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4화 〉 714. 아카데미의 구원자
714. 아카데미의 구원자
공략대의 흔적을 발견한 우리는 의욕을 내며 이동했다. 거의 이틀 동안 쉬지 않고 흔적을 쫓았다.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기계 몬스터가 보이면 피하지 않고 전투를 벌여 박살 냈다. 전투가 힘들더라도 공략대의 흔적을 두고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틀이 더 지나자 의욕도 사그라들었다.
“하아. 흔적을 발견하고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는데 여전히 공략대가 보이지 않는다니…. 대체 공략대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겁니까?”
사라가 한탄했다.
“근본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략대는 정말 여기 지하로 어딘가에 있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가 지하로를 헤매는 동안 공략대는 지상으로 올라갔을지도 몰라요. 엇갈렸을 경우를 생각해야 해요.”
“…….”
플로라는 팔짱을 끼며 한소희의 의견을 들었다. 반박하지 않는다는 건 한소희의 말이 허무맹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모카로 거의 온종일 정찰하는데 끝이 안 보여.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어?”
내가 쐐기까지 박았다.
플로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여기에 없을지도 몰라. 공략대에는 레이번이 있으니… 무언가 단서를 찾아서 지상으로 올라갔을 수도 있어. 그래도 우리가 지상으로 올라가는 건 좋은 의견이 아니야. 우린 아직 지하로를 다 둘러보지도 못했어.”
“플로라 씨는 이 넓은 지하로를, 더군다나 미로처럼 이리저리 꼬여있는 곳을 단 며칠 만에 전부 둘러볼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전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소희의 말이 맞습니다. 플로라. 지상이 위험한 건 압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너무 답답합니다. 아예 지하로를 벗어나자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상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에겐 유진 님과 모카가 있습니다. 지상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이 지상의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말은 잘하네. 솔직히 나는 공략대가 아직도 지하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너희들의 의견과 추측은 타당해. 좋아. 지상에 잠깐 올라갔다가 정찰한 뒤에 아무것도 없으면 다시 지하로 내려오자.”
우리는 다시 움직였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공략대의 흔적뿐만이 아니라 지상으로 올라갈 입구도 함께 찾는 것이었다.
입구는 쉽게 찾았다. 지상은 일부러 찾아다녀야 했지만, 지하로에선 일정 거리마다 출입구가 나왔다. 우리는 적당한 출입구를 정하고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긴장하며 걸었다. 계단에서 싸우는 건 최악이었기에 제발 몬스터가 나오지 않기를 빌었다.
앞장서서 올라가던 사라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앞에 철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은… 왠지 고급스럽습니다.”
우리도 문을 확인했다.
그녀의 말대로 앞에 철문이 있었다. 3M가 넘는 크기에다가 철문 표면에는 날카로운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온다.
지금까지 보아온 이 던전의 건물들과 다르다. 건물들은 웅장했지만 이런 사소한 디테일은 없었다.
‘이 문만 특별한 건가? 아니면 다른 곳도 똑같나?’
어쨌든 중요한 건 문의 화려함이 아니었다.
사라는 양손을 내밀어 문을 밀었다.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곳은 기계로 가득 찬 곳이었다. 곳곳에 불빛이 번쩍번쩍거리고, 둘레와 길이가 제각각 다른 전선들이 징그럽게 모여 있다. 어지럽다면 어지럽고, 정리되었다면 정리된 곳이었다.
“와. 인간이다. 지하에서 찾아올 줄이야. 너희는 운이 좋구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소 발랄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었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사라가 레이피어를 손에 들고 물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적을 경계했다.
“나는 마키나야. 아, 너희의 정체는 알고 있어. 플로라, 사라, 한소희, 성유진. 맞지?”
한소희가 내 뒤로 움직였다. 우리의 이름을 알고 있는 점이 수상스러운지 배리어를 펼칠 준비를 했다.
“마키나라고 했지? 정체가 뭐야? 어떻게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거야?”
“플로라는 질문이 많네. 하나씩 대답해줄게. 나는 마키나고, 정체는 인공영혼이야. 너희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내가 기계들로부터 정보를 받기 때문이야.”
“기계들로부터 정보를 받는다…? 이해가 안 돼. 정보가 있다면 왜 이용하지 않는 거지? 그 정보를 가지고 이용했더라면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애초에 탑에 유배된 내게 그럴 권한도 없고, 기계왕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없어.”
“…탑?”
나는 며칠 전 모카를 통해 지상을 정찰했을 때를 떠올랐다. 이 던전에 있는 7개의 거대 건물 중 하나가 높게 치솟은 기계탑이었다.
“여기에 오면서 탑이랑 성, 공장을 봤지? 공장은 기계 몬스터를 만들고, 성은 기계의 보관고야. 이곳, 탑은 기계를 통제하는 곳이지. 하지만 통제권은 내가 아닌 기계왕이 가지고 있어. 지금에 와서 이곳은 나를 가두고 있는 감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우리는 마키나의 말은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키나가 적대적이지 않다는 건 알겠다. 마키나가 적이었다면 곧장 공격해왔을 것이다.
“마키나. 모습을 드러내.”
플로라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 난 탑 꼭대기에 갇혀 있어. 내가 보고 싶으면 탑의 위로 올라와.”
불빛이 반짝거리며 위로 올라가는 길을 안내해준다.
무심코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한소희가 나를 붙잡았다.
“여러분. 이건 함정일지도 몰라요.”
“소희. 저 마키나라는 인공지능… 아니, 인공 영혼이 우리를 죽이려 했다면 이미 죽이지 않았겠습니까?”
“사라의 말이 맞아. ……설령 사라의 말이 틀리더라도 올라가서 마키나의 정체를 확인해야 해. 어쩌면 마키나는 진짜 기계왕일지도 모르니까.”
“소희 누나. 도망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아.”
나는 뒤쪽 입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지하로 향하는 철문은 소리 없이 닫혀 있었다. 우리에겐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다. 억지로 문을 열고 나가거나, 아니면 위로 올라가거나.
???
“꾸욱. 꾹.”
모카가 먼저 위로 올라갔다. 정찰이었다. 나는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주위를 살폈다.
“위험해 보이는 건 없어. 적어도 내 눈에는.”
우리는 조심스럽게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플로라 씨. 마키나는 기계로부터 정보를 받는다고 했어요. 그 말은 공략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 돼요.”
한소희가 말했다. 마키나는 우리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었다. 공략대에 대해서도 거의 100% 알고 있을 것이다.
“맞아. 그러니 최우선순위는 공략대의 정보를 얻는 거야. 그리고….”
플로라가 말끝을 흐렸다. 마키나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의 뒷말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키나가 위험할 것 같으면 없앤다.
‘인공 영혼이라고 했지. 만들어진 영혼인가? 아니면 인공지능? 인공지능이라면 해킹이 통할 가능성이 큰데….’
애매하다. 시도를 해봐야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더 이상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었다. 기계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중심에는 유리에 감싸여있는 동그란 코어가 있다.
위우우우웅.
코어가 파랗게 빛나더니, 그 위에 홀로그램 인간이 나타났다. 검푸른 머리카락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외형은 제법 꼴리는데 결국은 홀로그램이었다. 만질 수도 없는 존재다.
“잘 왔어. 이게 내 본체야. 예쁘지?”
“예쁘네.”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 플로라가 앞으로 나섰다.
“우릴 여기에 부른 건 이유가 있겠지?”
“응. 난 이곳을 나가고 싶어. 탑에 갇혀 있는 건 답답해. 내가 밖으로 나가게 너희들이 도와줘.”
“…우리가 뭘 믿고 널 도와야 하는데?”
“난 너희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어. 공략대라고 했던가? 기계왕과 싸우고 있는 인간들을 찾고 있지? 난 그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어. 날 도와주면 공략대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게. 덤으로 기계왕에 대해서도. 너희 입장에선 엄청난 이득이지 않아?”
플로라는 한 차례 우리를 돌려보다가 마키나에게 말했다.
“…좋아. 우리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네. 단, 우리의 안전은 보장해야 할 거야.”
“위험한 일은 아니야. 내가 너희의 도움이 필요한 건 손발이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너흴 공격할 생각이 없어. 기계는 인간과 다르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믿어도 돼.”
마키나는 나를 제외한 그녀들을 부려 먹기 시작했다. 나는 어려서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작업에서 제외되었다. 마키나가 시키는 일은 탑의 곳곳을 만지는 일이었다. 시키는 일에 따라 1층까지 내려갔다 오는 경우도 많았다.
“사라! 그 전선이 아니라 오른쪽에 있는 굵은 전선이야! 그 전선을 끊으면 돼! 플로라! 눌러야 하는 버튼을 까먹지 마! 소희는 잘하고 있어!”
나는 팔짱을 끼고 홀로그램을 쳐다봤다. 인공지능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잘 만들어졌다.
“넌 진짜 정체가 뭐냐. 인공 영혼? 영혼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게 가능한가?”
“나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네. 조금 가르쳐주자면, 난 기계왕의 영혼으로 만들어졌어. 기계왕은 인간과 기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영혼이라고 판단 내렸어.”
“누가?”
“나와 기계왕의 창조주가. 이곳의 마지막 인간이었다고 해야 맞으려나? 창조주는 이미 죽었지만.”
“인공 영혼을 만들어냈으니 대단한 인물인가 보군.”
“맞아. 똑똑한 사람이었어. 하지만 그가 죽고 몇백 년이 지나서 기계왕은 내가 필요 없는 존재라고 판단 내렸어. 영혼이 있기에 오히려 효율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거지.”
“…기계왕의 영혼은 너라면서?”
“인공지능과 인공 영혼은 엄연히 다른 거야.”
“기계왕은 왜 널 없애지 않고 여기에 가둔 거지?”
“기계왕은 날 없애지 못해. 창조주가 그렇게 프로그램했으니까. 없애지 못하니 이 탑에 가둬버린 거야. 난 밖으로 나가면 기계왕에게 복수할 거야. 기계왕의 인공지능을 없애고 내가 그 몸을 차지할 거야.”
마키나는 나와 대화 하면서 그녀들에게 정확히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마키나의 코어를 가두고 있던 유리가 깨져나갔다. 코어에서 에너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변을 감지한 그녀들이 꼭대기로 모였다.
“아, 아아! 이 몸안에 들어오는 충만한 출력…! 대체 얼마 만이야?!”
나는 황금빛 눈으로 기뻐하는 마키나의 코어를 빤히 쳐다봤다.
“고마워, 인간들아! 약속한 대로 공략대의 위치는 알려줄게. 걔들은 두 번째 기계 공장에 있어! 탑에서 서쪽으로 120km 거리!”
주변의 기계들이 뜯겨 나가더니 마키나의 코어로 달려든다. 기계부품으로 육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한소희! 막아!”
플로라가 소리쳤다. 처음부터 마키나를 자유롭게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기계왕에 대한 정보는 못 들었지만, 공략대의 위치는 알아냈으니 마키나를 처리할 시간이었다.
배리어가 마키나의 코어를 감싼다. 허나 사방에서 날아든 기계 부품에 배리어는 손쉽게 박살 났다. 사라가 쏜 빛줄기도 코어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대충 알겠네.”
나는 피식 웃었다. 코어의 안쪽, 익숙한 것이 보였다. 기계로 만들어진 정령핵이다.
“마키나. 너 기계 정령이구나?”
“역시 정령사네. 결국 알아차렸구나? 아니, 그 눈 때문인가? 하지만 네가 알아차렸다고해서 상황은 바뀌지 않아.”
“넌 처음부터 우릴 속이고 공격할 생각이었어.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지.”
“내가 진짜 기계왕이야. 내 나라의 침입자들을 살려둘 리가 없잖아. 너희는 깨닫는 게 늦었어.”
나는 느긋하게 움직였다. 마키나의 코어를 보는 순간 알았다. 저것의 본질은 결국 기계라고. 그리고 기계인 이상 나한테 안 된다.
[해킹에 성공했습니다.]
[마키나를 15초 동안 해킹 할 수 있습니다.]
“15초 안가. 생각보다 많이 짧네.”
쿵!
코어를 중심으로 모여들던 기계 부품과 쇳조각들이 전부 아래로 떨어졌다. 코어는 허공에 두둥실 떠 있긴 했으나 빛이 약해졌다.
“어, 어, 이게 뭐야?! 왜 네가 내 주인인데?!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시간 없으니 빨리 계약하자. 계약 조건은 하나. 절대복종. 내 뒤통수를 치려고 했으면서 좋게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라. 영원히 부려 먹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