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9화 〉 759. 가인박명
759. 가인박명
손을 펼쳐 오른손의 작은 돌멩이를 확인했다. 아까 빅토르가 날 일으켜 세워줄 때 몰래 건넨 돌멩이다. 길거리에 흔히 보이는 연갈색의 돌멩이다.
두 눈을 집중했다. 돌멩이의 표면에 한글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이 세계의 인간인 빅토르가 한글을 알 리 없다. 이건 박수호가 쓴 것이다.
‘빅토르와 박수호는 예카테리나를 만나기 전에 미리 만나 이야기를 했다는 거지. 뭐, 놀라운 일은 아니야.’
중요한 건 돌멩이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예카테리나 몰래 제 방으로 와주세요.
굳이 몰래 오라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예카테리나의 감시 말고도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돌멩이를 만지며 예카테리나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예카테리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망토와 하이힐을 벗었다. 스타킹을 신은 발을 내게 내민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다리를 잡아 주물렀다.
“예카테리나 님. 빅토르와 박수호가 제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저희 세계의 문자가 적힌 돌멩이를 제게 몰래 건네주더군요.”
“그래? 그 영감 또 시작이네.”
예카테리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미 지금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돌멩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마법으로 돌멩이를 부쉈다.
“예카테리나 님 몰래 자신의 방으로 오라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조금 있다가 찾아가. 뭐, 무슨 수작을 부릴지는 대충 알고 있긴 하지만.”
내 손은 그녀의 발을 주무르며 점점 위로 올라갔다. 종아리를 만지고 허벅지를 꾹꾹 눌렀다. 손은 아슬아슬한 부위까지 올라가는데도 예카테리나는 저항하지 않는다. 마사지를 받는 느낌으로 나른하게 침대에 누워있을 뿐이다.
나는 침대 옆의 테이블을 힐끗거렸다. 못 보던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 이 세계의 문자를 모르기에 읽을 수는 없다. 다만, 그림으로 된 지도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저게 궁금해?”
“…죄송합니다. 살짝 신경이 갔습니다.”
“가르쳐줄 수 있어. 박수호는 몰라도 넌 내 애완동물이니까. 사실 그리 중요한 서류도 아니고.”
“봐도 모릅니다. 전 이 세계의 문자는 모르니까요.”
“후후후. 그랬지. 그래도 이건 알지?”
예카테리나가 손을 까딱였다. 지도가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다.
“…모르겠습니다. 이 세계의 지리는 잘 몰라서.”
“이건 솔리트 공화국의 지도야.”
나는 다시 지도를 자세히 살펴봤다. 솔리트 공화국 지도는 선으로 분할되어 색칠이 되어 있었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랑, 검정. 하양. 총 6개의 색으로 덮여 있다. 가장 색이 많은 건 노랑이고, 가장 색이 적은 건 파랑이었다.
“지도를 봐도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도원수의 세력도야. 하얀색은 중립이고 다른 다섯 가지의 색은 마도 원수를 뜻하지.”
“…혹시 파랑색이 예카테리나 님입니까?”
“맞아. 이 지도에서 가장 적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반면에 노랑색, 빅토르는 혼자서 30%를 차지하고 있어.”
이렇게 보니 예카테리나가 얼마나 불리한지 알겠다. 예카테리나의 지분은 10%도 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빅토르가 왕이라 해도 믿겠습니다.”
“그 의견은 동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해. 빅토르는 거의 40년 동안 마도원수 노릇을 했으니까. 역대 마도원수 중 가장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지. 반면에 나는 고작 4년. 최대한 세력을 모았지만 이게 전부야.”
“하얀색. 중립은 회유한다면….”
“그게 하겠다고 쉽게 되는 일이 아니야. 중립을 유지하는 만큼 만만히 볼 수 없는 저력을 가지고 있어. 무엇보다 마도원수들의 견제가 심해. 마도원수 중 누군가가 얻을 바에야 차라리 모두 갖지 않는다라는 분위기가 깔려 있는 상태야.”
“그래서 예카테리나 님은 베로프린 도시를 가지려는 거군요.”
“맞아. 베로프린 도시를 얻으려고 원수회에 손을 썼지. 나 혼자 베로프린에 온것도 그 때문이야. 아직 솔리트 공화국의 영향력이 받기 전에 내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빅토르가 찾아온 건 예상 밖이었지만.”
지도는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갔다.
“예카테리나 님이 세력을 모으시는 이유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살기 위해서야. 사람이 너무 뛰어나면 질투를 받는 법이야. 특히 빅토르. 그 늙은이는 날 향한 질투가 얼마나 심한지…. 내가 그 영감한테 죽을 뻔한 경험이 2번이고, 정치적으로 매장당할뻔한 경험이 7번이야.”
“겉으로 봤을 땐 친절해 보이던데요.”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마. 그 영감이 뒤에서 얼마나 해먹는지 알면 놀라 까무러칠걸.”
내 손은 그녀의 치마 속, 허벅지와 골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했다.
“앗흐응….”
예카테리나에게서 달콤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손이 멈췄다. 그녀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마법의 힘이 내 머리를 누른다. 내 얼굴은 그녀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왜 넌 날 배신 안 한 거야? 난 네가 말하기 전까지 돌을 받은 사실을 전혀 몰랐어. 배신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전 그딴 늙은이보다 예카테리나 님이 더 좋습니다.”
“…귀엽네.”
예카테리나가 내 머리를 잡고 당겼다. 나와 그녀의 입술이 포개진다. 살짝 젖어 있는 촉촉한 입술이었다. 조금 놀랐다. 지금까지 그녀는 내게 단 한 번도 키스한 적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고 혀가 나와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혀는 어색하게 움직이다가 금세 능숙해졌다. 나는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팬티를 아래로 내리고 젖어있는 보지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어쩌면 오늘 섹스할지도 모르겠군.’
내 예상은 빗나갔다. 키스는 했지만, 섹스까지는 하지 않았다.
???
예카테리나의 방을 나와 박수호의 방으로 들어갔다. 박수호와 빅토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 형! 예카테리나는요?”
“마법 실험을 하고 있어. 당분간은 날 찾지 않을 거야.”
“후우. 잘됐네요.”
빅토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아까 봤지만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지. 솔리트 공화국의 마도원수인 빅토르 드로즈코프네. 빅토르라고 부르게.”
“성유진입니다. 아까는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그게 어떻게 자네 때문인가. 모두 예카테리나의 포악한 성정 때문이지. 같은 마도원수로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울 지경이야. 내가 예카테리나 대신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그것보다 절 부른 이유가 궁금합니다.”
빨리 예카테리나의 방에 돌아가서 예카테리나의 몸을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자네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할 필요 없겠지. 원래 내 목적은 예카테리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본국에 귀환하는 것이었네. 하지만 자네도 보다시피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지.”
“네. 예카테리나는 적어도 앞으로 몇 개월은 베로프린에 머물 것 같더군요.”
“예카테리나의 성정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네. 자네들을 위해서도, 공화국을 위해서라도 내버려 둘 수 없네.”
“공화재판부의 영장이라고 했던가요? 그것만 받으면 예카테리나를 데려갈 수 있지 않습니까.”
“공화재판부의 영장을 받아내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리네. 평범한 일개 시민이라면 내 권한으로 어떻게든 했겠네만…. 예카테리나는 나와 같은 마도원수네. 절차를 밟는데도 최소 2개월은 걸리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박수호에게는 말이다. 눈동자만 굴려 박수호의 표정을 확인했다. 거무죽죽하게 죽은 얼굴은 그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려준다.
“…다른 방법이 있기에 절 부른 것이군요. 아마도 그 방법에는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을 테고.”
“자넨 눈치가 빠르군. 그 말대로네. 나는 예카테리나를 강제로 본국에 데려가기로 했네. 박수호 시장은 내게 협력을 약속했지.”
박수호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얼씨구나 협력했을 것이다. 가장 큰 골칫거리인 예카테리나를 치우고 빅토르의 라인을 타면 훗날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저도 협력하겠습니다.”
“시원하게 말해주니 고맙네.”
“예카테리나에게 당한 게 워낙 많아서요.”
“이해하네.”
빅토르는 허공에 우아하게 손짓했다. 공간이 갈라지며 작은 약병이 나왔다.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는 약병이다.
“미스테르의 물을 아나?”
“처음 들어봅니다. 그 약병에 있는 액체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네. 이게 미스테르의 물이지. 아, 약은 아니네. 사람에게 해를 끼치니 독에 가깝지.”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겠군요.”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군. 부탁하겠네. 내일 아침에 예카테리나에게 먹여 중독시키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미스테르의 물의 정확한 효과는 무엇입니까?”
“마나 흐름의 방해네. 한 병을 복용하면 적어도 24시간 이상은 지속되지.”
“중독된 예카테리나는….”
“내가 예카테리나를 제압해 본국으로 데려가겠네. 예카테리나는 본국에서 재판받을 것이니 베로프린 도시는 예카테리나로부터 안전할 것이네.”
“중독 직후에 마법을 사용하면 바로 들키지 않습니까?”
“이 약은 마나를 사용할 때마다 효과가 커지네. 중독 직후에는 컨디션 난조라고 생각하겠지. 바로 들킬 일은 없으니 안심하게.”
빅토르가 미스테르의 물을 내게 건넸고, 나는 받았다.
빅토르는 웃지 않았다. 한없이 근엄한 얼굴로, 한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부탁하네.”
“부탁해요. 형.”
내 옆으로 다가온 박수호도 말했다. 나는 미스테르의 물을 주머니에 주섬주섬 넣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
그날 밤, 나는 예카테리나에게 빅토르와 박수호의 계획을 모두 말했다. 예카테리나는 내 이야기를 듣고 코웃음 쳤다.
“역시 그 영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네. 미스테르의 물이라…. 독보다 더 성가신 물건을 쓰는 걸 보니 이번에 작정하고 칼을 갈았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빅토르의 아침 식사에 미스테르의 물을 넣을까요?”
“소용없을 거야. 그 영감은 자기 몸 하나는 엄청나게 아끼니 해독제를 가지고 있겠지. 그러니 일단은… 당하는 척해줄까.”
예카테리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날 도와줄 거지?”
“물론입니다. 전 예카테리나 님의 편입니다.”
예카테리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마치 한 마리의 뱀처럼 요염하게 내 몸에 달라붙는다. 그녀의 서늘한 손이 내 가슴을 문지르고, 다른 한 손은 바지 안으로 들어가 내 자리를 만진다.
“내일도 잘하면… 지금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는 상을 줄게.”
“그 상이 뭘지… 무척 기대되는군요.”
예카테리나는 내 목덜미를 핥으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무전기를 누르고 박수호에게 보고했다.
“수호야. 성공했어.”
“들키진 않았죠?”
“들켰으면 내가 무사했겠어? 하지만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야. 곧 마법 실험을 하러 간다더라.”
본격적으로 마법을 쓰면 마나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챌 것이다. 뭐, 예카테리나는 중독되지 않은 상태지만.
“…형. 미안한데 예카테리나를 구슬려 도시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없을까요?”
“예카테리나를?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왜?”
“베로프린 도시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했는데…. 힘들다면 괜찮아요.”
“……불가능한 건 아니야. 한 번 시도는 해볼게.”
“고마워요. 형. 계속 형에게 신세를 지네요.”
무전기를 끊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예카테리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처럼 검은 망토를 걸치고 전투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예카테리나 님. 도시 밖으로 나가시는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오히려 이득이라 생각됩니다. 도시 내에서 전투를 벌이면 병사들이나, 베로프린의 마법사들이 방해할 가능성이 큽니다. 베로프린 도시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예카테리나 님에게 훨씬 이득입니다.”
“후후. 동의해. 훨씬 이득이지.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어. 박수호에게 내가 산책을 하러 간다고 말해.”
“어디로 가실 겁니까?”
“당연히 동쪽에 있는 작은 호수지.”
“작은 호수가 아닙니다만.”
나는 무전기에 다시 연락했다.
박수호는 예카테리나의 산책을 화려하게 준비했다. 예카테리나가 마법을 쓰는 걸 막기 위해서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예카테리나는 박수로를 몇 번 놀려 먹은 뒤에 마차에 탑승했다. 박수호는 마부석에 앉아 직접 말을 몰았고, 나는 예카테리나와 함께 동승했다.
마차는 동쪽 호수 앞에서 멈췄다. 마차 문을 열고 내가 먼저 내렸다.
미리 도착해있던 빅토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수호는 마차에서 내려 검을 손에 들었다. 나도 화련비도를 무장했다.
이윽고 예카테리나가 마차에서 내렸다.
“난 호수를 보러왔는데 왜 재수 없는 영감이 내 앞에 있는 거야. 짜증 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