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0화 〉 740. 아카데미의 구원자
740. 아카데미의 구원자
“자네는 영웅련의 심기를 살살 건드렸어. 영웅련에 관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방식을 취했겠지. 자넨 처음부터 나와 접촉하고 싶었던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려고 했다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만났다 하더라도 의미 없는 대화만 나누고 끝났겠지. 지금처럼 자네를 보지 못하고 말이야. 다시 묻겠네. 무엇을 원하나?”
“반대로 묻겠습니다. 영웅련은 어디까지 해줄 수 있습니까?”
“…….”
침묵이 일었다.
박성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영웅련은 내 목적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우리 영웅련은 적당한 수준에서 자네와 타협할 것이네.”
“그 적당한 수준이 정확히 어디까지입니까?”
“자네가 뭘 원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 이제 간은 그만 보고 자네가 원하는 걸 말하게.”
“그전에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박성구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기서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건 협상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에게 이걸로 우위를 점할 생각이었다.
“일주일 전에 찍은 영상입니다. 이때 아주 고생했지요.”
스마트폰을 들어 영상을 틀었다.
마키나가 찍고 편집한 전투 영상이다. 영상 내용은 메비우스라는 빌런 집단에게 습격당하는 나. 영상 속의 나는 일부러 영웅련의 이름을 들먹였다. 메비우스의 리더인 장지욱은 뭔 개소리냐는 반응이었지만, 이 영상에 영웅련이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끄응….”
박성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재밌는 영상을 가지고 있군. 이 영상은 자네만 가지고 있나?”
“아뇨. 이모에게 복사본을 건네줬습니다. 저 혼자서 모든 일을 하기엔 위험부담이 크니까요. 오늘 협상이 결렬되면 이모를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고 싶은 게 있으니까요.”
“이 영상은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어. 국민들은 놀라겠지만, 그뿐이야. 겨우 이 영상 하나로 흔들리기엔 영웅련은 너무 크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공개된 영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영상은 영웅련의 신뢰와 주가를 계속 깎아 먹을 겁니다. 생물에 달라붙은 기생충처럼 말이죠.”
박성구가 나를 노려봤다.
“자네.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협상이 성사되면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은 잊겠습니다. 그리고 제 어머니는 아직 이 일을 모릅니다.”
“……그 영상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는 게 이모라고 했나?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인물인가?”
씨익 웃으며 되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마루한 아카데미에 있는 그 사람 말이네. 자네 모친은 자매가 없지. 그러니 자네가 이모라 불리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지. 나는 그 사람밖에 안 떠오르는군.”
“짐작하시는 사람이 맞습니다.”
“…후. 무섭군.”
“이 협상이 마지노선입니다. 전 영웅련에 가진 개인적인 원한 같은 건 없습니다만, 이 협상이 결렬되면 개인적인 원한이 생길 것 같군요.”
협상이 결렬되면 성하리와 강지영을 이용해 영웅련을 압박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그 협박은 잘 먹혀 들었다.
“알겠네. 이 협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으니 이제 원하는 바를 말하게. 돈은 원하는 건 아니겠지? 영웅련이 가지고 있는 A급 물건을 원하나?”
“윤희정의 채권을 제게 양도해주셨으면 합니다.”
“……윤희정. 아카데미 교사로군. 그 빚이 2,000억이 넘어서 우리 쪽에서도 주시하고 있지. 이자율은 연 3%. 약 60억이지.”
그는 내 속셈을 알아내려는 듯 빤히 쳐다봤다.
“윤희정은 능력이 좋네. 매년 100억 이상을 빚을 갚는 데 쓰고 있다네. 우리 입장에선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다네. 자네는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달라는 건가?”
“예. 그러니 이 난리를 피웠죠. 평범하게 달라고 했으면 절대 주지 않았을 테니까.”
“……왜 윤희정의 채권을 원하는 거지? 학생으로서 교사의 빚을 갚아주려는 건 아닐 테고…. 윤희정에게 원한이라도 가지고 있나?”
“개인적인 일입니다. 주실 겁니까? 주시지 않을 겁니까?”
“…최소 2,000억이 걸린 일이야.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없네. 회장님의 승인이 필요하네.”
“그냥 공짜로 달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1,000억을 드리죠. 어떻습니까?”
“1,000억…. 적은 돈이 아닌데, 가지고 있긴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비트 코인 유행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한몫 단단히 챙겼습니다.”
나는 원작을 통해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현실의 굵직한 사건 몇 개는 원작에서도 나오지.’
그리고 나는 원작 시작 이전의 시간대에서 유희를 시작했다. 돈을 벌 기회는 엄청나게 많았다. 굳이 주식이 아니더라도 미래의 기술, 미래에 유행하는 패션, 미래의 게임 등등. 그것들을 이용하면 돈을 쓸어 담는 건 간단한 일이다.
문제가 되는 건 내 신분이었는데, 그것도 라미아를 통해 해결했다.
‘사실 웃돈을 주고 채권을 사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돈이 좀 부족했지.’
재산은 많은데 당장 쓸 수 있는 자금은 많지 않았다. 투자한 것들이 많았고, 경매에 쓸 돈도 아껴야 한다.
“자넨 날강도나 다름없군.”
“진짜 날강도였으면 1,000억을 지급할 생각도 없었을 겁니다.”
“잠시 기다려주게. 회장님에게 보고하고 오지.”
나는 복분자 주스를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1,000억.
큰돈이다.
하지만 영웅련의 규모를 생각하면 쉽게 메울 수 있는 돈이다. 영웅련은 불법적인 일도 저지르고 있으니까.
15분 후, 박성구가 돌아왔다.
“윤희정의 채권을 자네에게 양도하지. 아, 회장님이 자네에게 꼭 전하라는 말이 있네.”
“뭡니까?”
“우리가 힘이 없어 넘어가는 게 아님을 알아라. 그냥 넘어가는 건 이번뿐이다. …라는 말을 전하라더군.”
“에.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한다는 표정은 아닌 것 같네만….”
영웅련 회장의 말은 철창 너머에 있는 호랑이의 포효소리에 불과했다. 내 뒤에 성하리와 강지영, 진령성가가 있는 이상 영웅련이 움직여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채권 양도는 언제 합니까?”
“오늘은 늦었고 내일 하지. 아, 알고는 있겠지만, 채권을 양도할 때 채무자에게 알려야 하네. 내일 윤희정을 불러서 일을 끝내지.”
“크크. 내일이 기대되는군요.”
“……!!”
내 웃음을 본 박성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자네…. 정말 소름끼치 게 웃는군.”
???
털썩.
윤희정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눈동자로 나와 박성구를 번갈아 쳐다봤다.
“노, 농담이죠? 채권이 유진이에게 양도됐다니…!”
“농담은 아니네. 이런 중요한 일로 농담을 하겠나? 혹시나 해서 말해두겠네만, 계약서에는 아무 문제 없네.”
애초에 계약서는 채권자에게 지극히 유리했다. 무려 2,000억이 넘는 빚인 만큼 채권자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항이 몇 개 있었다.
“가, 갑자기 이러시면…. 제가 잘못이라도 했나요? 빚은 꼬박꼬박 갚고 있을 텐데요…!”
“자네가 잘못한 건 없네. 일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을 뿐이지. 생각해보면 자네에게 꼭 나쁜 일은 아니네. 채권자가 자네 제자가 아닌가? 여러 가지 사정을 봐줄지도 모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윤희정과 박성구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나는 채권양도계약서를 손에 들고 기쁨의 댄스를 췄다. 내가 봐도 놀랄 정도로 사악한 웃음을 흘리면서.
“음…. 난 일이 있어서 가보겠네. 직원들에게 말은 해놓았으니 둘이서 천천히 이야기하다 나가도 상관없네. 아, 윤 선생. 급전이 필요하면 내게 연락하게. 자네의 성실성을 알고 있으니 돈이라면 언제든지 빌려주겠네.”
박성구는 떠났다. 물론 윤희정이 그에게 연락해서 돈을 빌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니까.
“…저, 유, 유진아. 네가 어떻게 그 채권을 양도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난 빚을 갚을 수 있어.”
그녀는 심할 정도로 내 눈치를 봤다. 채무자는 채권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2,000억을 넘는 돈을요?”
“박성구 씨에게 듣지 못했니? 난 매년 100억 이상을 갚아 왔어. 20년 안에 전부 갚는 건 힘들지 몰라도…. 언젠가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어. 이 자리에서 맹세도 할 수 있어. 그러니…. 이상한 짓은 안 시킬 거지? 응?”
“이상한 짓이요? 구체적으로 어떤?”
“…아카데미 성적을 조작해달라거나…, 시, 시험 내용을 유출해달라는 등의 내용 말이야.”
“에이. 제가 선생님에게 그런 요구 따위를 할 리 없잖아요. 사실 전 성적에 별 관심도 없어요. 지각도 밥 먹듯이 하고, 수업 중에 졸아서 벌점만 벌써 5점이 넘을 거요? 전 이미 성적을 포기했어요.”
“…그런 말 하지 말렴.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잖니. 벌점 5점은 상점을 받아 만회할 수 있어.”
“괜찮아요. 그런데 증서를 보니 연대보증인이 있군요. 윤성복, 오진숙. 혹시….”
“부모님이야.”
“흐음. 부모님이 연대보증인이라…. 어쩌다 빚을 지게 되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아.”
윤희정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원래는 이런 말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지만…. 채권자인 넌 알아야겠지.”
윤희정은 구구절절 자신의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충 흘러들었다. 사실 원작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빚의 원인은 윤희종의 오빠, 윤종우에게 있었다. 사업에 실패한 윤종우는 질 나쁜 놈들에게 돈을 빌리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윤종우는 강력한 저주에 걸렸고, 윤희정과 그 가족들은 윤종우의 저주를 풀기 위해 빚을 갚아야 했다. 사채답게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고, 그들 가족은 빚을 갚기 위해 영웅련을 찾아갔다.
윤종우의 빚은 갚았다.
윤종우는 저주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윤종우는 집안에 남아 있는 재산을 모조리 챙기고 도망쳤다. 현재 그는 행방불명 상태다.
“안타까운 이야기군요. 하지만 빚을 없애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도 대가 없이 채권을 양도받은 건 아니니까요.”
“…그러지 마. 돈은 내가 반드시 갚을 테니까.”
“예. 갚을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군요.”
“의문점?”
“아카데미 교사의 연봉은 50억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매년 연봉에 두 배나 되는 100억을 내며 빚을 갚는 거죠?”
“그, 그건…. 내가 주식 같은 걸 하거든.”
윤희정이 흠칫 떨었다. 그녀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다.
“아~ 그렇군요.”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윤희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함부로 내 팔을 쳐내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저녁 식사는 못 하셨죠?”
“…일을 끝내고 바로 온지라 못했어.”
“저도 못 했어요. 근처에 좋은 레스토랑이 있는데 같이 가시죠? 물론 제가 쏘겠습니다.”
“그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식사가 얼마나 걸린다고. 아니면 저 같은 거랑은 같이 밥 먹기 싫으십니까?”
“그, 그럴 리가. 가자.”
“아, 내일 오후에 선생님 사무실로 찾아갈 테니 시간 좀 비워두세요. 채권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알았어. 그, 이 팔 좀 치워주지 않겠니?”
“이런. 제가 또 무심코…. 죄송합니다.”
“괘, 괜찮아.”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
다음날 오후. 수업이 끝나고 윤희정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철컥.
문을 잠그는 걸 잊지 않았다.
긴장한 얼굴의 윤희정이 빤히 날 쳐다봤다.
“문은 왜 잠그는 거니?”
“중요한 이야기라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요. 또 지나가던 누군가가 엿들을지도 모르잖아요. 선생님도 빚쟁이라는 사실이 소문나는 건 원하지 않으시잖아요.”
“…배려였구나. 고마워. 중요한 이야기는 뭐니? 꼭 여기서 해야 하니?”
“따로 만날까요?”
“…여기서 하는 게 좋겠네.”
나는 사무실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윤희정을 향해 손짓했다.
“선생님도 여기로 와서 앉으세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거예요.”
“너무 길어지면 안 되는데….”
윤희정이 일어났다. 그녀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는 그녀가 또각또각 걸어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재킷 사이로 하얀 블라우스에 감싸인 풍만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치마 아래로는 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보였다.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내가 심각한 분위기를 잡으니, 그녀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선생님. 이 영상을 봐주시죠.”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올려 영상을 재생시킨다.
영상을 본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