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0화 〉 750. 가인박명
750. 아카데미의 구원자
박수호를 들먹이며 박가인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 노림수는 잘 먹혀 들었다. 박가인은 박수호와 관련된 정보가 나올수록 두 눈이 빛났다. 그녀가 관심 있게 들어주니 이야기하기도 쉬웠다.
박수호는 옆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간간이 대화에 참가했다.
그러다 박가인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는 게 보였다.
“가인아. 졸려?”
내가 물었다.
“…네. 졸려요. 오빠 친구가 같이 온 건 처음이라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너무 졸려요.”
박가인은 손으로 두 눈을 비비적거렸다. 평범한 사람에겐 몰려오는 졸음 정도는 힘들어도 충분히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백택의 저주에 시달리는 박가인에겐 달랐다. 그녀에게 수면은 저주다. 졸음은 참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리하지 마. 대화라면 나중에 또 할 수 있어.”
박수호가 움직였다. 그는 박가인을 눕히고 이불까지 덮여 줬다.
“유진 오빠. 죄송해요….”
“죄송하기는. 수호의 말대로 나중에 또 이야기하자. 그때는 상태가 더 호전되어 있을 거야. 그리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내가 사줄게.”
“파스타가 먹고 싶어요….”
박가인의 두 눈이 거의 잠겼다. 나는 그러려니 했지만, 박수호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오빠. 난 괜찮아. 저번에도 말했지만 잠드는 게 싫진 않아. 난 항상 꿈을 꿔. 여황제가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꿈이야. 꿈이란 걸 알고 있기에 지루하긴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져서 재밌기도 해…. 아, 이젠 못 버티겠어….”
박가인의 두 눈이 완전히 감겼다. 규칙적인 호흡을 내쉬며 새근새근 잠들었다.
박수호는 한동안 조용히 박가인을 내려다봤다.
“박수호.”
“…아, 형. 미안해요. 잠깐 생각에 잠겼어요. 제가 가인이만 보면 생각이 많아져요.”
“내게 할 말이 있지 않아?”
“와줘서 고마워요. 가인이도 형이랑 얘기해서 즐거워했던 것 같아요.”
“그거 말고.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오늘의 박수호는 평소와 달랐다. 내 눈치를 너무 본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박가인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박수호는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여기서 말하기 좀 그래요. 밖에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래. 밖으로 나가자.”
???
박수호와 이야기를 나눴다.
박수호의 고민은 문신 세계에 관한 것이었다.
“형은 제 능력에 대해 어느정도 아시죠?”
“네가 직접 말했는데 모르겠어? 네 몸에 있는 문신은 다른 세계와 이어져 있잖아. 그리고 문신 세계가 발전할수록 너도 더불어 강해지는 거잖아.”
“네. 정확하게는 문신 세계 자체가 아니라, 문신 세계에 있는 제 영지, 베로프린 도시가 발전할수록 제가 강해지는 거예요.”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박수호를 쳐다봤다. 자주 만나는 편인지라 잘 몰랐는데, 박수호는 처음에 봤을 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지금 네가 D급이지?”
“맞아요. 지금은 C급을 준비하고 있어요. 2개월 안에 C급 헌터가 되는 게 목표예요. 등급이 높을수록 비싼 던전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가만 보면 박수호도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는 문신 세계 능력을 제외하고도, 헌터로서 상당히 출중한 재능을 갖추고 있다.
“마나는 각성했고?”
“문신 세계의 힘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마나를 각성했어요.”
“마나를 각성했다면 C급 헌터가 되는 건 시간문제네. 뭐가 문제야?”
“후우. 그게…. 문신 세계가 발전하고 넓어지면서 다른 외부 세력과 맞닥뜨렸어요. 솔리트 공화국이란 세력이에요.”
“외부 세력? 나쁘지 않네. 외교같은 걸로 더 발전할 수 있잖아.”
[백환] 세계의 영주로서 안다. 외교는 중요하다. 특히 무역을 하게 되면 돈을 쉽게 모을 수 있다. 현실의 지식과 물건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박수호도 현실의 물건을 문신 세계로 가져갈 수 있으니 문신 세계의 발전은 더 가속화될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솔리트 공화국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에요. 저번에 공화국에서 사절이 왔는데 베로프린을 통째로 넘기라는 통보를 받았어요.”
박수호의 베로프린 도시는 국가에 속하지 않은 중립 도시였다.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도시이니 다른 세력이 야욕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다.
“공화국이면 소속되어도 되지 않아? 계속 중립 도시로 유지하는 것보다 그게 더 든든하고 안전하잖아.”
“네.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솔리트 공화국에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기가 차더라고요. 솔리트 공화국은 말만 공화국이지 실제로는 5인의 마도원수가 지배하는 왕국이나 다름없어요.”
“음. 그래도 처세만 잘하면 괜찮지 않아?”
“솔리트 공화국의 조건이 문제예요. 도시에 요구하는 세금이 무려 60%예요. 60%. 형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
박수호가 울분을 토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잠자코 들었다.
60%.
현실이 아니라 중세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60%는 합당한 세율이 아닌가?
‘내가 솔리트 공화국의 지도자였다면… 우선 군사부터 일으켜 베로프린을 점령했을 텐데.’
그리고 세금은 90%를 요구한다. 반항한다? 싹 다 모가지를 잘라 본보기를 보여준다. 그럼 멍청한 개돼지들은 고분고분 따를 것이 틀림없다. 물론 미녀들에겐 좋은 대우를 보장해주고.
“60%. 전 이 세율을 듣자마자 내 귀가 의심스럽더라고요. 현재 베로프린 도시의 세금은 70%가 도시 발전에 투자되고 있고, 20%는 인건비 등의 고정 지출, 나머지 10%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저축하고 있어요. 공화국에 60%의 세금을 내고 도시 발전을 하려면 못해도 80% 이상의 세금을 거둬야 해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시민들의 생활은 박살 나요.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게 되죠.”
박수호에게서 베로프린 도시의 발전은 매우 중요했다. 도시 발전도에 비례하여 박수호도 강해지기 때문이다.
“네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건 알겠어. 근데 베로프린의 다른 시민들의 의견은 어떤데?”
박수호는 도시 운영 스타일이 나와는 달랐다. 나는 시민들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다. 그러나 박수호는 무작정 도시만 발전시키지 않고 시민들의 생활도 개선되기를 원했다.
“엘리샤와 시민들은 저항해야 한다고 했어요. 솔리트 공화국에 소속되면 삶은 더 고달파지니까요. 베로프린의 시민들은 다른 도시에서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이라 더 그래요.”
“이미 결론은 났네. 시민들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되잖아.”
“솔리트 공화국과 베로프린의 체급차이가 너무 커요.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며칠 버티는 게 고작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시민이 죽을 거예요. 전 제 욕심 때문에 시민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아요.”
거대 세력이 강도가 되어 압박해온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시츄에이션이다. 하지만 박수호의 얼굴은 굳어 있어도 절망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해결책이 마련한 것이다.
“네 상황이 많이 곤란하단 건 알았어. 이제 말해. 내가 뭘 해주기를 바라는 거야?”
“……3일 뒤에 마도원수가 베로프린 도시로 올 거예요. 최후통첩을 하기 위해서…. 아니, 도시를 점령할 목적으로요.”
“군대가 아니라?”
“솔리트 공화국은 적이 많아요. 군대를 움직이는 것에도 돈이 필요하고, 함부로 움직였다간 다른 문제가 터질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게다가 웬만한 군대보다 마도원수 한 명이 직접 움직이는 게 더 확실하죠.”
“그 마도원수를 같이 죽여달라고?”
“죽이면 곤란해요. 제 목적은 마도원수에게 베로프린 도시를 함부로 볼 수 없는 무력을 보여주는 거예요. 베로프린을 억지로 점령하려고 할 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걸 보여주면, 최소 5년의 시간은 벌 수 있어요. 솔리트 공화국의 내부는 썩 좋은 상황이 아니니까요.”
박수호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세요, 형. 저 혼자서 마도원수를 감당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형이 있으면…. 마도원수도 베로프린을 무시하지 못할 거예요.”
“친한 동생이 부탁하는데 안 도와줄 수 없지. 고개 들어. 도와줄게.”
박수호의 문신 세계, 베로프린 도시는 내가 심심할 때마다 찾아가는 놀이터다. 그 놀이터의 발전이 느려지는 건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내가 박수호를 돕지 않으면 엘리샤가 위험해진다. 나는 엘리샤를 잃고 싶지 않다.
“고마워요! 유진 형!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너니까 도와주는 거야. 나중에 내가 도와달라고 했을 때 모른 척하지 마.”
“제힘이 필요한 일이라면 꼭 도와드릴게요!”
“근데 저번에 문신 세계에 들어갈 때 제한이 있지 않았어?”
저번에 3일에 한 번. 4시간 동안 문신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다.
“예전에는 그랬는데 능력이 발전하면서 제한 없이 문신 세계에 들어가는 게 가능해요.”
“그래? 내일 문신 세계에 들어가자. 엘리샤랑은 어때? 잘 지내고 있어? 그때 보니 보통 관계가 아닌 것 같던데.”
엘리샤의 이름이 나오자 박수호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엘리샤와는 직장 동료 관계에 가까워요.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에요.”
“호오. 그래? 다른 관심 있는 여자는 없고?”
“그게…. 없어요.”
박수호가 대답하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렸다. 머릿속으로 어떤 여자를 떠올린 게 분명했다. 하승희는 아닐 것이다. 박수호는 그날 이후로 하승희에 대한 마음을 접었으니까.
‘문신 세계의 여자가 확실하군. 저번에 크게 데였으니 사랑은 아닐 테고. 그냥 관심만 있는 상태인가? 누구지? 문신 세계의 웬만한 미녀들은 거의 다 내가 따먹었는데.’
엘리샤를 제외하고도 박수호 몰래 따먹은 여자가 꽤 된다.
박수호는 모른다.
박수호는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적에 대해서 자동으로 알게 되지만, 그 영역이란 엘리샤가 머무는 도시 관저 근처다. 그 외의 다른 곳은 직접 관조하거나, 시민으로부터 보고를 받지 않으면 알 방도가 없다.
‘박수호의 수면 시간을 이용하면 들키지 않고 활동할 수 있지.’
엘리샤의 도움을 받으면 박수호의 눈을 가리는 건 일도 아니다.
‘대체 누구를 관심에 두고 있는지 궁금하군.’
굉장히 궁금했다.
???
박수호와 함께 문신 세계로 이동했다.
공간 이동 주문서를 이용해서 몰래 문신 세계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당당히 박수호와 함께 이동했다. 기분이 새로웠다.
베로프린 도시는 내가 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발전해 있었다. 못 보던 건물이 들어섰고, 사람도 훨씬 많아졌다. 길도 잘 닦여 있고 역겨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중세 판타지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저건… 트럭이랑 굴착기?”
“지구에서 가져왔어요. 새것은 아니고 중고에요. 여러 문제가 있어서 브로커를 이용했는데…. 중장비가 있으니 편하더라고요. 아, 시민들은 마법으로 움직이는 골렘 종류로 알고 있어요.”
“저게 있으면 빠르게 발전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수호야. 혹시나 해서 묻는데, 헌터로 벌어들인 수입 대부분을 여기에 투자하는 건 아니지?”
“병원비와 최소한의 생활비, 비상금을 제외하고 전부 투자하고 있어요. 도시가 발전해야 제가 더 강해지고, 제가 강해지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혹시 비누도 만들어서 팔고 있어?”
“그러려고 했는데 이미 이 세계에 비누나 샴푸가 있더라고요. 웬만한 건 다 있어요. 마법 냉장고도 300년 전에 만들어졌고요.”
“시민들의 얼굴이 밝네. 왠지 도시 근처에 광산이 있을 것 같은데.”
“어, 형 어떻게 알았어요? 저번에 찾아온 드워프 일족이 도시 근처에 막대한 양의 철이 매장된 광산이 있다고 보고하더라고요. 솔리트 공화국이랑 인력 부족 때문에 아직 개발은 미루고 있지만요.”
“음. 아마 오리하르콘이나, 미스릴, 아다만티움, 비브라늄 같은 초희귀 금속이 있을 깊숙한 곳에 있을 수도 있어. 주의 깊게 개발해봐.”
“에이 설마요.”
“근처에 숲도 있지?”
“와, 족집게네요. 근처라고 하기엔 이틀 거리지만 서쪽에 숲이 있어요. 숲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서 탐사해야 하는데…. 지금은 바빠서 틈이 없어요.”
“잘 탐사해. 엘프가 있으면 잘 꼬시고.”
“하하. 엘프라니. 설마 있겠어요.”
우리는 잡담을 나누며 시장 관저로 걸어갔다. 도중에 한 여성과 마주쳤다. 꽃집을 운영하는 땋은 갈색 머리의 여성이었다. 풍만한 몸매에 부드러운 분위기를 흘리는 미녀다.
“어머! 시장님! 오랜만이네요!”
“오, 오랜만이야. 마틸다.”
“예쁜 히아신스 꽃이 있는데 한 번 보실래요?”
“직접 기른 거지? 정말 예쁜 꽃이야.”
박수호가 쭈뼛거렸다. 관심 있는 여자가 마틸다였던 모양이다.
박수호에게 생긋 웃어주던 마틸다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마틸다의 얼굴이 음탕해졌다. 눈이 가늘어지고 살짝 벌린 입에서 선홍색 혀가 나와 도톰한 입술을 핥았다.
마틸다는 이미 나한테 따먹히고 좆집이 된 년이다.
‘클리토리스가 약점이었지. 크크.’
오른손을 들어 검지와 중지 사이에 엄지를 찔러 넣었다. 그러자 마틸다는 투명한 자지를 잡는 척하더니 입에 넣는 시늉을 했다.
“마틸다. 이 꽃 좀 포장해주겠어?”
“네. 시장님.”
박수호가 부르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청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