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8화 〉 708. 아카데미의 구원자
708. 아카데미의 구원자.
검은 공간을 30초 동안 떨어져 내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세계가 나타났다.
우중충한 하늘과 비릿한 금속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공간에서 나온 우리는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소희 누나.”
“으, 응?”
두 눈을 뜬 한소희가 주위를 보고 놀란다. 사라는 이미 자신이 쿠션들 되기로 결심한 듯 우리의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이 정도 높이라면 쿠션으로서의 효과는 전혀 없겠지만. 아래쪽에는 심지어 딱딱한 철로 만들어진 도시였다.
“이대로 가면 죽을 거야. 마법 써. 마법.”
“자, 잠시만.”
한소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는 가진 능력이 배리어(S) 뿐만이 아니다. 마법(A) 스킬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녀의 능력은 전투 보조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상황이 이래서 그런지 마법 발현이 좀 늦다. 점점 바닥이 가까워진다. 이러다가 고기 뭉치가 되어 나만 완전 회복으로 부활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돼, 됐어. 레비테이션!”
하늘에서 수직낙하 하던 우리는 점점 느려졌다. 에스컬레이터와 비슷한 속도다. 우리는 한소희의 마법 덕분에 무사히 지상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땅에 내려서자마자 알림창이 떠올랐다.
『특수 던전, 기계의 나라에 입장했습니다.』
『기계의 나라는 생명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계왕을 없애 기계의 나라를 무너뜨리십시오.』
“기계의 던전….”
“성하리 님이 들어가신 던전에 들어오다니… 맙소사….”
두 사람의 반응을 보아하니 던전 알림창이 뜬 모양이다.
‘던전 알림창의 경우 뜨는 곳이 있고, 안 뜨는 곳이 있는데…. 여긴 전자군.’
그나마 친절한 던전이다. 던전의 목적을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주니까.
나는 손으로 눈을 비비며 정령안을 해제했다. 노르덴을 죽일 때 전력으로 힘을 써서 그런지 몸이 피곤했다.
“여기가 하리 언니가 들어온 던전이라고요? 말도 안 되잖아요. 그 던전은 한 번 들어가면 입구가 사라지는 특수 던전이라면서요.”
“그렇긴 합니다만…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마령의 힘이 뭔가 영향을 끼친 것 같긴 합니다만….”
“…경이적인 일이네요. 억지로 특수 던전에 입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협회가….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이 던전이 S급 던전이라는 거예요.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던전 아우터를 가지고 있나요?”
“던전 아우터라니…. 그런 비싼 걸 개인으로 어떻게 가지고 다닙니까.”
“……그렇긴 하죠.”
던전 아우터.
출구가 없는 던전을 나가게 해주는 물건이다. 던전에서 가끔 발견되는 물건인데 그 가격만 해도 3,000억이 넘는다. 이 던전 아우터를 통해 던전의 정보를 미리 파악하는 게 가능해서 각국의 협회는 반드시 얻으려는 물건중 하나다.
“유진 님. 소희. 지금 가장 최선은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 성하리 님과 최대한 빨리 합류하는 일입니다. 이 던전은 S급. 아무리 소희 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살아남는 건 매우 힘든 일입니다.”
“사라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안전하게 합류할 방법이 있나요? 여긴 S급 던전답게 엄청나게 넓은 것 같은데….”
사라는 고개를 획 돌려 나를 쳐다봤다.
“유진 님의 정령안이라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유진 님. 뭔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미안한데 지금 당장은 정령안을 못 쓰겠어. 눈 아파.”
“제가 유진 님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우선 일단 안전한 곳에 숨어 있는 편이 좋겠습니다. 유진 님이 정령안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면 성하리 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추적에 있어서 내 정령안이 뛰어난 건 확실했다. 마나는 물론이고 바람까지 물리적으로 볼 수 있는데 말해 뭐하겠는가. 거기에 천둥부엉이 모카를 이용해 하늘 정찰까지 가능하다.
“숨을 곳은… 어디가 좋을까요. 바닥은 철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나마 저기에 있는 나무 숲이 보이는군요. 숲이 더 위험할까요?”
“아니요. 이 던전에선 숲이 더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말을 잇다 말고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뽑아 뒤쪽에 겨누었다. 어느 사이엔가 온몸이 강철로 된 은색 기계 고블린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계 고블린은 붉은 안광을 빛내며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침입자 셋 발견. 인간으로 확인. 기계왕법 제 7조에 의거하여 인간을 모두 제거한다.”
기계 고블린의 몽둥이 뚜껑이 열리고 구멍이 나타났다. 우리에게 겨누어진 구멍에서 레이저빔이 뿜어진다.
“배리어!”
한소희가 다급히 배리어를 펼쳐 기계 고블린의 공격을 막아냈다.
사라는 뒤늦게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에 있는 모든 몬스터는 기계 몬스터이기 때문입니다. 성하리 님을 모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기계 고블린은 공격이 계속 막히자 몽둥이를 버리고 양팔을 들어 올렸다. 소름 끼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양팔에서 나온 칼날이 회전한다. 고블린이 뛰어와 배리어를 향해 칼날을 휘둘렀다.
배리어는 몇 번 견디다가 깨지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사라는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기계 고블린을 노려봤다.
“모카.”
내 마나가 모카에게 빠져나간다. 내 의지를 받아들인 모카가 기계 고블린을 향해 번개 박치기를 시전했다. 효과는 뛰어났다. 박치기가 아니라 뇌전의 전류가 고장 낸 것이다.
“침입자… 제거… 제거… 제거 불가….”
고블린의 붉은 안광이 꺼졌다.
사라는 한숨과 함께 검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유진 님.”
“뭘. 그것보다 뒤로 가자. 진짜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제가 안아드리겠습니다.”
레이피어를 회수한 사라가 나를 공주님 안듯이 안았다. 나는 편하게 받아들였다. 얼굴을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묻고,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을 주물렀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들은 다른 기계 고블린이 나타나기 전에 숲으로 뛰어갔다. 모카는 낮게 날면서 우리의 뒤를 따라온다.
“배리어를 공격할 때의 느낌으로는 못해도 B급 몬스터로 보였는데 생각보다 약하군요.”
“아뇨. 소희가 느낀게 맞습니다. 기계 고블린은 B급 몬스터입니다. 마나를 두른 공격이 아니면 몸체에 흠집 내기도 힘들며, 불이나 얼음 등의 내성도 뛰어납니다. 다만, 전기에 대한 내성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미국 히어로 협회가 성하리 님을 부른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모카의 전격 덕분이었군요. 유진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사라. 이 던전에 대한 다른 정보도 필요해요.”
“제가 알고 있는 건 모두 알려드리겠습니다. …윽…. 유진 님. 조금만 살살 만져주실 수 없겠습니까?”
“알았어. 그 대신 벗길게.”
“네? 그, 나중에 하시면….”
“싫어.”
한소희의 한숨 소리를 뒤로하고 사라의 상의를 벗겼다. 정장 재킷과 셔츠를 입고 있어서 단추만 풀면 되는 일이었다. 화려한 검은색 브래지어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젖가슴을 주무르며 손가락에 걸리는 유두를 괴롭혔다.
‘나 혼자 던전에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가슴을 즐기던 도중, 뒤쪽에서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기계 곤충 세 개가 보였다. 사라와 한소희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기계라…. 상성이 좋아. 해킹.’
[해킹에 성공했습니다.]
[기계 곤충을 2분 동안 해킹할 수 있습니다.]
세 개 모두 해킹했다. 날아오던 기계 곤충들은 내 뜻에 따라 저들끼리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미사일을 쏘고 날개를 부딪치더니 뒤엉켜 바닥을 구르다가 떨어졌다. 기계 곤충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떨어진 소리에 사라와 한소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뭐, 뭐죠?”
“모르겠습니다. 일단 빨리 숲 속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사히 숲 속에 들어갔다.
???
콰직!
기계 트롤의 머리를 손으로 잡아 뜯어낸 성하리는 쓰러지는 기계 몬스터는 신경 쓰지도 않고 하늘을 쳐다봤다. 우중충한 하늘은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와 같았다.
‘방금 하늘에서 뭔가 떨어진 것 같았는데…. 기계 와이번이었나?’
바닥에 쓰러진 기게 트롤이 꿈틀거린다.
“하리! 방심하지 마!”
뒤에서 걱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하리는 담담하게 손에 든 창을 회전시키면 머리 없는 기계 트롤의 가슴팍에 창을 찔러 넣었다.
파지지지지지직!
번개가 튀며 기계 트롤의 몸을 감전 시킨다. 이후 과부하된 기계 트롤의 몸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기계 트롤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성하리가 뒤를 돌아봤다. 그녀를 제외하고 총 17명의 A급 히어로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피곤한 얼굴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여기까지 오면서 기계 몬스터를 500개 넘게 상대했다.
“괜한 걱정이었네. 수고했어. 하리.”
그녀에게 친한 척 말을 거는 건 에단 루스벨트였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이었다. 몸이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잘생긴 남자였다. 영화도 몇 편 찍은 연예계에 반쯤 속해 있는 남자였다. A급 히어로지만, 성하리가 보기엔 별 볼 일 없는 실력이었다.
성하리는 그를 무시하고 뒤쪽에 후드를 뒤집어쓴 작은 체구의 붉은 머리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정찰이 특기인 오퍼레이터였다.
“레이번. 기계왕의 위치는?”
레이번은 특성으로 만든 노트북을 두들겼다. 그는 던전의 정보를 노트북에 담아 정리하여 결과를 도출했다.
“아직 정보가 부족해. 단시간에 기계왕의 위치를 알아내기엔 이 던전이 너무 넓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컨대 잡것들을 상대하며 계속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이었다.
성하리는 기계 몬스터의 시체에서 강판이나, 전선 등의 기계 부품을 회수하는 히어로들을 보다가 레이번에게 말했다.
“아까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던데.”
“그래? 난 못 봤어. 플로라! 넌 뭐 봤어?”
레이번은 자신의 누이인 플로라를 불렀다. 한창 전리품을 챙기던 플로라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단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전투하느라 바빴는데 그럴 여유가 어딨어. 누구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본 사람?”
“바쁘다. 전리품이나 챙겨라. 플로라.”
돌아온 건 질타였다. 플로라는 그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강하게 혀를 차고 전리품을 회수했다.
레이번은 노트북을 두들기며 말했다.
“네가 잘못 봤을 리는 없을 테니 일단 기록은 해둘게. 떨어진 건 정확히 뭐야?”
“기계 와이번이지만…. 너무 멀어서 확신하진 못하겠어. 기계 와이번이 아닐 가능성이 커.”
“거리는?”
“대충 60Km.”
“대충 37마일이군. 그 먼 거리를 볼 줄이야. 눈도 좋으셔.”
“거기에 뭐가 있었지?”
“숲이 있었어. 얼핏 보면 쉬기 좋지만… 거기엔 사냥꾼이 있지. 이 던전 내에선 숲이라고 하더라도 안전하지 않아.”
성하리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쪽으로 가보고 싶어.”
“S급 히어로의 직감? 미안하지만 그쪽엔 기계왕은 없어. 오히려 돌아가게 되지. 우린 여기서 잠깐 쉬다가 다시 앞으로 전진할 거야. 내 오더가 불만이야?”
성하리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번의 오더 실력은 그녀도 인정하고 있었다. 던전의 함정에 걸리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레이번 덕분이다.
“불만은 아니야. 저쪽이 신경 쓰였을 뿐이지.”
“레이번. 하리가 신경 쓰인다는데. 나랑 하리가 빠르게 갔다 올까?”
에단이 끼어들었다. 레이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성하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에단. 쓸데없이 나서지 말라고 던전에 오기 전에 말했을 텐데.”
“하하…. 난 네게 관심 있어서 하는 말이야. 호의는 호의로 받아 달라고.”
“필요 없는 호의만큼 짜증 나는 건 없으니 집어치워.”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말고. 같은 동료잖아. 친하게 지내자고.”
“하, 동료? 여기서 가장 약한 주제에.”
“…….”
성하리가 에단을 비웃은 뒤 떠났다. 에단은 침묵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레이번을 쳐다봤다.
“성하리는 다시 봐도 매력적이지 않아?”
“저 미친년이 매력적이라고? 저 여자가 미국에 한 일을 알고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물론 나도 들었으니 알아.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
“그녀 앞에서 그딴 말은 내뱉지 마. 널 위한 충고야.”
“알아. 나도 이 나이에 죽고 싶진 않다고. 그런데 하리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사실이야. 좀 도와주지 않을래?”
“그녀에겐 10살짜리 애도 있어.”
“하리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지.”
레이번은 얼굴을 구겼다. 짜증과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분란은 사절이야. 공략에나 집중해.”
“에이. 너무하네.”
한편, 성하리는 창을 품에 끼고 강철 벽에 등을 기대며 아까 무언가가 떨어진 쪽을 쳐다봤다. 높은 기계 도시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눈에 마나를 집중해 시력을 높여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아.’
그녀는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왠지 모르게 몸이 근질거렸다.
‘유진이 보고 싶다.’
아들을 하루 넘게 보지 못한 그녀는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유진이 대딸해 줄 시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