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6화 〉 736. 아카데미의 구원자
736. 아카데미의 구원자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눌렀다. 머리를 내려 그녀와 두 눈을 마주했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였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안 비켜?”
윤희정이 말투에 날이 섰다.
“어젯밤에 뒷골목의 보석을 만났습니다. 선생님과 비슷한 키였죠.”
움찔.
윤희정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너… 내가 뒷골목의 보석이라고 의심하고 있구나? 확실히 말해둘게. 난 뒷골목의 보석인지 뭔가가 아니야. 아카데미 교사는 부업이 금지되어 있고, 어제 난 교사 기숙사에 있었어.”
“지금 선생님 눈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아시나요?”
“네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그래. 좀 떨어져 주지 않겠니?”
“뒷골목의 보석은 유일하게 두 눈만 내보였습니다. 선생님과 눈과 뒷골목 보석의 눈이 비슷합니다. 그것도 아주.”
뒷골목의 보석은 두 눈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눈매를 감추기 위함이다. 그러나 윤희정은 그걸 지적할 수 없었다. 윤희정은 뒷골목의 보석과 만난 적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눈이 비슷한 사람은 많아. 그것만으로 내가 뒷골목의 보석이라고 생각하다니…. 넌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어젯밤에 전화를 걸었는데…. 안 받으셨더군요. 아니, 받을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옳을까요?”
“……성유진. 선을 넘지 마. 난 선생이야.”
“정말 선생님이 뒷골목의 보석이 아니세요?”
“몇 번을 말해야겠니? 아니라니까.”
“그럼 제가 뒷골목의 보석을 신고해도 선생님은 상관없으시겠네요?”
“……신고한다고?”
“뒷골목의 보석은 유명해도 결국 불법이니까요. 지금까지는 어찌저찌 넘어갔는지는 몰라도. 엄마를 통해 협회에 신고하면 당장 치워버릴 수 있을 거예요.”
어깨를 꾸욱 눌렀다. 손가락을 통해 느껴지는 그녀의 어깨는 블라우스 위임에도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녀는 내 손을 직접 뿌리칠 생각도 못 할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 시선을 좀 더 내렸다.
윤희정의 거대한 봉우리가 보였다. 하얀 블라우스를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살구색의 브래지어가 보인다. 가슴이 워낙 커서 하체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거리를 벌렸다.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관찰했다. 정말로 상관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있다.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신체 반응을 전부 컨트롤 하지 못했다. 마나를 이용해 강화한 청력으로 그녀의 불규칙한 호흡과 빠르게 뛰는 심장 고동이 들린다.
“뭐, 거짓말이고 신고할 생각은 없어요. 저도 뒷골목의 보석에게 의뢰한 게 있어서요.”
윤희정의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선생님은 왜 신고하지 않죠?”
“시내는 아카데미의 영향력에 있지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장이야. 아카데미가 그들에게 간섭할 이유는 없어. 불법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아카데미에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아카데미도 그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고 있거든. 시내는 학생들에게 좋은 스트레스 해소처야.”
아카데미의 빡빡한 일정과 치열한 경쟁. 그로 인해 학생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장난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시내는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없다.
“그렇군요. 그런데 선생님. 시내에 떠돌고 있는 흉흉한 소문에 대해서 아시나요?”
“……아니. 모르겠는걸. 무슨 소문이니?”
함정에 걸려들지 않았다.
“별거 없는 소문이에요.”
똑똑.
사무실 문에 누군가 노크했다.
“윤 선생님. 안에 계십니까?”
남자 목소리였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큰 키와 단단한 체격의 남자였다.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짧은 갈색 머리 위에 곰의 귀가 달려 있다.
나는 대충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바깥으로 나갔다.
“아, 학생과 상담 중이셨습니까?”
“네. 상담은 끝났어요. 오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본가에서 보낸 꿀이 와서 윤 선생님에게도 나눠드리러 왔습니다.”
오성웅.
1학년 3반 담임이다.
오성웅은 윤희정에게 마음이 있다. 원작은 선택에 따라 오성웅과 윤희정이 이어지는 루트도 있다. 그러나 내가 있는 이상 그 루트는 현실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유명한 건 좋다. 다른 이들로부터 선망과 존경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단점으로는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성유진! 창술 동아리에 들어올 생각 없나? 성하리의 아들인 넌 반드시 들어와야 한다!”
“신문부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 현역 히어로와 인터뷰를 하는 것도 우리 신문부의 일 중 하나야. 성하리 씨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은데… 네가 도와주면 안 될까?”
“정령사라고 들었다! 우리 신령회에 들어와라! 성유진!”
쉬는 시간마다 내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 관심 없으니 나가주시죠.”
난 나만을 위한 동아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섹스 동아리.
나를 제외한 동아리 부원들은 모두 여자여야 한다. 고문 선생은 담임인 윤희정으로 낙점해놓았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다른 이름의 동아리를 만들 거지만. 대충 성을 연구하는 성찰 동아리라고 하면 되나.’
동아리를 창설하기 위해선 총 5명의 학생이 필요하다. 이시은은 당연히 날 따라올 테니 3명이 더 필요하다.
쉬는 시간에 복도를 걷는데 류하나와 마주쳤다. 나는 일부러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류하나의 성격상 억지로 다가가려 하면 오히려 멀어진다.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는 명분으로 맞닥뜨리는 게 최고다.
“성유진.”
류하나가 날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각오가 서린 얼굴로 날 보고 있다.
“왜?”
“부탁이 있어. 나랑 대련 한 번만 해주지 않을래?”
류하나가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거지?
내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답을 도출했다.
내 강함이 류하나의 자존심과 강함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좋다. 비공식으로 만나서 대련하며 친해지는 것이다. 류하나의 인정을 받은 이상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미안한데. 너랑 대련할 생각은 없어.”
고민하다가 나온 대답은 내 심정과 달랐다. 나는 그녀를 더 애태우고 싶었다. 부디 그녀가 바로 포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왜? 너한테 난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거야?”
“역으로 묻자. 내가 너랑 대련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뭔데?”
“서로 강해질 수 있어.”
“내가 볼 땐 꼭 대련이 아니어도 네 목표는 이룰 것 같은데?”
“대련을 통해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어. 네게도 손해만은 아니잖아.”
“내겐 손해야. 나와 대련하고 싶다면 그 이상의 메리트를 가져와.”
“……돈?”
“장난쳐? 누굴 거지로 보나.”
나는 몸을 돌려 아카데미 밖으로 나갔다. 아카데미 건물의 뒤쪽, 살짝 으쓱한 곳이었다.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한 사람, 최다연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고 있었다.
“중간에 아는 사람이랑 이야기 좀 나누라고 늦었어. 미안.”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니니 상관없어. 내게 할 말이 뭐야?”
“네 꼬봉 관리좀 잘하라고 말해두고 싶었어.”
“……꼬봉?”
“이강후 말이야. 그 새끼가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알아? 발정 난 개새끼처럼 나한테 메시지를 보낸다고.”
“바, 발정 난, 프….”
최다연의 입술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녀는 무례하고 천박한 단어에 화가 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원작에서도 나왔지. 고상해 보이는 것과 다르게 섹드립과 야한 말을 엄청 재밌어하지.’
단, 본인을 향한 섹드립이나 모욕이 아닐 경우에 한정해서다.
“크흠. 이강후가 내 말을 따르는 부하인 건 맞아. 그런데… 이강후가 구체적으로 뭘 했는데?”
“뭘 했냐고?”
“……왜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지?”
“오늘 아침 이강후 놈이 보낸 메시지다. 직접 봐라.”
최다연의 시선이 내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에게 바짝 붙었다.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당장 여기서 따먹고 싶을 정도로.
이강후 ? 성유진 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강후 ?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이강후 ? 이 일은 부디 아가씨껜 비밀로…. 제발….
이강후 ? 성유진 님이 사용하시기 좋은 창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답장해주십시오.
이강후 ? 성유진 님? 오늘 등교가 늦으시군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이강후 ? 시장하시다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매점으로 가서 빵을 사 오겠습니다. 어떤 음료수를 좋아하십니까?
나 ? 시발. 닥쳐.
이강후 ? 성유진 님. 제발 제게 기회를…!
“보라고. 이 귀찮은 메시지들을.”
“……미안. 이 정도로 멍청한 놈일 줄이야.”
최다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최다연. 난 네게 실망했다. 너 정도 되는 애가. 이딴 새끼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줄이야.”
“……미안해. 그 녀석을 관리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 맞아.”
그녀는 순순히 사과했다.
따지면 그녀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의 잘못은 주인의 잘못이란 논리가 그녀에게는 통한다.
“난 그 새끼 때문에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입학식 첫날, 그 새끼가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화를 내는 척하며 그녀의 머리 옆을 손바닥으로 쿵 쳤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좀 떨어진 곳에 보면 우리가 키스하는 거로 보일지도 모른다.
“…….”
최다연은 피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팔짱 낀 자세로 도도하게 날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이 내 가슴과 목젖 쪽으로 향했다.
아마 내 심장을 뚫어버리거나 목을 그어버리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에게서 살의는 느껴지진 않았지만.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 주제에 너한테 찝쩍거리지 말라더라.”
“……걔가 너한테 말했다고? 너한테 버러지라고?”
“네 그림자도 보지 말라고 하던데.”
“……보상할게. 원하는 게 있으니 날 불렀겠지. 뭘 원해?”
“찝쩍거리지 말라고 했으니, 한 번 찝쩍거려 보려고.”
“정확하게 말해.”
“뒤에 이강후가 있는 거 보이지?”
“……보여.”
이강후의 임무는 최다연의 호위다. 근처에 있을 게 뻔했다.
“그 새끼의 복장을 뒤집어버리고 싶거든. 포옹 한 번만 하자.”
최다연의 성격상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명분은 내게 있는 이상, 못 먹는 감 한 번 찔러는 보자는 심정으로 말했다.
“좋아.”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정반대였다. 무심코 그녀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최다연의 호감도: 42』
어느새 호감도가 올라있었다. 이 정도면 나를 우호하는 수준이다.
“그걸로 내 부하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면 괜찮아.”
“……진짜로?”
“고작 포옹일 뿐이야. 네가 원한 게 아니었어? 빨리 해.”
“진짜 한다?”
“해.”
최다연이 딴말하기 전에 얼른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내 품 안에 꽉 들어왔다. 허벅지까지 오는 긴 검은 머리카락이 내 신경을 간질이고, 그녀의 향기가 가득 들어온다. 상체에 느껴지는 푹신함은 분명 가슴이리라.
양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왼손은 그녀의 등허리를 쓰다듬고, 오른손은 그녀의 엉덩이로 내려갔다.
움찔.
손이 엉덩이에 닿았는데 그녀는 움찔거릴 뿐 날 밀쳐 내지 않는다. 나는 치마 속에 들어가려는 손을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해 겨우 참았다.
“이, 이, 이 미친 새끼가! 아가씨에게 손 떼!”
뒤쪽에서 이강후가 소리 지르며 나를 향해 달려든다. 놈의 살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최다연으로 부터 떨어졌다.
나는 이강후의 주먹을 피하고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그 옆구리를 발로 찼다.
“커억!”
놈이 땅바닥을 몇 번 구른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강후. 주제넘게 뭐하는 짓이야? 움직이지 마.”
최다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강후를 막아섰다. 최다연의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한 이강후는 나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크크. 너 때문에 네 주인이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도 모르고 달려들기는.”
“나, 나 때문…?!”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교실로 향했다.
???
짜아악.
최다연은 이강후의 뺨에 따귀를 날렸다. 마나까지 담은 손 따귀에 이강후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제어해 다시 부동자세를 취했다.
짜아아아악!
이빨 하나가 부서져 바닥을 굴렀다. 코와 입에서 줄줄 흘렀다.
“너 때문에 일이 꼬였어. 알고 있지?”
“…죄송합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수습하겠습니다.”
“어떻게?”
“…….”
이강후가 떠올린 건 암살이었다. 성유진이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암살해서 없애버리는 편이 낫다.
짜아아악!
다시 따귀를 맞은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을 지웠다.
“수습은 내가 했으니, 성유진을 건들 생각은 하지 말고 알아서 기어.”
“……네.”
최다연은 이강후를 지나쳤다. 우아하게 걷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강후는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방금 전의 포옹을 되새기고 있었다.
‘성유진은 날 좋아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