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3화 〉 693. 뱅가드 - 외계침공
693. 뱅가드 ? 외계침공
레이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 유진.”
나는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고위층에 배반자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원작 영화에서도 언급되었고, 외계인들이 멍청이도 아니고 내부의 간자를 심거나, 고위층을 회유하는 전략을 쓰지 않는 건 말도 안 된다.
“뭘 망설이는 거야? 지구는 이미 가망이 없어.”
원작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없었다면 나도 그녀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브락타시아는 말도 안 되는 거리를 단숨에 좁힐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외계 문명이다. 브락타시아의 입장에서 지구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문명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지.
하지만 외계 침공은 실패한다.
성공한다면 모를까. 실패하는 줄을 잡을 이유는 없었다.
“레이시. 너야말로 이쪽으로 와.”
나는 역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내게 브락타시아를 배신하라고?”
“맞아. 결국, 지구는 대침공까지 막아 낼 거야.”
“머리가 돌아버린 거야? 오플의 요원이니 브락타시아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너도 알고 있잖아.”
“침공에서 놈들은 기술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해. 워프를 통해 가져올 수 있는 무기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브락타시아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수천억 광년이 떨어져 있어 특수한 워프가 아니면 지구에 올 수 없다는 것부터, 지구 파괴가 아닌 지구 점령의 목적, 브락타시아 내부의 정치 상황 등등.
종합적으로 지구의 입장에선 브락타시아가 암울하긴 해도 이겨내지 못하는 상대는 아니었다. 지구에는 특수한 힘을 가진 히어로들이 존재했으니까.
“그래도 지구는 질 거야. 차이가 너무 심하니까. 난 도저히 네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
“내가 좀 남들과 다르긴 하지.”
“마지막으로 말할게. 내 손을 잡아. 유진.”
“나도 다시 마지막으로 말하지. 내 손을 잡아. 레이시. 지구는 이길 거고,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지구가 이길 가능성은 없다니까! 히어로라도 브락타시아를 감당할 수 없어! 지구의 미래는 브락타시아의 식민행성이 되는 것뿐이야!”
레이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으로 말한다더니 나를 포기하지 못했다. 역시 내 좆집 다웠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솔직하게 말해. 넌 인류를 배반하고 싶지 않잖아.”
난 레이시의 성격을 알고 있다. 그녀는 다소 오만하고, 난폭한 면이 없지 않아 있으나 구제불능 수준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어. 노예로 살 바엔 차라리….”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브락타시아의 침공은 실패하고 지구는 이길 거야.”
“……책임질 수 있어?”
“응?”
“날 책임질 수 있냐고.”
“뭘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레이시에게 입을 맞추었다. 한동안 진한 키스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던 도중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레이시가 말한 안전한 곳은 브락타시아. 다시 말해 그녀는 대침공 전에 브락타시아로 떠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레이시! 네 도움이 필요해!”
???
나는 상층부에 보고와 제안을 했다.
인류의 배반자를 통해 브락타시아 행성으로 이동해 내부에서부터 파괴 공작을 벌이는 것이다. 상층부는 긍정적으로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성공만 한다면 브락타시아에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까.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가 직접 나서게 되었다.
‘…이건 의외인데.’
원래 내 계획에서는 히어로 중 한 명이 브락타시아 행성으로 가는 것이었다. 강력한 힘을 가진 히어로여야 성공 확률이 더 높으니까.
하지만 상층부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 잠입 임무는 힘보다는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내게 임무를 하달한 것이다. 내가 계획을 제안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 일 것이다.
‘젠장. 괜히 나섰어. 이런 짓 안 해도 히어로들이 어련히 잘 막을 텐데.’
나는 임무를 수락했다. 계획을 세운 건 나였고, 이 계획에 성공하면 내 미래는 보장된다. 뭐,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으면 퀘스트는 완료되니 큰 이득은 없겠지만.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원작에선 없는 나라는 변수의 나비 효과로 인해 침공을 막지 못할 수도 있지.’
그러므로 직접 나서기로 했다.
나는 레이시와 배반자들과 함께 약속된 장소로 움직였다. 배반자들은 대부분 사회의 고위층이었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군. 설마 자네가 내 딸과 교제하고 있었을 줄이야.”
레이시의 아버지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웃으며 그와 악수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내가 받은 임무를 전혀 모른다.
“나는… 아니, 우리는 자네의 선택을 환영하네.”
배반자들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빠짐없이 기억했다. 임무가 끝나고 체포할 놈들이었다. 놈들은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할 것이다.
총 20명이었는데 우리는 모두 버스를 타고 한 번에 움직였다. 버스가 도착한 장소는 산이다. 그것도 사유지의 산. 버스는 곧 어두컴컴한 통로로 들어갔다. 우리는 통로 깊숙한 곳에서 내려 지하로 들어갔다.
레이시는 내 손을 꽉 잡고 걸었는데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지구를 위해 제 아버지를 배신했다. 이런 일도 처음이니 계획이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겠지.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쥐며 조용히 속삭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 다 잘 풀릴 테니까. 평소대로 행동해.”
“아, 알고 있어.”
지하 계단을 다 내려오자 넓은 공간이 우리를 반겼다. 그곳에 브락타시아인과 브락타시아 행성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가 있었다.
브락타시아인은 고블린과 비슷한 외형이었다. 다만 피부는 초록색이 아니라 회색이었고, 지능은 고블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하하하. 우리의 동지들이 오셨군!”
브락타시아인이 웃으며 말했다. 배반자들은 웃지 못했다. 저 말투에 담긴 비아냥거림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으니까.
레이시의 아버지가 앞으로 나섰다.
“우린 그대들의 계약을 이행했소. 이제 그대들이 계약을 이행할 차례요.”
“크크. 걱정마라. 너희는 안전할 것이다. 자, 워프 게이트를 가동해라!”
브락타시아인들이 바쁘게 움직여 워프 게이트를 가동시켰다.
“이 게이트를 지나면 너희가 당분간 지낼 장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계약의 다른 보상은 전쟁이 끝난 후에 지불해주지.”
“믿겠소.”
긴장을 유지한 채로 워프 게이트의 안으로 들어갔다.
“크크크크.”
“키키킥.”
주위의 브락타시아인들이 우리를 보며 웃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배반자들은 입을 꾹 다물고 무시했다. 여기서 발끈해봤자 불이익만 얻을 뿐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워프 게이트에 발을 내디뎠다. 순간,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다리는 이미 땅을 밟고 있었다.
무심코 숨을 들이마셨다.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느낌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둡고 축축한 방이었다. 정면에는 창살이 가로막고 있다. 브락타시아의 뛰어난 과학 기술과 다르게 정말 원시적인 감옥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감옥에 들어온 것이다.
“낄낄. 멍청한 지구인 놈들.”
창살 너머에 브락타시아인이 웃고 있다. 허리춤에는 장난감처럼 생긴 하얀 총을 무장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오! 계약과 다르지 않소!”
“크크. 머저리 놈들. 우리가 왜 너희 같은 미개한 것들의 약속을 지켜야 하지?”
“우리는! 브락타시아의 왕자와 계약했소!”
“그 왕자님의 명령이시다. 너희는 전쟁이 끝나고 적당한 날에 처형할 것이다. 그때까지 얌전히 이곳에 있어라. 크크크.”
“브락타시아 왕자를! 브락타시아 왕자와 대화하게 해주시오!”
“주제도 모르는 것들. 왕자님은 너희가 만나고 싶다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돌아오시오! 이건 계약이 다르오!”
“크크. 머저리들.”
브락타시아인은 떠났다.
감옥에 남게 된 이들은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레이시의 아버지는 창살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쳤으나,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약속한 것과 다르지 않소!”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인류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을…!”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젠 다 끝이야…. 놈들은 우릴 고통스럽게 죽일 테니 그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감옥 안은 혼란스러웠다. 레이시의 아버지는 최대한 사람들을 다독이려고 했다.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그는 사람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니.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는 없을 질 것이다.
나는 내 옆에 있는 레이시의 허리를 잡았다. 그녀도 눈동자가 흔들리며 동요하고 있었다.
“진정해. 레이시.”
“유진…. 일이 틀어졌어. 이건… 이건 아니야….”
“기회는 있을 거야. 진정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브락타시아의 입장에서 지구에 있는 자들과 우리나 다를 바 없었다. 살려두는 것보다 죽이는 편이 여러모로 훨씬 낫다. 굳이 우리를 살려 둘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레이시를 다독이며 상황을 살폈다.
‘창살. 깨끗한 걸로 봐선 급조해서 만든 감옥이군. 특별한 기술이 들어가지 않은 걸 보니 우릴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군.’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창살을 부러뜨릴 수 없다. 하지만 난 다르다. 내 힘이라면 저 창살 정도는 부러뜨릴 수 있다.
‘그리고 챙겨온 물건들도 있지.’
브락타시아인들은 우리의 소지품은 전혀 검사하지 않았다. 이해는 간다. 놈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짐승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나는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를 매만졌다. 도로시가 만들어준 마법 주머니다. 여기에 있는 물건들을 잘 사용하면 브락타시아에 혼란을 줄 수 있다.
‘성가신 건….’
감옥 천장에 달린 CCTV와 감옥 근처를 순찰하고 있는 깡통 로봇이다.
‘지금 당장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겠어. 기다렸다가 기회를 엿봐야 해.’
일이 꼬였다. 하지만 기회는 생길 것이다. 나는 조용히 그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
예상했던 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기분은 점점 예민해졌다. 사소한 일로 다투기 시작했고, 다툼은 곧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다만 절반 이상이 아직 냉정함을 지키고 있었기에 큰 사고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내 정체를 저들에게 알리면 안정시킬 수 있겠지만… 믿을 수가 없어.’
나는 내 정체를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인류를 배반한 자들이다. 여기서도 배신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묵묵히 기회를 기다렸다. 다행히도 브락타시아인들은 음식을 챙겨줬다. 더럽게 맛없고 재료가 수상쩍은 음식들이었으나 배를 곯지는 않았다.
열흘이 지났다. 기회가 왔다. 감옥 바깥이 유독 소란스러웠다. 브락타시아의 대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법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감시 카메라를 갈겼다.
타앙!
카메라가 부서졌다. 원래라면 간수가 확인을 위해 이쪽으로 올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을 것이다.
모두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본다.
“자, 자네. 총은 어디서 났나?”
“비밀입니다. 그것보다 탈출할 준비나 하십시오.”
“탈출? 웃기는군. 고작 총 한 자루로 탈출할 수 있다고 보나? 여긴 지구가 아니라 브락타시아 행성이다.”
구석에 짱 박혀 있던 중년 남자가 말했다. 우리에게 희망은 없으니 시급히 자살해야 한다고 하루에도 열 번 이상 의견을 주장하던 놈이었다.
나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창살을 잡았다. 힘을 주어 옆으로 당기자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창살이 벌어진다. 금세 사람 하나쯤은 나갈 수 있는 공간이 벌어졌다.
“포기하고 여기에 있겠다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 봤자 결국 죽을 뿐이란 걸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탈출 시도 정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창살 밖으로 나섰다. 억지로 데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놈들에게 한 방 먹이고 죽을 거야.”
레이시가 표독하게 말했다. 그녀를 시작으로 한 명씩 나를 따라 감옥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5명은 감옥 바닥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포기한 것이다.
나는 내 뒤를 따르는 14명에게 말했다.
“저만 잘 따라오시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지휘를 잘 따라주십시오.”
“알겠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을 표하는 이들은 없었다. 내가 특별한 인간이란 걸 창살을 맨손으로 부러뜨린 시점에서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