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2화 〉 752. 가인박명
752. 가인박명
저 멀리서 도시로 달려오는 사두마차가 보인다. 마차 위에는 솔리트 공화국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마차가 점점 다가오면서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마차를 끄는 말이 평범한 말이 아니라 육체가 물로 이루어진 말이었기 때문이다. 4마리의 물의 말을 제어하는 마부도 없었다.
“몬스터?”
이곳은 이세계다. 내가 모르는 종류의 몬스터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뇨. 제가 볼 땐 마법인 것 같아요. 예카테리나는 물의 마도사니까요.”
“거참. 이 세계도 대단하구만.”
마차는 점점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보니 더 압권이었다. 물의 말은 진짜 말보다 덩치가 컸고 더 사나워 보였다. 마차는 또 어찌나 화려한지. 왕족의 마차라 해도 믿을 정도다.
다그닥다그닥.
마차는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제 할 일을 끝낸 말의 형태가 무너지더니 물웅덩이가 되었다. 그리고 마차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파란색 하이힐을 신은 발이었다. 그리고 다리를 감싼 검은색 스타킹이 보였다.
그녀는 검은색 망토를 어깨에 걸쳤다. 망토 사이로 파란색 천 옷이 보인다. 천 옷은 몸에 달라붙어 풍만한 몸매를 유감없이 과시한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려설 때, 청명한 하늘색 머리카락이 출렁거렸다.
예카테리나는 당당히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적의를 내뿜는 2,000명의 병사들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다. 아니, 그녀의 기세가 이곳을 서서히 장악하고 있다.
‘생각보다 더 강해.’
정확히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유희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러 강자를 본 내 감각이 말하고 있다. 예카테리나는 내가 상대할 수 없는 강자라고.
‘도시 하나를 몰살했다고 했을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직접 마주하니 압박감이 다르군. 너무 쉽게 봤어.’
어쩌면 베로프린 도시는 오늘 멸망할지도 모르겠다. 박수호는 여기서 다른 시민들과 죽을 각오까지 했을지도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영 위험하면 공간 이동 주문서로 좆집들 데리고 도망쳐야지.’
예카테리나가 웃었다. 요염하면서도 장난기가 담긴 미소였다.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는 정확히 박수호에게 향했다.
“이렇게 성대하게 환영해주다니. 마음에 드는걸.”
나도 마음에 들었다. 될 수 있으면 자빠뜨려서 내 자지로 굴복시키고 싶다.
박수호는 조용히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예카테리나 바실리노바 마도원수님이십니까?”
“내가 예카테리나가 아니면 누가 감히 그 이름을 사칭할 수 있을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카테리나 님. 전 베로프린 도시의 시장인 박수호입니다.”
“들었던 대로 이계인이구나. 흥미롭네. 계속해봐.”
예카테리나가 팔짱을 꼈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가슴을 가늠했다. 가슴골이 파인 옷이었기에 눈대중으로 크기를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E컵이다.
“…저희는 솔리트 공화국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솔리트 공화국의 의견을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베로프린 도시는 중립 도시로 남을 것입니다.”
“그 말은 좀 이해하기 힘드네. 우리의 요구는 별로 어렵지 않잖아. 공화국의 법을 따르고 60%의 세금을 내면 너희는 평화롭게 살 수 있어. 세금을 내기 그렇게 싫어?”
“베로프린 도시는 앞으로 더 발전할 겁니다. 솔리트 공화국의 법과 문화는 베로프린의 앞날을 막는 장애물밖에 되지 않습니다.”
“의견이 좀 다르네. 솔리트 공화국에 들어오면 너희는 지금보다 더 빠르게 발전할 수 있어. 내가 약속할게.”
“……저와 시민들은 솔리트 공화국을,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믿기에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당했습니다.”
“설득은 통하지 않을 것 같네. 하긴 무장한 병사들까지 준비했는데 몇 마디로 설득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예카테리나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녀도 이미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대화를 한 건 단지 형식적인 일 처리에 불과했다.
“마지막 경고이고 선고야. 솔리트 공화국으로 들어와.”
“죄송합니다만, 저희의 의지는 꺾이지 않습니다.”
“흐으음. 그 의지가 얼마나 갈지 한 번 실험해볼까.”
예카테리나의 망토가 펄럭인다. 그녀를 중심으로 마나가 요동친다.
병사 중 방패병이 앞으로 나섰다. 박수호는 검을 뽑고, 나는 자세를 낮추고 화련비도의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말로만 듣던 이계인을 보는 건 처음이라 꽤 기대하고 있으니, 날 실망시키지 마.”
예카테리나의 오른손에 마나가 모인다. 그녀가 손을 휘둘렀다. 딱 붙여진 검지와 중지 끝에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길이만 300M가 넘는 거대한 채찍이 되어 주위를 후려친다.
“방패병! 버텨라!”
경비대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러나 불가능한 요구였다. 2,000명의 병사는 마나도 사용할 줄 모르는 일반인이 대다수다. 예카테리나의 물의 채찍을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으아아아아악!”
“살려줘!”
“다리가! 다리가 부서졌어!”
방패병들의 곡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나와 박수호는 물의 채찍을 위로 점프하는 것으로 쉽게 피했다. 물의 채찍은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형! 우리가 나서야 해요! 우리가 나서서 예카테리나를 막아야 해요! 하다못해 시선이라도 끌어야 병사들이 안전해져요! 이대로 가다간 학살만 당할 뿐이에요.”
“좀 힘들 것 같긴 한데…. 최선을 다해보자. 네가 정면이야. 알았지?”
“네!”
“달려!”
박수호가 내달린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뇌전을 사용했다.
새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벼락이 떨어졌다. 물로 만들어진 우산이 나타나 벼락을 막아냈다. 예카테리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손가락을 휘둘렀다. 두 번째 물의 채찍이 날아온다.
나와 박수호는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피했으나, 병사들은 달랐다. 버텨줄 방패병이 무너지고, 창과 검을 든 병사들이 물의 채찍을 맞아 뒤로 날아간다. 갑옷을 갖춰 입은 병사들이기에 대부분이 경상자였고,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세 번째 채찍은 좀 많이 아플 거야.”
“그마아아안!”
박수호가 소리 질렀다. 온몸으로 예카테리나의 물의 채찍을 막아냈다. 박수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문신 능력을 쓰고 있군. 그렇다고 해도 저 맷집은 말이 안 되는데…. 성벽을 강화시킨 영향이 나오는 건가?’
콰앙!
박수호와 예카테리나 사이에 폭발이 일어났다. 박수호가 문신 능력을 이용해 마법을 쓴 게 틀림없다. 정확하게는 도시 안에 있는 마법사가 쓴 마법을 문신을 통해 발현한 것이겠지.
‘저 여자가 이걸로 끝나진 않겠지.’
폭발에 의해 발생한 연기 장막이 예카테리나의 시야를 가려줬다. 좋은 기회였다. 나는 기척을 숨겨 예카테리나의 뒤쪽으로 이동해 습격했다.
영천류(影天流) 뇌광(雷光).
붉은 빛살이 예카테리나의 등을 베어냈다. 피가 솟구친다.
‘…피가 아니야. 이건 붉은색 물이야.’
예카테리나의 몸이 물이 되어 사라졌다. 나와 박수호는 당황해서 서로를 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재밌네. 한 사람은 마법은 아닌데 번개의 힘을 쓰고…. 다른 한 사람은 아예 이상한 힘을 쓰네?”
예카테리나는 마차 위에 앉아 있었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예카테리나의 치마 속, 보라색 팬티 일부가 엿보였다.
“형! 피해요!”
“뭐?”
반응했을 땐 늦었다. 바닥의 물웅덩이에서 물기둥이 솟구쳐 내 몸을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순식간에 50M 이상 떠오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 몸은 아직도 위로 올라가고 있다. 물기둥 주제에 터무니없는 힘이었다.
‘젠장. 너무 정통으로 맞았어. 온몸이 다 쑤시네.’
몸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땅에 떨어지면 죽진 않더라도 팔이나 다리 하나는 부러질 것이다.
‘어차피 다리가 부러질 거라면 차라리 공격이라도 하자.’
발에 마나를 모아 허공을 찼다. 망치로 다리를 얻어맞는 고통이었다. 입술을 꽉 깨물며 예카테리나를 향해 칼끝을 내밀며 쇄도한다.
영천류(影天流) 낙뢰(落雷).
파지지지직! 붉은 번개가 내 몸을 감싼다.
에카테리나가 날 올려다봤다. 그녀가 소리 없이 웃으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내 주위에 물의 고리 10개가 나타났다. 물의 고리는 줄어들더니 그대로 내 몸을 속박했다.
“망할!”
나는 기술을 사용하는 도중이었다. 물의 고리를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붉은 번개도 물의 고리를 끊지 못했다. 물의 고리에 속박당한 나는 속절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마나로 최대한 몸을 강화했으나, 몸이 속박되어 낙법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나는 기절했다.
“…….”
눈을 떴다. 몸을 구속하고 있던 물의 고리가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진 않았다. 바로 몸을 일으켰다.
전투는 끝나 있었다.
병사들은 사방에 널브러져 있고, 드워프와 마법사들이 강화한 성벽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부서져 있었다.
“후후후. 재밌었어. 힘을 이렇게까지 쓰는 건 오랜만이야.”
예카테리나가 웃으며 바닥에 쓰러진 박수호를 하이힐을 신은 발로 퍽퍽 밟았다.
“커억! 억!”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박수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예카테리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느릿한 주먹은 예카테리나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예카테리나에게 종아리를 걷어차인 박수호가 바닥에 무릎 꿇었다.
“베로프린 시장…. 박수호라고 했지? 합격이야. 베로프린도 마음에 들고, 너도 마음에 들어. 네가 더 발전한다면 내 도움이 될 거야.”
“베로프린을… 넘길 생각은 없다….”
나는 기척을 숨기고 그녀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췄다. 허공에 나타난 물의 창 수 십 개가 나를 겨누고 있었다. 움직이는 순간 창꽂이가 되어 죽을 것이다.
‘……냉정하게 살펴보면 죽은 병사는 별로 없어. 온몸이 쑤시긴 하지만 나도 죽진 않았고…. 다른 목적이 있는 건가. 지켜볼까.’
예카테리나는 박수호의 머리채를 잡아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
“너한테 3가지 선택지가 있어. 하나는 솔리트 공화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다른 하나는 이대로 내게 몰살당하는 것.”
“베로프린은…!”
“들어보라니까 그러네.”
“커억!”
박수호의 허벅지를 발로 찍었다. 뾰족한 하이힐이니 무척 아플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내 동맹이 되는 것. 잘 들어. 솔리트 공화국이 아니라 내 동맹이 되는 거야. 물론 겉으로는 솔리트 공화국 소속이 되겠지만, 세금은 10%로 봐줄게. 내가 막아줄 테니 솔리트 공화국이 베로프린에 간섭하는 일도 없을 거야.”
“……무슨 꿍꿍이입니까?”
박수호가 차분하게 반문했다. 예카테리나의 제안은 베로프린에게 이득이었다. 그렇기에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부적인 문제야 자세히 설명할 순 없어. 그래도 조금 설명해주자면 내게도 적이 있고, 난 세력이 필요해.”
“……믿어도 됩니까?”
“네가 안 믿으면 어쩔 건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박수호는 약자였으니까.
“……당신의 동맹이 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베로프린의 힘은 확인했어. 3년… 아니, 2년만 지나도 큰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넌 조금 못 미덥네. 시험 좀 해야겠어. 괜찮지?”
“…제가 거부할 수 있습니까?”
“못 하지. 후후후.”
예카테리나는 머리채를 쥔 손을 풀었다. 박수호의 몸이 땅바닥으로 고꾸라진다.
“박수호. 난 네가 마음에 들었어. 그러니 실망시키지 말아줘?”
기절한 박수호는 대답이 없었다.
예카테리나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박수호를 대할 때와 달랐다. 나를 보는 시선과 표정은 훨씬 서늘했다.
“넌 어떡할래?”
“전 박수호 시장의 의견을 따릅니다.”
무기를 바닥에 내리고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가망 없는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다.
“넌 좀 별로네.”
예카테리나는 경멸 서린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난 유리아를 소환할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
예카테리나는 베로프린에 머물게 되었다. 그녀에게 패배한 베로프린은 반항할 수 없었다.
박수호는 다음날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예카테리나의 3가지 시험을 받아야 했다. 나는 예카테리나의 앞에 나섰다.
“수호에겐 회복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 가지 시험 중 하나는 제가 대신 치르겠습니다.”
“네가? 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녀는 소리 없이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이계인에게 흥미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도 수호와 같은 지구 출신입니다.”
“너도 이계인이라고? 하긴 그 특이한 힘을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네. 좋아. 첫 번째 시험은 네가 대신해. 단, 실패하면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