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0화 〉 770. 광명승천도
770. 광명승천도
“…미안하다, 성유진. 내가 너무 흥분했었어.”
“아. 이해합니다. 용서하지요. 처형. 가족이 될 사이인데 벌써부터 얼굴을 붉히면 서로에게 안 좋지요.”
성유진이 손을 뻗어 남궁설의 어깨와 옆구리를 만지작거린다. 남궁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 처형. 사과할 일이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나는 다른 잘못은 하지 않았어.”
“약속을 어기지 않았습니까. 저랑 아침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남궁린은 어젯밤을 떠올렸다. 그건 약속이 아니라 성유진의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물론 남궁린은 그 일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아침에 성유진을 찾지 않은 건 자존심 때문이었다. 성유진의 말대로 끌러 다니고 싶지 않았다.
“처형과 할 말이 있었는데…. 처형이 오지 않아서 그냥 설이와 아침에 만나 좋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렇지, 설아?”
“응. 가가. 점심도 같이 먹을 거지?”
“그래. 점심때 찾아올게.”
남궁린은 이게 협박이란 걸 눈치챘다. 앞으로 자신의 말을 무시하면, 남궁설을 희롱하겠다는 추잡한 협박. 남궁린은 이를 악물었다. 분노가 치미는데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처형. 밖으로 나가서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하죠. 어떻습니까?”
“……알았어.”
“사과는 안 하십니까?”
“약속을 어긴 건 미안해.”
성유진이 밖으로 나갔다. 남궁린은 그의 뒤를 뒤따라 가려다가, 남궁설의 부름에 걸음을 멈췄다.
“언니.”
“…응. 설아.”
“성 가가를 때리지 마. 아무리 언니라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미안해. 그럴 일은 이제 없을 거야.”
남궁린은 성유진의 뒤를 따라갔다. 성유진이 머무는 별채였다. 별채는 무척 컸다. 그는 남궁설의 약혼자로서 손님 중에서도 특별취급을 받고 있었다.
“자, 이제 사과해야지?”
성유진이 히죽 웃으며 말한다. 남궁린은 돌변한 성유진의 분위기에 몸을 긴장시켰다.
“…사과라면 방금 했잖아.”
“그건 설이가 앞에 있었으니 봐준 거지. 내 얼굴을 때렸는데 말로만 미안하다 사과하고 넘어간다고?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여? 엉?”
성유진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입술에선 피가 멈췄지만, 코에서는 여전히 피가 줄줄 나오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했었어. …사과했으니 이제 됐지?”
“큭. 그게 사과하는 태도라니. 장인어른은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
“아버지를 욕하지 마…!”
“그럼 사과나 제대로 해.”
남궁린은 잠깐 성유진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진정성이 조금도 안 느껴지잖아.”
“…대체 나보고 어쩌란 거냐?”
“오체투지.”
“뭐?”
“하기 싫으면 말고.”
성유진이 히죽거렸다. 오체투지는 무릎, 팔꿈치, 이마가 모두 땅에 닿게 하는, 최대한의 예의를 표현할 때 쓰는 절하는 방식이다.
“…만약 내가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네 여동생이 대신하게 되겠지.”
남궁린은 남궁설이 성유진 앞에 오체투지를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착한 동생은 성유진의 말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고, 이 비열한 놈은 기어코 오체투지를 시킬 것이다.
‘…나 때문에 설이를 고생시킬 수 없어. 내가 저지른 일. 내가 끝내는 게 맞아.’
남궁린의 무릎이 점점 굽혀졌다. 바닥에 무릎이 닿는다. 여긴 바깥이 아닌 별채의 내부인데 이상하게도 무릎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얼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팔꿈치가 땅에 닿는다. 남궁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마가 땅에 닿았을 때, 그녀는 스스로가 죄인이 되어 감옥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굴욕감이 밀려온다. 그녀는 아버지를 비롯해 가문 내의 어르신에게도 오체투지를 한 적이 없었다.
“입은 다물고만 있을 거야?”
“…죄송합니다.”
“일어나서 두 번 더해.”
남궁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오체투지를 했다. 처음과 달리 몸이 가벼웠다. 좀 더 쉽게 오체투지를 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좋아. 용서해줄게. 일어나.”
남궁린은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은 부쩍 피곤해져 있었다.
“그럼 어제 했던 걸 이어 할까? 양손은 머리 뒤로 올리고 앉았다 일어서기 100회 시작.”
“…….”
낄낄 웃는 성유진의 얼굴을 보니 다시 분노가 차오른다. 그러나 성유진의 명령을 따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어제처럼 성유진을 말없이 노려보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야. 다리 좀 벌려. 그게 더 힘들 거 아니야.”
성유진의 시선은 남궁린의 사타구니에 향했다. 그 의도를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변태 새끼.”
그녀는 다리를 벌렸다. 어차피 옷을 입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
쾅!
남궁린이 문을 부서뜨릴 듯이 닫으며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나는 그녀가 내 방을 나가기 전에 눈물을 글썽이는 걸 확인했다. 오체투지가 그녀의 마음을 어느 정도 꺾은 것이다.
‘그래도 아직 부족해. 시간이 더 필요해.’
나는 별채 밖으로 나갔다. 다른 별채에 머무는 신종우를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남궁설이라는 남궁세가주의 딸과 약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벌써?”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대부분 그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만, 혹시 억지로 하는 약혼입니까?”
“갑작스럽긴 한데, 억지로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 어르신은 안 보이는군.”
“아침 일찍 남궁세가를 나갔습니다. 정보 수집을 한다더군요.”
둔목정은 전직 무영신투였다.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 남궁세가와 나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움직이는 것일 테지.
‘상관 없어. 어차피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할 테니.’
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신종우에게 물었다.
“네가 어제 말했던 책, 이 세계에 오게 된 원인이 된 그 책. 지금 가지고 있나?”
신종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천마신공이 적힌 비급. 원작대로라면 그는 천마신공의 비급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천마신공의 비급이야말로 그의 희망이자, 시작이며, 힘의 근원이니까.
“…당신에게만 말해드리겠습니다. 가지고 있습니다.”
“내게 보여다오. 나는 지구에서 죽어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난 환생자다. 어쩌면 그 책을 보고 뭔가 특이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네가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는 대충 이해한다. 하지만 네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책을 가장 먼저 조사해야 한다. 그게 바른 순서란 걸 알 텐데? 술법사에게도 그 책을 보여주지 않을 건가?”
짧은 침묵이 일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짧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단, 만지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
신종우는 품에서 검은색 붕대를 감은 책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그리고 조심히 붕대를 풀었다. 낡은 책이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이란 글이 표면에 적혀 있었다.
‘…보이네?’
원래 이 책은 신종우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겐 책의 제목과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제목이 보인다는 건, 그 내용도 읽을 수 있다는 거군. 난 왜 읽을 수 있는 거지? 내가 환생자라는 건 구라고…. 천강성 시스템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천마신공의 영향?’
어쨌든 나는 그가 가진 천마신공에 흥미가 생겼다. 가능하다면 빼앗고 싶다.
‘…죽이자.’
신종우를 살려둬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죽이고 천마신공을 빼앗는 게 낫다.
“성유진 씨. 책에 뭐라 적혀 있는지 읽을 수 있겠습니까?”
“날 놀리는 건가? 책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만? 이건 책이 아니라 종이 뭉치인데.”
“…그렇군요.”
신종우는 아쉬우면서도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혹시 책을 한 번 만져봐도 되나?”
“……네. 한 번 만져 보십시오.”
조심스럽게 책을 만졌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신종우는 다시 책에 검은 붕대를 감고는 품속에 숨겼다.
“안휘성에는 언제까지 머물 생각이지?”
“처음에는 안휘성과 그 근처에 있는 고명한 술법사들을 만나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습니다만, 한 달 정도는 머물 것 같습니다.”
“김치찌개 때문에?”
“…네. 화월루의 김치찌개가 무척 맛있더군요.”
신종우가 피식 웃었다.
“진짜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 남궁린 때문인가? 너는 남궁린을 어떻게 생각하지?”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곧 남궁세가의 일원이 될 사람으로서, 남궁린과 너의 관계가 미묘한 것 같아서 물어본 것뿐이야.”
“남궁린에겐 어떠한 감정도 없습니다. 그녀와는 여행 도중에 만나 잠시 함께했을 뿐입니다. 설령 제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더라도…. 전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세계에 미련을 남기지는 않을 겁니다.”
“남궁린이 널 따라가겠다고 한다면 말릴 건가?”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전 그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뿐입니다.”
신종우는 이미 어느 정도 남궁린에게 마음이 있다. 본인은 아닌 척하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알았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최대한 도와주지.”
“네. 감사합니다.”
“그럼 약혼녀와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보지.”
???
남궁린이 남궁세가로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다. 그녀는 아침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성유진의 별채로 이동했다. 가기 싫었다. 성유진이란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빠진다. 하지만 여동생인 남궁설을 위해 성유진의 명령을 따르는 방도밖에 없었다.
별채에 도착했다. 성유진은 침대 위에 거만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오늘은 좀 늦었네? 조금이라도 더 늦게 왔으면 설이를 만나러 갈뻔했잖아.”
“……오늘은 뭘 하면 되지?”
“평소와 같은 거지.”
남궁린은 양손을 머리 뒤로 돌렸다. 앉았다 일어서기 100번.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성유진의 앞에서 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웠는데 지금은 그저 아침 운동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성유진은 달랐다. 지켜보고만 있지 않고 남궁린의 뒤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남궁린의 배를 쓰다듬었다.
“소, 손 치워!!”
“배 좀 만질 뿐이잖아. 호들갑 떨지 마.”
남궁린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주먹은 부들부들 떨릴 뿐 휘둘러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도 알고 있다. 여기서 주먹을 휘두르면 남궁설만 고통받게 될 뿐이란 걸.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너 대신에 설이를 시키면 되니까. 너와 달리 설이는 기뻐하면서 해주겠지.”
옷위로 배를 쓰다듬을 뿐이다. 여기까지 와서 못 견딜 이유는 없었다. 남궁린은 주먹 쥔 손을 풀었다.
“…손 떼. 앉았다 일어서기를 해야 하니까.”
“아. 그렇지.”
손이 떠난다. 순순히 손을 떼주자 남궁린은 안심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허전함을 느꼈다. 성유진이 배를 쓰다듬어줄 때 이상하게 배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따뜻함과 허전함? 기분 탓이겠지.’
남궁린은 5분 만에 앉았다 일어서기 100회를 끝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살짝 숙이고 성유진의 손길을 기다렸다. 끝나면 마치 잘했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는 게 순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성유진은 머리가 아닌 그녀의 배에 손을 대고 쓰다듬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이건 평소와 다르잖아.”
“평소? 아.”
성유진은 왼손으로 그녀의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성유진은 배를 쓰다듬는 걸 그만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참자. 어차피 조금 있으면 떨어지겠지.’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의 쓰다듬은 꽤 길어졌다. 남궁린은 기분이 점점 이상해지는 걸 느꼈다. 몸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감각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앗!’
순간 편안함을 느끼며 멍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안 돼. 이놈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정신 제대로 차려야 해.’
정신을 단단히 붙잡자 몸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몸이 점점 흥분하듯 뜨거워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게 기분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 좋다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계속 만져줬으면 하고 생각할 정도로.
“그만! 이걸로 충분하잖아!”
“무심코 너무 열중해버렸나. 오늘 아침은 여기까지. 점심에도 오는 거 잊지 마. 안 오면…. 알지?”
남궁린은 그에게서 멀어졌다. 새로이 그에 대한 증오심을 다지며 다리에 힘을 주면서 별채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몸속에 강제로 심어진 열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