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1화 〉 721. 아카데미의 구원자
721. 아카데미의 구원자
“미친! 1초라니! 역대급 아닙니까? 아니, 그 전에 벼락 한 방에 놀이 죽을 리가 없는데. 뭔가 부정행위가….”
“아니. 부정행위는 없다. 평범한 번개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보다 스트레스 지수가 더 신경 쓰이는군.”
“스트레스 지수가… 0?! 놀을 죽이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 숨 쉬듯 자연스럽게, 걸어가다가 무심코 밟아 죽인 개미처럼 놀을 죽였다는 거지.”
홍지욱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스트레스 지수는 정신적 자극이다. 평범한 상태일 때가 10 미만이고 어떤 요소로든 긴장하게 되면 스트레스 지수는 점점 상승한다. 스트레스 지수 0은 정신적 자극은 아예 안 받는 거나 다름없다.
참고로 스트레스 지수의 합격 커트라인은 80이다. 평균 80 이하면 합격이고, 그 이상이면 탈락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됩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사람인 이상 스트레스 지수가 0인건…. 최악의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성유진은 최악의 싸이코패스인가 보군.”
“농담이 아닙니다. 학장님. 진지하게 성유진 같은 녀석이 히어로 아카데미에 들어와도 됩니까? 아니, 스트레스 관측기가 오류를 일으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유진은 범죄를 저지른 빌런이 아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수험생이다. 마루한 히어로 아카데미의 목적 중 하나는 재능있는 각성자가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걸 막는 것이다. 현역 히어로 중에는 싸이코패스도 있으니 문제는 없다.”
그녀는 영상을 몇 번 둘러봤다. 그녀가 본 성유진은 1초 만에 번개를 떨어뜨려 놀을 쓰러뜨릴 힘이 없었다. 그런데 성공했다. 자신이 잘못 봤다는 사실이 약간 충격적이다.
“그리고 성유진을 싸이코패스로 낙인 찍기에는 이르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예를 들면 정신과 관련된 특성을 가졌거나, 네 말 따라 관측기가 오류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재시험을 치르는 게 좋겠군.”
“……성유진이 재시험을 치를까요? 1초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가졌는데….”
“기록을 선택하게 해준다. 더 좋은 기록을 낼 기회니 받아들이겠지.”
“이미 역대 최고의 기록입니다만…. 아무튼 성유진과 대화해보겠습니다.”
성유진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민도 하지 않고 받아들인 느낌이었다. 대화하는 도중에도 관측기는 가동 중이었다. 그의 스트레스 지수는 여전히 0이다.
“수험생들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납니다. 저도 10년 전에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봤죠. 2분 21초. 아직도 제 기록이 기억납니다. 학장님은 몇 초 이셨습니까?”
“1분 55초다.”
“…예?”
홍지욱이 화면에서 눈을 떼고 강지영을 쳐다봤다. 설마 S급 히어로인 강지영의 기록이 2분대에 가까울지 몰랐다. 강지영은 그의 의문 어린 시선에도 무덤덤하게 말했다.
“난 처음부터 강하지 않았다.”
“…아니, 뭐…. 처음부터 강한 사람은 없긴 하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보니까 있더군.”
“……성하리 님입니까?”
“그래. 성하리의 기록은 5초였다. 어떻게 보면 성유진은 제 어미를 뛰어넘었군.”
“어? 갑자기 성유진의 스트레스 지수가 320까지 치솟았습니다.”
강지영은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 속에 일어난 일은 하나였다. 놀의 시체를 치우기 위해 현장 감독관이 움직인 것뿐이다. 성유진의 시선은 여자 감독관에게 정확히 향해 있었다.
“…설마 인간에게 스트레스를 느낀다. 같은 겁니까?”
스트레스 지수는 다시 0으로 떨어졌다.
“감독관이 여자군. 어쩌면 여자라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놀을 암컷으로 준비하도록.”
“괜찮습니까? 입학시험 놀은 수컷으로 하는 게 불문율이지 않습니까.”
“처음 들어 보는 불문율이군. 사로잡은 암컷 놀은 없나?”
“…아뇨. 준비하겠습니다.”
홍지욱은 바로 수긍했다. 최고 권력자께서 원하시는데 계속 토를 달수는 없었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암컷 놀을 보는 순간 성유진의 스트레스 수치는 500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0.1초 만에 스트레스 지수가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번개가 쳤다.
암컷 놀이 쓰러지고 전투가 끝났다.
“평균 스트레스 지수는 어떻지?”
“……220입니다.”
“220? 아, 전투 시간이 너무 짧았군.”
“예. 규정대로라면 탈락입니다만….”
“탈락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스트레스 지수를 무시해도 됩니까?”
“스트레스 지수의 경우, 한순간 치솟긴 했으나 다시 0으로 돌아왔다. 아마 정신적인 스킬이나 특성을 가졌겠지. 합격이다.”
“넵.”
강지영은 모니터 속의 성유진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여전히 성유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
협회측에서 내게 재시험을 요구했다. 첫 번째 기록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에 요구에 응했다. 스트레스 관측기가 문제라고 한다.
‘아마 스트레스 지수가 너무 안 나와서 문제겠지.’
그 이유는 짐작 간다. 내가 가진 유희 생활 어플의 특성 [절대 정신] 때문이겠지.
“성유진 수험생. 시체는 지금 치울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때, 좀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감독관이 걸어 나왔다. 깔끔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여자 감독관이었다.
“깔끔하게 죽어서 치우기 편하네요.”
그녀는 놀 시체를 한 손으로 잡고 시험장 구석으로 걸어갔다.
내 시선은 그녀를 포커싱해서 얼굴과 몸매를 훑어봤다.
‘현역 히어로답게 몸매가 좋군. 가슴은 C컵이고 엉덩이도 커. 다리가 섹시한데…. 음. 얼굴이 별로군.’
흥미가 사라졌다.
-시험을 시작합니다. 3. 2. 1.
놀이 내 앞에 나타났다.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었다. 얼굴은 개대가리였지만, 몸매는 뛰어났다. 가슴은 B컵이고 드러난 팔 근육이 탄탄하다. 이상한 가죽옷을 몸에 걸치고 있어서 젖가슴이나 보지가 보이진 않았지만.
‘찰나.’
세계가 느려졌다. 나는 좀 더 느긋하게 암컷 놀을 관찰했다. 몸매는 뛰어났다. 하지만 개대가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핏불테리어를 닮은 대가리를 보자마자 흥미가 싹 사라졌다.
‘뇌전!’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놀의 머리 위에 번개가 떨어졌다. 놀은 제대로 된 반응도 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감독관이 2.135초가 걸렸다고 알려주었다. 암컷 놀을 처음 봤을 때 살짝 놀라서 첫 번째 기록보다 늦었다.
-성유진 수험생. 수고하셨습니다. 대기실로 돌아가 대기해주십시오.
대기실로 돌아갔다.
1시간을 대기해야 했다. 협회 측은 필기 시험때와 다르게 성적과 순위를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탈락한 수험생들은 조용히 돌아갔다.
-팀 전투 시험을 시작합니다. 수험생 여러분은 제 3 강의실로 모여주십시오. 시험을 시작하기에 앞서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홍지욱입니다. 필기시험 때 봤지요? 그때처럼 깐깐하게 굴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여러분의 합격은 기정사실입니다. 이번 시험의 목적은 여러분을 떨어뜨리기 위함이 아닌 실력을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마루한 아카데미는 신입생에게도 순위를 매기니까요.”
“…….”
수험생들은 조용히 홍지욱의 말에 집중했다.
“성적에 따라 팀을 정해드릴 겁니다. 여러분은 던전을 공략하면 됩니다. 던전 공략에 성공과 실패는 크게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평가하는 건 여러분이 던전을 어떻게 공략하는 지입니다. 팀은 성적에 따라 저희가 배정했습니다. 팀은 브리핑이 끝난 후에 발표하겠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공략할 던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시큰둥하게 브리핑을 들었다. 수험생 실력에 맞춰진 낮은 등급의 던전이다. 협회가 완벽히 통제하고 있는 인공 던전. 심하게 다치거나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브리핑은 끝입니다. 이제 1조부터 팀을 발표하겠습니다. 1조, 류하나, 성유진, 배현성, 오유미. 2조, 노지한, 김만오, 이재성, 박구손. 3조….”
조가 정해졌다.
‘예상했던 대로 류하나와 같은 조군.’
팀은 비슷한 실력끼리 배정한다. 즉, 1조는 이곳의 수험생 중 톱클래스 4명이라는 것이다.
‘던전 공략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는 시험이니까.’
원작에 따르면 이 시험은 팀워크를 중요하게 여긴다.
‘원래 실력 차이가 거의 없고 비슷비슷하면 의견 충돌이 많아지지.’
히어로 업계에선 실력이 곧 권력이다. 비슷한 놈들이 모이면 의견은 합해지지 않고 충돌이 많아진다.
“안녕. 네가 성유진이지?”
이번 시험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근육질의 커다란 덩치에 광어와 닮은 넓적한 얼굴이었다.
“넌 누군데?”
“이번에 같은 팀이 된 배현성이야. 잘 부탁해.”
“어. 잘 부탁 한다.”
이쪽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이번엔 갈색 머리의 여자였다. 머리 뒤쪽 아래에 머리카락 뭉치가 있다. 로우번 헤어스타일이라고 하던가.
“너희들 1조지? 난 오유미야. 마법사고. 미리 말할게. 난 후위가 전문이야. 전위는 죽어도 안 설 거야.”
그녀는 꽤 미인이었다. 하지만 입술 왼쪽 밑에 있는 점이 매우 거슬렀다.
‘점은 빼면 되니까 문제없어. 얘도 언젠가 따먹어야지.’
나는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저 멀리서 류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기품이 서린 당당한 걸음걸이는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류하나는 우리를 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목적은 단시간에 보스 몬스터를 죽이고 높은 성적을 받는 거야. 그러기 위해선 너희의 원활한 협력이 필요해.”
오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류하나지? 난 오유미야. 나도 높은 성적을 받고 싶어. 하지만 이번 시험은 단순히 빨리 던전을 공략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아까 감독관이 말했잖아.”
배현성은 류하나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배현성이다. 오유미의 말이 맞다. 이번 던전은 최대한 빠르게 공략하는 게 아니라, 뛰어난 팀워크를 감독관에게 보여야 한다. 공략이 늦더라도 모두가 활약하며 안전하게 공략해야 한다. 특히 나는 안전하게 공략하는 것이 핵심이라 생각한다.”
류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유미와 배현성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너는?”
류하나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결과보다 과정이 평가 내용이라는 건 맞을 거야. 하지만 결과를 아예 보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지. 결과가 좋으면 추가 점수를 얻을 수 있겠지. 그러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여서 던전을 공략해야 해.”
류하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유미가 내게 물었다.
“넌 성유진이지. 포지션이나 특기는 어디니?”
포지션.
던전 공략의 히어로 포지션은 총 5가지로 나뉜다.
디펜더, 어태커, 서포터, 스카우트, 오퍼레이터.
“음. 스카우트? 특기는 정령술이야.”
“류하나. 너는?”
“검사. 포지션은 어태커.”
“배현성은 딱 봐도 디펜더고. 팀의 대열을 어떻게 짜야 할지 정해진 것 같네.”
우리는 회의 결과 특별한 전술 없이 무난하게 가기로 했다.
???
-1조부터 시작합니다. 던전 공략에 주어진 시간은 1시간입니다.
여기오면서 본 건데 던전은 총 3개였다. 3개 조가 동시에 시험을 보는 것이다.
-던전에 입장하십시오.
우리는 일렁이는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배현성, 류하나, 나, 오유미 순서였다. 그냥 막 들어가는 게 아니다. 입장 순서도 당연히 미리 정해두었다.
던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의 폐허 도시였다.
아스팔트 도로는 쩍쩍 갈라져서 잡초가 자라 있고, 자동차는 녹슬고 부서져 있다. 높은 빌딩들은 창문이 모두 깨져있거나 반쯤 무너져 있다.
류하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브리핑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던전이 너무 넓어서 1시간 내로 보스 몬스터를 찾는 건 힘들다고 판단한 거겠지.
“성유진. 포지션이 스카우트라고 했지? 정찰을 부탁해.”
나는 류하나를 빤히 쳐다봤다.
“원래 계획은 보스 몬스터부터 찾는 거였잖아. 원래 계획대로 할까?”
“3번째 플랜으로 넘아가자. 실제로 보니 던전이 너무 넓어. 보스를 찾는데 시간을 다 쓸 수는 없어.”
3번째 플랜.
우선 순위를 몬스터 토벌에 두고 보스 몬스터 탐색은 천천히 진행하는 계획이다.
‘원작대로라면 여기 보스 몬스터는… 크크. 류하나의 콧대가 꺽이는 걸 보겠군.’
정령안을 사용했다.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한다. 여러 가지 정보가 눈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모카를 소환했다.
“꾹!”
모카는 내 왼쪽 어깨로 올라탔다.
배현성과 오유미는 영체화 상태의 모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특수한 기척은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반면 류하나는 모카를 정확하게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