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05 - 705. 아카데미의 구원자 (485/2,000)

〈 705화 〉 705. 아카데미의 구원자

705. 아카데미의 구원자

낡은 호텔 앞에 도착했다.

나는 나흘 동안 모카를 시켜 저 낡은 호텔을 감시했다. 내게 정체를 들켰으니 하던 일을 접고 도망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내 걱정은 기우였다. 놈은 내 존재를 비웃듯이 그 자리에 머물려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자신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아마 혼자 하는 일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몸을 긴장시키며 손에 단검을 쥐고 차에서 내렸다. 내 분위기도 읽은 사라도 굳은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손에는 찌르기에 특화된 레이피어가 들려있었다.

“저, 유진 님. 위험한 곳이라면 협회에 지원을 요청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사라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곳의 심상치 않은 음산함을 느낀 모양이다.

“안 돼. 우리끼리 할 수 있어.”

“…….”

사라는 처음으로 어린애를 보듯 날 쳐다봤다. 치기 어린 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 고집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는 사라는 날 설득하려는 걸 포기하고 레이피어를 되잡으며 내 앞에 섰다.

“그런데 저 호텔에 뭔가 있습니까? 정령안으로 뭘 보신 겁니까?”

“모르겠어? 바람이 느껴지지 않아?”

“그러고 보니 여긴 유독 강하게 바람이 부는군요.”

“시카고의 바람은 모두 호텔로 향하고 있어.”

그녀는 심각해졌다. 내 말이 맞다면 현재 시카고에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니까.

“바람의 정령과 관련된 일입니까?”

“맞아.”

나는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사라에게 설명했다. 내 말을 듣는 사라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바람으로 마나를 끌어와 인위적으로 만드는 용혈과 정령을 타락시킨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일단 물러나서 협회에 보고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로 충분하다니까 그러네.”

호텔을 향해 걸어갔다. 휴대폰을 손에든 사라가 당황하며 내 뒤를 따른다. 기어코 협회에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다.

‘내 뜻을 무시해? 나중에 좆으로 혼내 줘야겠군.’

뭐, 상관없다.

협회의 히어로가 연락하면 바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대충 10분 이내에 놈을 죽이면 될 것이다.

‘우선 결계부터 찢는다.’

결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직 완전히 파악한 것도 아니고, 그 이후로 결계에 무슨 수작을 부려놓았을지 알 수 없다. 놈의 유리한 공간은 일찌감치 없애는 게 낫다.

“모카.”

“꾸우욱!”

소환된 모카가 실체화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안 그래도 새하얀 몸인데 어두운 하늘이라 그런지 눈에 잘 띄었다.

연결을 통해 모카에게 마나를 흘려보낸다. 파지지직. 모카의 몸에서 뇌전이 튀겼다.

‘쳐.’

모카의 힘으로 강화된 굵은 벼락이 호텔을 향해 내려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호텔과 겹쳐져 있는 결계에.

호텔 벽이 산산 조각나고 결계의 일부도 벼락에 찢겨 나갔다.

움찔.

사라가 몸을 떨었다. 찢겨 나간 결계의 일부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가 새어 나온 것이다.

“유진 님! 이건…!”

“…한 번으로는 부족했나. 모카. 한 번 더.”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찢긴 결계 틈에서 놈이 직접 밖으로 나온 것이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동양인. 그는 안경 속의 차가운 눈으로 스윽 주위를 둘러본 뒤 우리를 쳐다봤다.

“너희가 전부냐?”

“이곳에서 네가 벌이는 짓을 알고 있다. 투항해라. 거기서 무릎 꿇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

사라가 레이피어를 남자에게 겨누며 쏘아붙였다.

“경찰은 아닐 테고 협회인가? 어처구니가 없군. 겨우 둘. 그것도 한 명은 애새끼. 나를 막기엔 한참 부족한 전력이다.”

“부족한가, 아닌가는 두고 봐야 알겠지.”

키이이이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라의 레이피어 검날에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사라는 남자가 있는 방향을 향해 레이피어를 연속으로 찔렀다. 레이피어에서 빛이 발사되어 남자를 향해 날아간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부채를 꺼내 펼쳐 휘둘렀다. 검은 방어막이 나타나 빛의 찌르기를 모조리 막아낸다. 어둠이 빛을 먹어치우는 것 같은 모양새다.

“하찮다.”

남자가 접고 휘둘렀다. 부채 끝에 어둠이 쭈욱 늘어나더니 채찍이 되어 나와 사라에게 떨어졌다.

“피하십시오!”

사라가 외쳤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나는 그가 부채를 접었을 때부터 피할 준비를 끝냈다. 검은 채찍이 바닥을 강타한다. 사라는 알아서 잘 피했다.

‘A급이라 하기엔 약하고 사라와 비슷한 B급 수준이군.’

그렇기에 저 남자가 가진 오만함이 이상했다.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저 부채인가? 아니야. 좀 특별한 물건 같긴 해도 어디까지나 사용하는 무기에 불과해. 설마 바람의 정령이 벌써 타락한 건 아니겠지?’

사라는 내가 멀찍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빛의 참격이 남자를 향해 남자를 향해 날아간다. 남자가 부채를 펼쳤다. 채찍이 사라지고 방어막이 그를 보호한다.

‘저 부채의 능력은 대충 알겠어.’

전투는 사라가 불리하다. 사라의 원거리 공격은 통하지 않고, 접근하려고 하면 채찍의 특성이 발휘한다. 무척 넓은 범위를 궤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공격한다.

‘사라를 견제하면서도 날 힐끔거리고 있군.’

아마 내가 정령사라는 걸 대충 눈치챘겠지.

‘모카. 벼락이다.’

모카에게 명령을 내리고 검지를 놈에게 겨누며 삿대질을 했다. 파지지지직. 검지 끝에 시퍼런 뇌전이 모여든다.

모카와 나는 동시에 번개를 쏘았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사라는 그의 움직임을 잘 제한해주었다. 남자가 하늘을 향해 부채를 펼쳤다. 그는 내 공격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막는 선택을 했다. 정령의 공격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옳은 판단이야. 내 번개보다 정령의 힘이 들어간 모카의 벼락이 더 강하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쏘는 번개가 무시당할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다.

“크아아아아아악!”

내가 쏜 번개에 맞은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B급이라 평가한 건 취소해야겠군. 이놈은 C급이야.’

B급이었다면 고작 번개 한 방에 무릎 따윈 꿇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단검을 역수로 쥔채 놈에게 다가갔다. 목을 그어버릴 생각이었다.

“…너는 누구냐?”

놈이 날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는 넌 누군데.”

“나는 귀락곡(鬼落谷)의 왕시엔이다.”

“뭐?!”

그에게 다가가던 내 걸음이 멈췄다.

귀락곡.

중국 어딘가에 있는 세력이다. 원작에서도 나오는데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빌런 집단 중 하나로 꼽힌다. 구목교도 함부로 볼 수 없는 세력이 귀락곡이다.

“귀락곡?! 맙소사! 너희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사라가 발악하듯 외쳤다. 이성을 잃은 듯한 모습이다. 그럴 만도 했다. 귀락곡은 역병같은 존재라는 말이 존재하니까.

허나 왕시엔은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고 오직 나를 노려봤다.

“그 황금의 눈동자는 정령안이군.”

“눈동자 색만으로 알아차렸다고?”

“정령사가 가진 특수한 눈. 알아보지 못하는 쪽이 멍청하지. 네 정체가 뭔지도 알겠군.”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정체가 들켰다고 해서 귀락곡이 당장 내게 뭔가를 할 수는 없다.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마찬가지다. 귀락곡은 현재 힘을 쌓느라 바쁠 테고, 내 뒤에 있는 성하리와 진령성가(眞靈成家)를 무시하지 못하니까.

“부럽군.”

왕시엔은 손을 들어 안경을 잡았다.

“나는 이 안경이 없으면 정령과 사령도 볼 수 없는 반푼이에 불과하지. 허나 넌 아니군. 정령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볼 수 있겠지. 부럽다. 너의 재능이 정말 부럽군.”

“……!!”

그에게서 음산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강한 기운이다.

“유진 님!”

사라가 내 앞으로 뛰어와 레이피어를 세운다.

왕시엔은 그런 우리를 보다가 주머니 속에서 황금색 방울을 꺼냈다. 그가 방울을 잡고 흔들었다.

딸랑. 청명한 방울 소리가 울린다.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너무 깨끗한 소리에 잠깐 신경이 팔렸다.

“나와라. 나와서 모조리 죽여라.”

왕시엔의 뒤에 있는 결계 속에서 시체들이 튀어나왔다. 창백한 피부에 흰자를 번뜩이며 사방으로 뛰쳐나간다. 그 숫자는 백이 넘는다.

‘좀비…. 아니, 강시인가.’

그중 일부는 우리를 향해 뛰어온다. 사라가 내 앞에 막아서며 강시 넷을 동시에 상대한다. 평범한 강시는 아닌 듯했지만, 빛을 사용하는 그녀는 강시와 상성이 좋았다. 나는 강시를 피해 그녀의 뒤에 가만히 섰다. 내가 상대하기엔 강시 쪽의 신체 능력이 더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죽여야 하는 건 한 놈이다.

‘왕시엔! 이 새끼 도망친다! 모카!’

모카가 강시의 등에 탄 왕시엔을 뒤쫓는다. 강시는 분명 두 다리로 달리고 있는데 어찌된게 바이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장소를 벗어나고 있다.

‘모카 몸통 박치기.’

모카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파지지직. 번개가 모카의 몸을 휘감았다.

모카는 쏘아진 포탄처럼 왕시엔을 향해 날아갔다. 왕시엔은 모카와 부딪히기 직전 부채를 내던졌다. 부채가 검은 폭발을 일으키며 모카의 한쪽 날개를 찢어버린다.

‘젠장. 아까 무리를 해서라도 죽였어야 했는데.’

나는 모카를 소환했다.

“꾸욱 꾹….”

모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해두었던 정령옥을 모카에게 먹였다. 모카의 찢겨나간 날개가 빠르게 회복한다. 그래도 당장 움직이는 건 힘들어 보인다.

“유진 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강시 네 마리를 처리한 사라가 바닥에 무릎 꿇고앉아 내 몸을 살펴봤다.

“난 괜찮아. 그것보다 협회에 알리지 않아도 돼?”

“아….”

사색이 된 그녀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거의 100마리에 달하는 강시들이 시카고 전역으로 퍼졌다. 당분간 시카고는 지옥이 될 것이다.

‘그것보다 바람의 정령은 어떻게 된 거지?’

열정적으로 통화하는 사라는 내버려두고 결계 안으로 걸어갔다.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덮쳐왔다. 벽에 붙어 있는 부적들을 힐끔 보고 결계의 중심으로 걸어간다.

바람의 정령은 여전히 결계에 묶여 있었다. 전에 봤을 때와 다르게 정령체는 불안정하지 않았다. 대신 시커먼 것들이 정령의 형태를 붙잡고 있다.

‘이미 거의 타락했군. 어떻게 해야 하지?’

결계를 박살 내고 풀어봤자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이놈을 밖에 풀어주는 꼴만 되겠지.

‘죽이면 선 카르마가 오르려나?’

100% 완전히 타락한 건 아니라서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주머니에서 정령옥을 꺼냈다. 어쩌면 정령옥으로 바람의 정령을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정령옥을 본 바람의 정령의 반응이 거칠어졌다.

“역시 너도 정령옥을 원하는군. 옛다, 하나 주마. 먹어라.”

정령옥을 던졌다. 그러자 시커먼 입 같은 것이 나타나 정령옥을 꿀꺽 삼켰다.

나는 기대를 가지고 바람의 정령을 지켜봤다.

바람의 정령을 중심으로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면서 바람의 정령을 주시했다. 바람의 정령이 점점 커진다.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오히려 완벽하게 타락한다. 결계 안에 있던 부적들이 바람에 날리며 찢어진다. 결계가 점점 무너지고 있다. 위험하다고 느낀 나는 결계에서 물러났다. 지금 내겐 저 바람의 정령을 죽일 방법이 없었다.

“유진 님!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타락한 바람의 정령이 풀려나기 시작했어.”

나는 긴장한 얼굴로 호텔 쪽을 쳐다봤다. 최악의 경우 여기서 유리아를 소환해야 할 수도 있다.

콰콰쾅!

결계가 부서지고 낡은 호텔이 박살 나며 바람의 정령이 나왔다. 아니, 정령이 타락했으니 마령(魔靈)이라 일컫는 게 정확할 것이다.

부서진 호텔 위로 마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의 작은 짐승을 닮은 형태였는데 온몸이 쉬지 않고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맙소사….”

사라가 경악했다. 마령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 앞에서 레이피어를 들었으나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

마령은 내 쪽을 쳐다봤다. 그러나 말을 걸지도, 달려들지도 않았다. 마령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죽여버리겠다! 왕시엔!!

마령은 왕시엔을 찾아 시카고의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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