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0화 〉 720. 아카데미의 구원자
720. 아카데미의 구원자
“부정행위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부정행위를 적발하는 순간 바로 실격처리하겠습니다. 마나 사용도 엄금합니다. 마나를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부정행위로 간주하겠습니다. 그 외의 다른 수단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 장소에는 결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결계는 어떤 부정행위라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부정행위를 하고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한 번 해보십시오.”
필기시험의 남자 감독관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필기 시험장 안에는 감독관이 무려 5명이 넘었다. 결계까지 설치되어 있으니 모카나 마키나를 소환해 커닝하는 건 불가능했다.
“시작하십시오.”
시험지를 확인했다.
시험지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검은색 잉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펜을 쥔 손이 움직이며 OMR 카드에 답을 기입 한다.
첫 번째 문제부터 찍었다.
‘실기와 필기의 비율은 8:2. 필기를 조져도 실기만 잘 보면 붙을 수 있어.’
슬쩍 시험지 마지막 장을 확인해보니 문제는 총 40개였다. 대충 문제 하나당 2.5 점이다. 그중 객관식은 30개. 좋게 생각하면 0점을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문제를 읽어봐도 모르겠네.’
이 세계의 몬스터는 현실의 몬스터와 조금 달랐다. 원작 게임의 설정? 몬스터에 대한 자잘한 설정까지 외울 시간은 없었다.
‘잠깐. 난 꾸준히 공부했잖아. …내가 아니라 자동 진행 아바타가.’
자동 진행을 하면 필기 점수도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은 시험 전에 제출했기에 내 품에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스마트폰이 없어도 내가 원할 때 유희 종료는 할 수 있으니까. 유희 생활 어플은 스마트폰을 통해 발현되었을 뿐이지 엄연한 내 능력이었다.
‘유희 종료.’
현실에서 자동 진행을 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아바타는 멍청했다. 시험지를 스윽 보더니 그대로 펜을 책상에 굴려 답을 찍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자기는 공부한 적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이 새끼. 자동진행으로 공부한 거 다 잊어먹은 거냐.’
혀를 찬 나는 다시 유희 세계로 들어갔다. 문제를 보지도 않고 찍었다. 주관식은 대충 답은 적었다. 5분 만에 필기시험을 끝낸 나는 책상에 대가리를 박고 잠이나 잤다.
???
A급 히어로이자, 매년 한국 히어로 협회를 도와 아카데미 시험 감독관 일을 하는 홍지욱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필기 시험장 내부를 둘러봤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아카데미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 같은 수험생들 몇몇이 눈에 들어온다.
‘독보적인 건 역시 류하나군. 노스다이아 클랜의 후계자이니 필기 정도는 우습겠지.’
노스다이아 클랜의 후계자가 천재라는 소문은 히어로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수석을 할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는 없다.
‘이번 기수가 황금 세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눈에 띄는 천재들이 많이 몰렸다던데. 아무리 류하나라고 해도 수석을 장담하긴 힘들지.’
류하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분하게 시험지를 풀고 있다. 손에 쥔 펜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시간이 더 많다. 문제를 읽자마자 정답을 도출했다는 것이다.
‘오퍼레이터 필기시험도 아니니 류하나 정도면 만점을 받겠지.’
홍지욱의 시선이 류하나의 뒤쪽으로 향했다. 류하나보다 빠르게 펜을 놀리는 수험생이 딱 한 명 있었다.
‘문제를 보지도 않고 OMR 카드를 마킹하고 있군.’
홍지욱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5년 동안 감독관 일을 하면서 처음 보는 스타일이었다. 대부분의 수험생은 필기에 자신이 없더라도 한 문제를 더 맞히기 위해 최선을 다해 문제를 푼다. 마루한 아카데미의 입학 여부는 인생의 전환점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거기에 마루한 아카데미는 등수에 따라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마킹을 전부 한 수험생은 바로 책상 위에 엎어져 잠들었다.
‘뭐하는 놈이지? 아카데미 입학을 포기한 놈인가?’
5년 만에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호기심을 느낀 홍지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강의실 내부를 돌아다니며 수험생들의 답안지를 살펴봤다.
모두 히어로 활동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베테랑인 그에겐 답이 자연스레 보였다.
‘이 녀석은 공부 좀 해왔군. 주관식도 정답이다. 가족 중에 히어로가 있나 보군. 그리고 이 녀석은…. 이런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성적은 좋지 않군.’
그는 류하나의 답안지도 확인했다.
‘완벽하군. 주관식도 흠잡을 곳이 없어. 글씨까지 명필이군.’
그는 곧이어 책상에 엎드려 자는 수험생의 앞으로 다가갔다. 팔목 옆으로 삐져나온 OMR 카드를 본 그는 헛웃음을 터트릴뻔했다.
‘객관식을 전부 찍었는데 60% 이상이 정답이군. 설마 찍은 게 아니라 문제를 푼 건가?’
찍어서 이 정도 점수가 나온다니. 대체 얼마나 운이 좋은 건가.
그는 이어서 주관식 문제를 봤다.
(22번 문제.
A 상황에서 고립되었다. C 몬스터 무리가 다가오고 있다. 오퍼레이터는 당신에게 C 몬스터 무리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건가?
답: 오더차이! 오퍼레이터 개못하네. 이 지경 될 때까지 뭐 했냐. 우리 동네 개새끼가 오더를 내려도 너보다 오더를 더 잘 내리겠다!)
답을 본 홍지욱은 실소를 흘릴 뻔했다.
‘미친놈이군. 하지만 이해는 가. 오퍼레이터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지.’
(34번 문제.
당신의 앞에 A급 몬스터인 애시드블로우가 나타났다. 당신은 C급 히어로다. 지원이 오기까지 10분 동안 시간을 끌어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건가?
답: 엄마를 부른다.)
애시드블로우는 약점만 잘 노리면 C급 히어로라도 10분 정도는 쉽게 시간을 끌 수 있다.
‘엄마를 부른다라. 보기와 다르게 마마보이였나? 좀 모자란 것 같다만, 재밌는 놈이군. 어디 보자 이름이… 성유진?’
홍지욱은 멈칫했다. 얼마 전에 들어본 이름이었다. 이번에 관천의 뇌성, 성하리의 아들 이름.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성하리의 아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런데 설마 이 녀석이라고?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인가?’
한국의 S급 히어로이자,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성하리의 아들이 이런 녀석일 리 없다. 홍지욱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
필기시험이 끝나고 10분 만에 점수가 나왔다. 순위까지 매겨서 화이트 보드에 붙였다. 수험생들이 우르르 앞으로 몰렸다.
나는 33점이었다. 선 카르마 때문인지 운이 좋게 적용해 찍은 객관식 문제 60% 이상을 맞췄다. 그런데도 점수가 40점도 넘지 못하는 건 주관식에 배당된 점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등수는 70명 중에 61등이었다. 내 밑으로 무려 9명이나 다 있었다.
‘찍은 나보다 못하네. 병신 새끼들인가.’
1등은 무려 4명이었다. 전원 만점자. 4명 중에 당연히 류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필기시험 수고하셨습니다. 1시간 점심시간을 가진 뒤, 오후 1시에 실기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오후 1시까지 동쪽 강당으로 모여주십시오. 다시 알려드립니다. 1시간 점심시간을….
“저기. 너 노스다이아의 류하나지? 난 태천보의 석동민이야.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점심 먹지 않을래? 다른 유명 클랜 소속 애들도 있어.”
한 남자가 류하나에게 껄떡거렸다. 그럭저럭 생긴 놈이었다. 자신의 얼굴이랑 실력에 어지간히도 자신 있는 모양인데, 접근 방식이 틀렸다. 면식도 없는 주제에 류하나에게 대놓고 접근하면 안 된다.
“유명 클랜? 미안하지만, 태천보라는 이름은 오늘 처음 들어. 그리고 점심은 약속이 있어서 이만.”
남자는 굳어졌다. 류하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
실기 시험에서 감독관이 보는 건 3가지다.
재능, 팀워크, 멘탈.
따라서 수험생들은 실기 시험을 두 가지를 치러야 한다.
하나는 개인 전투. 다른 하나는 팀 전투.
난 어느 쪽이든 자신 있었다. 결국은 몬스터를 빠르게 사냥하면 되는 일이니까.
시험 상대 몬스터는 놀이었다. 고블린 보다 강하고, 오크 보다 약하다. 거기에 생김새는 개 대가리를 제외하면 인간과 거의 똑같다. 얼핏 보면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일 정도다.
‘이 시험 몬스터로 놀을 선택한 건 수험생의 멘탈을 확인하기 위해 아카데미 측이 의도한 거지. 히어로는 몬스터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 빌런이라는 범죄자도 상대해야 하니까.’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나보다 먼저 앞서 시험을 치렀던 수험생들이 들어왔다.
류하나를 포함해 총 5명이다.
류하나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걸어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슬쩍 보니 몬스터 강의 동영상을 보고 있다. 다른 4명은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2명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고, 다른 2명은 몸을 가늘게 떨고 있다.
-2조 입장하세요.
내 차례다.
???
관제실에 있던 홍지욱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강지영 학장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잠깐 시간이 나서 확인하러 왔다. 널 탓할 생각은 없으니 긴장하지 마라.”
강지영은 빈 의자에 앉아 모니터들을 쳐다봤다. 모니터의 숫자는 20개가 넘었고, 각각 5명의 수험생을 다른 각도로 비추고 있다. 그리고 모니터 아래쪽에는 숫자가 표시되고 있었다. 협회의 자료를 기준으로 한 스트레스 지수다.
“정말 그냥 오신 겁니까?”
“불온한 말이군. 내가 부정행위라도 저지를 것 같나?”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여기엔 천재로 소문이 자자한 노스다이아의 후계자가 오지 않았습니까. 그 애를 보시러 오신 줄 알았습니다.”
“류하나 말인가? 뛰어난 아이이긴 하지. 먼 훗날에는 S급 헌터가 될지도 모르겠군.”
홍지욱은 강지영의 말을 기억했다.
지천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강지영은 인재를 보고 판단하는 눈이 뛰어나다. 강지영이 잘 될 거라고 판단한 히어로는 정말 잘 되었고, 위험하다고 말한 히어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히어로를 관두거나 사망했다.
강지영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관상가라고도 부른다.
“…류하나를 보러 오신 건 아닌 모양이군요. 혹시 성하리 님의 아들을 보러오셨습니까? 동명이인인 줄 알았는데 강지영 학장님이 직접 오신 걸 보면… 정말 성하리 님의 아들인 모양이군요.”
“…그래. 성유진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판단을 내리러 왔다.”
“판단을 내리러 왔다니…. 혹시 따로 만난적 없으십니까?”
“이미 몇 번 만났다. 하지만 그때마다 모르겠더군. 내가 볼 때 그 성유진은 재능이 없다. 정령안은 뛰어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떨어진다. 진령성가는 성유진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으나, 내가 볼 때의 성유진은 일류 정령사 이상은 힘들다.”
“일류 정령사도 충분히 대단합니다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아이는 존재 자체가 상식을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든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 현장 감독관들이 시험을 시작했군요.”
수험생과 놀이 전투를 벌였다. 평균적인 전투 시간은 3분이었다. 수험생들은 전력을 다했다. 여기서 패배하면 바로 실격이기 때문이다.
“이번 기수 수험생들은 뛰어나군.”
“네. 특히 류하나가 압도적입니다. 27초 만에 놀을 죽였습니다.”
“평균 스트레스 지수는?”
“평균은 30입니다. 현역 히어로 수준입니다. 다만, 놀을 죽일 때 스트레스 지수가 잠깐 200까지 치솟았습니다.”
“스트레스 지수가 바로 떨어진 걸 보니 평정심 훈련을 한 모양이군. 역시 그 녀석의 딸이라고 해야 하나.”
“평정심도 평정심이지만 실력도 엄청납니다. 저 정도 실력이면 수석은 따 놓은 당상이군요.”
“아직 그걸 판단하기엔 이르지.”
수험생들이 대기실로 돌아가고 다음 수험생들이 시험장에 들어왔다.
성유진이 있었다.
의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으로 턱을 괸 강지영은 성유진이 비치는 모니터를 지그시 쳐다봤다.
전투가 시작됐다.
번개가 놀에게 떨어졌다. 모니터가 번쩍 빛났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성유진의 전투는 1초 만에 끝났다. 정확하게는 1.394초.
“미친! 1초라니! 역대급 아닙니까? 아니, 그 전에 벼락 한 방에 놀이 죽을 리가 없는데. 뭔가 부정행위가….”
“아니. 부정행위는 없다. 평범한 번개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보다 스트레스 지수가 더 신경 쓰이는군.”
“스트레스 지수가… 0?! 놀을 죽이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 숨 쉬듯 자연스럽게, 걸어가다가 무심코 밟아 죽인 개미처럼 놀을 죽였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