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31 - 731. 아카데미의 구원자 (511/2,000)

〈 731화 〉 731. 아카데미의 구원자

731. 아카데미의 구원자

아침까지 섹스하다가 아카데미에 등교한 나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두 곳에서 시선과 살기가 느껴진다.

한 명은 이강후였다. 어젯밤에 나가서 이강후의 목을 따려고 했는데 성하리와 섹스하느라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하리와 당분간 떨어져서 지내야 하니까. 이강후 따위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었지.’

다른 시선 하나는 유승준이었다. 어제 일로 내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아마 기회가 생기면 가차 없이 보복하려고 들겠지.

드르륵륵.

교실 문이 열리고 1반의 담임교사인 윤희정이 안으로 들어왔다. 교탁 위에 선 그녀는 출석부를 펼치며 말했다.

“학기 초라 그런지 조용하네. 우선 출석부터 부르고 오늘 일정에 대해 간략히 말해줄게.”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출석을 불렀다. 아무리 그래도 첫날부터 지각하는 학생은 없었다.

“오늘 일정은 대련이야. 아카데미는 너희에 대해 잘 알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니 입학 순위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겠지. 너희가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대련을 통해 입학 순위를 납득하게 만드는 게 이번 대련의 목적이야.”

학생들은 누구 한 명 당황하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치러지는 이 대련은 유명한 일정이었다.

“이 대련은 성적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 대련을 거부해도 되고, 본 실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돼. 다만 그 이후는 스스로가 감당해야 해.”

입학 순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에게 현실을 알려주기 위한 일정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학생들 간의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의욕을 끌어 올리려는 아카데미의 의도도 있다. 그 의도가 역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대련은 1학년 전원이 모인 곳에서 시작할 거야. 기본적으로 랜덤으로 비슷한 순위를 가진 학생들끼리 매칭이 돼. 원하는 대련 상대가 있다면 대련이 시작하기 30분 전에 내게 말해주면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천우가 손을 들었다. 윤희정이 김천우를 쳐다봤다.

“질문 있니?”

“질문이 아니라 대련 상대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꼭 지금 말할 필요 없는데… 지목 상대는 누구니?”

“유승준입니다.”

“어… 승준이?”

윤희정이 당황했다. 차석인 김천우의 상대로 유승준은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유승준을 쳐다봤다. 유승준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구겨져 있다.

“승준아. 어떡할래? 거절해도 돼.”

유승준은 자기 자신의 코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잘 됐습니다. 순위 최상위권이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그는 말을 끝내고 나를 힐끔거렸다. 아마 김천우가 아니었다면, 날 대련 상대로 지목했을 가능성이 크다.

‘멍청한 새끼. 김천우가 자기를 위해서 지목한 건 짐작도 못 할 테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원작 게임을 플레이했기에 김천우의 성격을 알고 있다. 김천우는 나와 유승준의 대련을 막기 위해 유승준을 지목한 것이다.

“선생님. 저도 대련 상대를 지목하고 싶습니다.”

“강후 너도? 지목 상대는 누구니?”

“성유진입니다.”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며, 나를 죽일 듯이 쏘아보며 씹어뱉듯이 말한다.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한 윤희정이 당황하면서 내게 물었다.

“유진아. 받아들일 거니?”

“네? 저런 좆밥이랑 싸우면 저만 손해잖아요. 전 랜덤으로 할 거예요.”

“으음…. 알았어. 말투에 좀 신경 쓰렴. 강후도 들었지? 유진이가 거절했으니 대련은 성사되지 않아.”

“…….”

이강후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1교시가 끝나고 윤희정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유진아. 3반의 류하나가 널 대련 상대로 지목했어. 어떻게 할 거니?”

조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거절이요. 걔랑 싸울 생각은 없어요.”

류하나를 너무 오냐오냐하면 안 된다. 지금은 적당히 거리를 벌리는 편이 낫다.

“알았어. 근데 다른 반에서 지목이 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원래 아는 사이였니?”

“입학시험 때 만났을 뿐이고,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에요. 아, 대련 표는 나왔어요?”

“게시판에 붙여뒀으니 가서 확인해보렴.”

게시판으로 갔다.

최상위권 학생들의 대련은 뒤쪽, 오후 시간대에 몰려 있었다.

류하나의 상대는 입학 순위 3위의 안기산. 차석인 김천우가 유승준과 싸우면서 안기산과 붙게 되었다.

‘결과는 류하나의 승리겠지.’

상대가 김천우라면 몰라도, 안기산으로는 류하나를 상대로 이기기 힘들었다.

‘내 상대는… 크크. 예상대로 최다연이군.’

입학 순위 4위 최다연.

콧대 높은 재벌 3세의 콧대를 확 꺽어 줄 기회가 왔다.

???

대련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진지하게 대련에 임했다. 대부분 상대를 지목하지 않고 아카데미 측이 정해주는 상대와 싸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제 바로 입학식을 치렀다. 입학생들은 서로의 이름도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이게 더 낫지. 비슷한 실력의 상대와 싸우니까.’

대련에서 승리하고 함성을 내지르는 학생이 있고, 패배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상위권 학생들의 대련을 보고 벽을 느끼는 학생도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에 달린 거대 모니터를 쳐다봤다. 오로라 시뮬레이터 내의 대련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다. 동시에 진행되는 대련중 가장 치열하고 수준 높은 경기를 중계해준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저 그랬다.

이시은을 찾다가 김천우를 발견했다. 그는 다른 남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근육질의 남학생.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1반 11번. 마진배.

내가 김천우에게 다가가자 마진배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무슨 볼일이냐, 성유진.”

“너한테 볼일 없으니 아가리 닥치고 있어라. 근육 돼지.”

“하, 나랑 한판 하고 싶다는 말을 길게도 하는군. 대련장으로 와라. 묵사발을 내주지.”

마진배가 커다란 주먹을 들었다. 손은 굳은살로 가득하고, 손등에는 작은 흉터들이 많았다.

나도 주먹을 쥐었다. 일단 대가리를 한 대 갈겨주면 조용해지겠지. 내가 마진배를 향해 걸음을 내딛자마자 김천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진정해. 성유진. 나한테 할 말이 있어 온 거 아니야?”

“그래.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다.”

“진배야. 잠깐 이야기하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마진배는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저놈이 개수작을 부린다면 소리쳐라. 바로 달려갈 테니.”

김천우와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향했다. 김천우는 담담한 얼굴로 내 뒤를 쫓아왔다. 하지만 나는 그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너랑 싸울 생각 없으니 긴장 풀어. 너도 나랑 싸울 생각 없잖아?”

“어제 네 모습을 보고도 네 말을 어떻게 쉽게 믿겠어?”

“그럼 계속 긴장하고 있던가.”

김천우는 후하고 숨을 내쉬더니 어깨에 힘을 풀었다.

“……내게 할 말은 뭐야? 보아하니 나랑 싸우자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유승준에 관한 좋은 정보를 주려고 왔지.”

“필요 없어. 나를 이용해 유승준에게 해를 끼칠 생각인 모양인데…. 난 정정당당하게 유승준과 대련할 거야.”

김천우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몸을 돌렸다. 오히려 이렇게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당황했을 것이다. 나는 김천우가 완전히 떠나기 전에 입을 열었다.

“유승준은 마인이다.”

우뚝.

김천우의 다리가 멈췄다. 뒤를 돌아본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지금 그 발언. 장난으로 내뱉은 거라면 당장 취소해. 여긴 마루한 아카데미야. 네가 내뱉는 말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일인지 알아?”

“당연히 알고 있지. 그걸 모를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니까. 그래서 이렇게 너한테만 말하고 있는 거 아니겠어?”

“난 네 말을 못 믿는다고 했어. 유승준이 마인이라면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나 협회에 신고했어야지.”

“협회는 유승준을 잡아 처형하거나, 감옥에 가둬버리겠지. 그건 너무 쉽잖아. 난 네가 말했던 대로 고통받길 원한다고.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하냐?”

“…….”

김천우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김천우는 처음부터 고아가 아니었다. 그가 5살 때, 김천우의 부모님은 악마와 마인에게 살해당했다. 김천우는 그 이후로 악마와 마인을 증오한다.

원작에 따르면 부모님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그 기억은 뇌리에 각인되어 지금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잠을 잘 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사람 좋은 김천우지만, 마인과 악마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다.

“…증거는? 유승준이 마인이라는 증거는 있어? 증거도 없이 유승준을 마인으로 몰아간다면….”

“물질적인 증거는 아직 없어. 마인의 정체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면 협회가 그토록 고생하지 않았지. 하지만 놈에 대한 정보는 있지. 유승준은 일본의 마도정 소속의 간첩이다. 아, 마도정에 대해서 모르지? 마도정은.”

“알고 있어. 일본의 마인 연합. 꽤 그럴싸하지만, 네 말을 신뢰할 이유는 없어.”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 말을 신뢰하지 않는 것치고는 이미 눈빛이 누구 하나 죽일 정도로 살벌하다.

내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개뿔이. 이미 내 말을 들은 순간부터 유승준에게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김천우. 폰 번호 불러봐.”

“내 폰 번호는 왜?”

“내가 조사한 유승준에 대한 정보를 보내주지.”

“…….”

김천우는 망설이다가 내게 번호를 알려줬다. 김천우에게 유승준에 대한 정보를 보냈다. 참고로 유승준에 대한 정보는 해킹을 통해 여기저기서 긁어모으고 원작 정보를 몇 가지 추가로 넣어뒀다.

자료를 본 그의 눈동자가 커진다. 자료의 상세함 때문이다. 자료에는 유승준이 태어난 곳은 물론이고 친인척관계,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악 등 쓸모없어 보이는 정보까지 들어가 있으니까. 실은 게임 원작에서 나온 프로필 정보를 넣은거지만.

“…나카시마 유지?”

“유승준의 본명이지.”

유승준은 일본과 한국의 복수국적을 가지고 있다.

“유승준이 계약한 악마가 하마엘이라고? 어떻게 그것까지 아는 거지?”

“너한테 정보의 출처를 알려줄 생각은 없어. 아, 하마엘이 어떤 악마인지 모르나?”

“알고 있어. 2군단에 속해있는 악마 남작, 하마엘.”

“오. 하마엘을 알고 있을 줄이야. 악마에 대해 관심 좀 있나봐?”

“만약, 네 말대로 유승준이 마도정의 마인이라면 왜 마루한 아카데미에 들어온 거야? 일본에도 아카데미가 있을 텐데.”

“마도정의 목적이 한국에 진출하는 거니까. 그러니 한국 히어로 협회에 스파이를 심어두려는 거지. 한국 히어로 협회에 조력자가 있으면 활동하기 더 편해지니까. 그게 협회 간부면 더 좋고.”

“…이것도 진짜야?”

“뭐?”

“유승준이 저지른 살인. 총 24명. 그중에 일가족 몰살이 3번…. 놈이 저지른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 심각해.”

“마도정은 일본의 범죄 집단이야. 일본 정치에도 손을 뻗고 있을 정도의 거물이지. 당연히 야쿠자도 휘하에 두고 관리하지 않겠어?”

“관리….”

“마도정이 쓰기 좋은 마인을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잖아. 유승준은 마인이야. 그것도 쓰레기 중의 쓰레기지. 놈은 고통받아 마땅한 놈이야. 그러니 네가 대련에서 유승준에게 최대한 고통을 주라고.”

“…….”

“뭐, 네가 내 말을 끝까지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할 말은 다 했다. 나는 김천우의 옆을 지나쳤다.

“잠깐. 네가 이렇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렇게 유승준이 싫은 거야?”

“어. 싫어. 더 정확히 말하면 악마 새끼가 싫어. 악마와 관련된 놈들도 싫고. 특히…. 아니다.”

김천우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

“김천우, 유승준. 5번 시뮬레이터 룸으로 들어가도록.”

팔뚝에 붉은색 완장을 찬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붉은색 완장은 아카데미 직원의 특징이다. 교사는 아니고, 스태프에 가깝다. 주로 하는 일은 저마다 다르지만, 보통 교사를 도와준다.

“예.”

짧게 대답한 김천우는 아카데미에서 받은 대검을 들고 5번 시뮬레이터 룸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이어 창을 장비한 유승준이 들어갔다.

5번 시뮬레이터 룸의 전자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오로라 시뮬레이터 가동.

김천우는 순간 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현실에 가상이 덧입혀진다.

이것으로 치명상을 입어도 고통을 느낄지언정 죽지 않는 상태가 된다.

김천우와 유승준을 서로 말없이 마주 보았다. 담담하게 응시하는 김천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유승준은 혀를 차며 창을 겨눴다. 김천우도 대검을 양손으로 들었다.

그들 사이에 홀로그램 숫자가 떠오르며 카운트 다운을 시작한다.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