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3화 〉 723. 아카데미의 구원자
723. 아카데미의 구원자
나는 오른손을 들어 류하나에게 싸대기를 날렸다.
짜아아악!
류하나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흔들리는 눈으로 날 쳐다본다. 그녀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흐른다.
‘젠장. 너무 세게 때렸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고 원작 플레이어의 대사 선택지 하나를 통째로 외웠다.
“류하나! 정신 차려! 넌 이런 애 아니잖아!”
“…….”
[류하나의 호감도: 5]
일이 좀 꼬인 것 같았다.
날 노려보는 류하나의 다크 블루 눈동자는 살벌했다. 살기까지 느껴진다.
호감도 5.
류하나는 명백하게 나를 적대하고 있다. 그녀의 코에선 계속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다.
엎질러진 물이다.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내가 변명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오크 로드인 척하고 있는 강지영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이럴 때는….’
머리를 급하게 굴렸다.
다행히 답은 나왔다. 긴박한 순간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나중에 변명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분노도 가라앉을 테니 변명이 통할 가능성이 커진다. 거기에 류하나가 옳게 행동한 것도 아니다.
나는 주저앉은 류하나의 어깨를 잡았다. 류하나가 입을 열기 전에 그녀를 오유미를 향해 내던졌다.
“크윽… 너…!”
“뭐, 뭐야…?!”
오유미는 갑작스레 던져진 류하나를 안 듯이 받았다.
“오유미! 쓰러져있는 배현성 데리고 도망가!”
오유미가 마법사라 신체 능력이 떨어지더라고 각성자다. 사람 2명 정도는 쉽게 들것이다.
“아, 알았어. 성유진 너는?”
“누군가 오크 로드는 막아야지. 저걸 내버려 뒤따라와서 전멸당할 거야.”
다행히 강지영은 느릿하게 내게 오고 있다. 일부러 시간을 주는 것이다. 진짜 오크 로드였다면 여유롭게 대화할 시간 따윈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진짜 오크 로드였다면 이 지경까지 안 왔겠지만.
오유미는 다급히 배현성의 팔한짝을 잡아 질질 끌며 나간다. 품 안에 조심히 안아 든 류하나와 달랐다.
“이거 놔! 난 싸울 수 있어!”
류하나가 소리쳤다. 그러나 오유미의 팔조차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는 게 현실이었다.
“유진아! 너도 적당히 하다가 도망쳐!”
“3분만 시간 끌면 돼. 그 이후엔 감독관이 오겠지.”
오유미가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검을 잡아 들어 오크 로드를 겨눴다. 우우웅. 검이 떨리며 푸른색 기운이 검날을 뒤덮는다. 류하나도 지금 시점에선 사용하지 못하는 검기였다.
오크 로드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오크 로드가 도끼를 들어 올렸다.
‘원래는 검기까지 보여 줄 생각은 없었는데…. 강지영이 상대라면 이야기는 다르지. 강지영에게 임팩트를 남길 좋은 기회야.’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모카!’
하늘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모카가 실체화하며 오크 로드에게 번개를 떨어뜨렸다. 번개에 맞은 오크 로드가 주춤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영천류(影天流) 뇌광(雷光).
극한의 쾌검이 오크 로드의 상체를 가른다. 오크 로드는 반응했다. 아니, 강지영이 반응했다. 진짜 오크 로드였다면 반응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검끝은 닿았다. 툭 튀어나온 풍만한 가슴 부분의 옷이 찢어지고 가슴 일부와 와인색 브래지어가 보였다. 가슴에 난 상처에서 피 한 방울이 흘러나왔다. 상처는 1초 만에 회복되었다. 그녀의 자연회복(S) 스킬의 효과다.
오크 로드가 도끼를 휘둘렀다. 검을 비스듬히 세워 회피하고, 오크 로드의 복근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오크 로드가 손바닥을 들어 내 주먹을 막아냈다.
기세를 탄 나는 멈추지 않고 공격했다. 검과 도끼, 주먹과 손바닥이 부딪힐 때마다 충격파가 발생하며 바닥에 쩌적 금이 갔다. 나는 더욱 몰아붙였다.
???
“허억. 헉! 헉!”
오유미는 거친 숨을 내쉬며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마법이 전문이 그녀는 다른 각성자들에 비해 신체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 사람을 두 명 들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아앗!”
짧은 비명을 지른 그녀는 무심코 오른팔에 힘을 뺐다. 류하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품에서 벗어나 계단 위쪽으로 올라갔다.
“류하나! 우린 지금 도망가야 해! 성유진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자!”
“……난 그놈의 희생을 바란 적 없어. 넌 내려가.”
잠깐의 휴식으로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된 류하나가 계단 위로 올라갔다.
“야! 류하나!”
오유미가 소리 질러 류하나를 불렀다. 류하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유미는 잠깐 고민하다가 뒤를 쫓는 걸 포기했다.
‘오늘 만난 사이에 불과한데 어떻게 되든 알게 뭐야. 난 다치고 싶지 않아. 여기선 도망치는 게 정답이야.’
오유미는 배현성을 질질 끌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류하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위로 올라갔다. 그녀도 자신의 판단이 어리석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도망간다? 그럴 바엔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낫다. 이건 명예롭지 못하니까.
‘그 자식은 마음에 안 들지만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어.’
그 오크 로드는 평범한 오크 로드가 아니었다. 공격을 해도 공격이 먹히지 않는 느낌, 거대한 산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어찌하지 못했는데 성유진이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싸우면서 시간을 번다? 30초라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어쩌면 이미 늦어서 최악의 경우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류하나의 두 눈이 커졌다. 눈앞의 광경은 그녀가 우려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성유진은 오크 로드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을 뒤쫓는 류하나의 눈동자가 격렬히 흔들렸다.
‘…검기. 벌써 검기를 쓴다고…?’
거기다 움직임이 엄청나다. 어떤 검술인지 몰라도 여기저기 쫓아가기 버거울 정도였다.
‘정령사가 맞긴 한 거야?!’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성유진은 정령사가 맞다. 성유진은 천둥부엉이와 함께 싸우고 있으니까. 알고 있음에도 믿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움직임과 검술이다.
‘말도 안 돼…. 수준이 달라….’
류하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또래 중에는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오만이 아니었다. 그녀 주위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말했고, 실제로 또래 중에서 자신이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우물 속의 개구리였음을 깨달았다.
‘검기를 사용하는 성유진도 성유진이지만…. 성유진과 대등하게 싸우는 저 오크 로드는 뭐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어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류하나는 다른 모든 생각을 없애고 전투에 집중했다.
‘그렇구나. 하체를 이용해서 오크 로드의 힘을 흘렸어.’
류하나의 재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런 움직임도 가능하구나…. 왜 갑자기 검의 속도가…. 아. 상대방에게 착각을 심어주기 위한 페이크야.’
콰아아아앙!
검과 도끼가 부딪치며 귀청이 찢어질 듯한 충격파가 퍼졌다. 류하나는 문틀을 잡아 불어오는 바람에 맞섰다.
한계에 달했던 옥상 바닥이 깨진 접시처럼 부서져 아래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유진의 발이 미끄러졌다. 그의 몸이 아래쪽 바닥이 아닌 건물 밖으로 날아간다. 성유진이 대처하기에는 발판도 뭣도 없었다. 정령인 천둥부엉이는 저 멀리 떨어져 있다.
“성유진!!”
류하나가 성유진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오크 로드가 무너지는 바닥에서 뛰어올라 성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류하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마치 성유진을 구하려는 듯한 모습이었으니까.
오크 로드가 성유진의 발목을 잡기 직전, 성유진이 허공에 바로 섰다. 그의 발아래에 투명한 역장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성유진은 그 자리에서 검을 휘둘렀다. 오크 로드의 상체가 베이고 붉은 피가 튀었다.
오크 로드는 양팔로 성유진의 몸을 꽉 붙잡고 아래로 떨어졌다.
“안 돼…!”
류하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한계에 달한 다리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꾸욱. 꾹.”
천둥부엉이가 그녀의 앞에 서며 날개를 파닥였다. 마치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S급 히어로, 강지영은 강했다.
나는 전력을 다했음에도 강지영의 전력을 끌어내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녀가 전력을 다했더라면 전투는 10초 만에 내가 패배했으리라.
마지막에 떨어지면서 먹인 일격은 강지영이 내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에 성공한 일격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강지영의 품에 안긴 채로 아래로 떨어진다. 저 시야 끝에 경악한 얼굴의 류하나가 보였다.
‘상황은 나쁘지 않아.’
나는 강지영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풍만한 가슴의 부드러운 감촉이 뺨에 느껴진다. 아까 검을 휘두르며 그녀의 상의를 찢었다. 놀랍게도 상처는 이미 회복되어 있었다. 다만 피는 묻어 있어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젖꼭지는 진한 분홍색이네.’
얼른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걸 느끼며 그녀의 젖꼭지를 쪽쪽 빨았다. 이런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우지끈. 아래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 떨어지며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강지영의 품안에 안겨 있는 나는 안전했다. 오크 로드로 모습을 속이고 있던 강지영의 마법이 풀렸다.
쿵!
마침내 땅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이 전해지긴 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다. 나는 두 눈을 감으며 상태가 좋지 않은 척 연기하면서 강지영의 젖꼭지를 맛보며 즐겼다.
“읏…. 기절하지 않은 걸 알고 있으니 일어나라.”
강지영이 날 밀쳐 냈다. 목소리가 단호했기에 허겁지겁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 정신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이모, 괜찮지?!”
“…….”
강지영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 한 손으로 찢어진 옷을 잡아 가슴을 가렸다. 가슴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나는 강지영의 머리를 쳐다봤다. 머리카락 색과 같은 흑갈색 늑대 귀가 쫑긋 움직였다가 사라졌다. 강지영의 특성 중 하나인 대지의 늑대(S)의 발동 효과다.
“다친 곳은 없나?”
“없어. 이모는?”
“옷이 찢어진 것 말고는 문제없다.”
“괜히 미안하네.”
나는 코트를 벗어 강지영에게 건넸다. 강지영은 말없이 받고는 코트를 걸쳐 여미었다.
“언제부터 내 정체를 알아차렸지? 정령안에 마법을 꿰뚫어 보는 능력은 없을 텐데.”
옛날에는 마법을 꿰뚫어 보는 게 당연히 정령안의 능력인줄 알았다. 허나 따로 깊이 조사해보니 정령안에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구목교의 신과 마주하고 난 뒤부터 정령안이 강화되었지. 아마 그 영향으로 내 정령안이 좀 특별해진 거겠지.’
강지영에게 설명해줄 생각은 없다. 성하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걸, 그녀에게 말할 리가.
“중간부터 알았어. 딱 감이 오던데. 오크 로드의 움직임도 어딘가 어색했고. 무엇보다 오크 로드 치고 너무 세잖아.”
“…그것도 그렇군.”
“왜 이모가 직접 움직인 거야?”
“일손도 도울 겸,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강지영이 날 빤히 쳐다봤다. 아무래도 강지영이 직접 움직인 건 나 때문인 모양이다.
“언제부터 검술을 익힌 거지?”
“좀 됐어.”
“성하리는 알고 있나?”
“응. 엄마가 난 검이 더 낫다더라. 그래도 투창은 재밌어서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모르겠군.”
“모르겠다니, 뭐가?”
“너 말이다. 내 눈으로 보고 판단했을 때, 넌 정령술을 제외하면 재능이 없다. 정령술도 정령안 때문에 재능이 있는 거지.”
“정령술에 재능 없는 건 맞아. 증조할아버지도 그렇게 말했지. 그래도 정령 친화력만큼은 뛰어난 편이야.”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냐?”
나는 조용히 입가를 올려 웃었다.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강지영은 나를 보다가 몸을 돌려 숲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이모. 같이 가자.”
“…입구까지 만이다. 너와 내가 같이 나가는 걸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공평성에 대해 말이 나오겠지.”
“그 코트는 입고 나가게?”
“마법을 사용해 모습을 감추면 된다. 걱정되는 건 오히려 너다. 입단속 잘하도록.”
“나 입 무거워. 이모.”
나는 은근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은 나보다 키가 더 큰 강지영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강지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날 쳐다봤다.
“뭐지?”
“별건 아니고. 오랜만에 만나잖아. 오늘 저녁에 같이 식사라도 하자.”
“걷기 불편하니 손은 치워라. 같이 저녁 먹을 시간은 없다.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