 지킬 능력이 있다.”

페트라스 후작이 아일린 공주를 따르기로 했다. 귀찮게 됐다. 그는 북부의 대표다. 그의 지지는 북부 전체의 지지다.

“저보고 에이든 왕자를 버리고 아일린 공주를 따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 그게 라펠리 왕국을 위한 일이다. 왕좌가 비어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힘들어지는 건 백성들뿐이다.”

알고 있다.

이 나라에 필요한 왕은 아일린 공주다. 하지만 왕이 된 그녀는 내 여자가 되지 않는다. 나는 라펠리 왕국이 망가지고 무너져도 상관 없었다. 아일린 공주를 갖고 싶었다.

“아일린 공주님의 부탁을 받으셨습니까?”

“아니다. 내 독단이다. 그대가 돕는다면 공주님은 어떠한 분란도 없이 왕위에 오를 것이다.”

“죄송합니다. 전 페트라스 후작 각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후작 각하께서 어떤 말을 하시더라도 왕위는 에이든 왕자님이 물려받으셔야 합니다. 그게 마땅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

페트라스 후작이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눈을 피하면 내가 졌다고 시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알겠다. 마음에는 들지 않으나 억지로 그대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그대가 어떻게 생각하든 결국 왕위는 아일린 공주님이 계승하게 될 것이다.”

“그건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페트라스 후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나는 강대한 적과 싸웠다.”

“예. 거의 1시간이 넘도록 싸웠다고 들었습니다. 귀족들은 쉬쉬하고 있지만 비트라세 왕국의 마스터라는 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페트라스 후작 각하께서 없었다면 대열은 전멸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비트라세 왕국의 마스터가 아니다.”

“예?”

“비트라세 왕국의 마스터는 총 3명이고, 나는 그들과 만나 전투를 치른 적 있다. 어제 나와 싸운 그의 전투방식은 그들과 전혀 달랐다. 그들보다 더 날카로웠고, 그들보다 더 빨랐다. 나는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는 날 죽이려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따라붙는 게 전부였다. 그는 내 역량 이상이었다.”

“……놀라운 말이군요. 그의 인상착의는 어떻습니까?”

“어둠을 휘감고 있었다. 마법인지, 유물인지 모르겠으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비트라세의 마스터가 아니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군요.”

“그는 공주님이 아니라 선하이츠 공작을 노렸다. 마침 내가 선하이츠 공작의 근처에 있지 않았다면, 선하이츠 공작은 그대로 놈의 검에 명을 달리했겠지.”

“…후작 각하께서 북부로 돌아가시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까?”

“북부는 내가 없어도 괜찮다. 북쪽의 국가들은 저들끼리 싸우기 바빠서 아래로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번에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함께할 생각이다.”

“그렇군요.”

선하이츠 공작을 암살할 기회는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더 없을 것 같았다.

“그대는 선하이츠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

“마찰이 있긴 했습니다. 혹시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럴 의도는 없다. 여러 가지로 들은 말이 있어서.”

그는 내 옆의 유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는 남작과 항상 붙어 다니던 메이드군. 어제는 어디에 있었지?”

“마차 안에 있었습니다.”

유리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인들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모여서 검과 방패를 쥐었다고 들었다. 너는 마차 안에 홀로 남아 있었던 건가?”

“네. 주인님의 명령도 있었고, 마차 안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사해서 다행이군.”

그는 유리아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을 쳐다봤다. 손을 보면 대충이나마 그 직업과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통의 경우엔 말이다.

유리아의 손은 깔끔했다. 흉터 하나 없었으며 가늘었다. 섬섬옥수라는 말이 그녀의 손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전사의 손이 아니었고, 메이드의 손도 아니었다.

“손이 예쁘군.”

“감사합니다. 주인님의 메이드로서 매일 관리하고 있습니다.”

“……메이드가 아니라 귀족 영애라 해도 믿겠군.”

나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작 각하. 제 손은 어떻습니까?”

“……그대의 손은 전사의 손이 아니군. 이해할 수 없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갖췄으면서 어떻게 손은 그렇게 깔끔한 거지?”

완전 회복 덕분이었다. 상처나 흉터 같은 건 완전 회복을 사용하면 전부 사라진다. 굳은 살이 없긴 하나 내 손이 약한 건 전혀 아니었다. 내게는 유희 생활 어플의 능력치가 적용되니까.

“신경 좀 썼습니다. 마법이나 포션으로 관리하니 깨끗하고 좋더군요.”

“이해할 수 없군. 이게 세대차이라는 건가….”

페트라스 후작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떠났다.

“의심하고 있군.”

“네. 노골적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페트라스 후작을 죽이는 편이 좋지 않아? 시시때때로 방해할 것 같은데.”

“북쪽의 호지트 왕국과 비슐 왕국은 결국 아래로 남하할 것입니다. 북부는 격전지가 될 테니 페트라스 후작의 힘이 필요합니다.”

“선하이츠 공작은 어떻게 나올 것 같아?”

“아일린 공주가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이제 내가 뭐할 것 같아?”

“주인님은… 육봉으로 제 보지를 쑤실 것 같습니다.”

“역시 유리아! 정답이야!”

나는 그대로 유리아를 덮쳤다.

“꺄아아앙.”

유리아는 내게 맞춰주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곧 우리의 마차 안은 뜨거운 열기와 숨소리로 시끄러워졌다.

???

대충 80일이 지났다.

그동안 특별한 일이 없어서 지루했었다. 뭐, 나 같은 경우는 자동 진행과 미러 터널이 있어서 편하게 시간을 보냈다. 미러 터널을 통해 몰래 저택으로 돌아가 메이드들과 노는 등의 방식으로.

선두가 속도를 점점 느려졌다. 굳건한 요새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트렌 성.

엔티온 프루커스 백작이 이곳에 머물면서 발트 왕국의 침략자와 악원의 수해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를 막아내는 곳.

‘오랜만에 엔티온을 보게 되겠군. 엔티온을 생각하니 엘라인이 생각나네. 엘라인은 보지털이 빳빳했고 소음순이 음란하게 벌어져 있었지.’

마차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칙칙한 회색의 성벽 때문일까. 공기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철과 피의 냄새가 났다.

우트렌의 병사와 기사들이 대로에 늘여 서며 우리를 맞이했다. 장례식 대열은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고 내일 오후에 다시 출발한다. 지친 말들을 달래고 마차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프루커스의 직계지만 우트렌 성에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분위기가 무겁다. 병사들로부터는 최전방 다운 군기가 느껴진다.

저 멀리 엔티온 프루커스와 젠트 프루커스가 보인다. 그들은 아일린 공주와 에일린 왕자와 인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걸어가던 와중에 마차에 등을 기대고 있는 페트라스 후작을 발견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 가십니까?”

“엔티온 놈과는 나중에 따로 인사할 생각이다. 먼저 가라.”

“네.”

그와 엔티온이 어떤 사이인지는 관심 밖이었다.

“아버지.”

“왔느냐.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은 들었다.”

“네. 죽은 이들이 많습니다.”

“음.”

엔티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거나, 잘했다는 말은 없었다. 엔티온은 원래 그런 인물이었다.

섭섭한 감정은 없다. 나는 그를 아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그에게 미안함을 가져야 정상이다. 왜냐하면 그의 부인인 엘라인은 이미 내 좆집이 되었으니까.

‘아, 엘라인 따먹고 싶다!’

나는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하하. 오랜만이구나. 동생아.”

젠트가 기분좋게 웃으며 말한다.

“네.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가 구김 없는 얼굴로 날 맞이하는 이유는 프루커스 가문 후계자 경쟁 중에서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 게 그이기 때문이다. 그는 엔티온과 함께 행동하며 국경지대에서 일어나는 전투에 항상 참가하고 있다.

나는 힐끗 공주와 왕자의 행태를 살폈다. 아일린 공주는 엔티온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있다. 엔티온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으면서 공주를 상대해주고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정치에 관심 없는 그는 아일린 공주의 말에도 무덤덤하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왕자는 변경백 앞에서 긴장했는지 눈치만 보고 있다. 이놈은 일반 귀족 앞에선 잘난 체를 하면서 대귀족들의 앞에선 기도 못쓴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이다.

젠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웃는 얼굴이 퍽 재수 없었다.

“네 소문이 여기까지 들려오더구나.”

“귀는 밝으신가 보군요.”

“네가 왕자의 편에 섰다고 들었다. 난 네가 그리 정치에 관심 있는 줄 몰랐다.”

“나라의 일입니다. 한 명의 귀족으로서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아무래도 좋다고 하셨지만, 난 아니다. 왕의 가신이 되고 싶다면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고 수도로 가거라. 형제 좋다는 게 무엇이냐. 내가 널 지원해주마.”

“형님. 왜 그러십니까. 후계자 경쟁은 이제 막 시작했을뿐입니다.”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다. 네가 왕자 밑에서 알랑방귀를 뀌고 있을 때, 나는 서른 번이 넘는 전투를 치렀다. 내가 죽인 적의 숫자만 해도 백은 족히 넘는다. 넌 시작부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 정도의 차이가 벌려졌으니 전혀 날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하하. 그렇습니까. 그럼 아버지께 한 번 물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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