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8화 〉 778. 광명승천도
778. 광명승천도
은조사의 거처에 도착했다.
숲 속에 자리 잡은 오두막. 배경만 놓고 보면 꽤 그럴싸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들어와라. 손님이 오는 건 오랜만이군. 10년… 아니, 12년 만인가….”
은조사의 뒤를 따라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 내부는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넓기도 하고 2층까지 있었다. 그는 창고에 들어가서 낡은 탁자와 의자를 가져와 자리를 만들었다.
“앉아라.”
자리에 앉았다. 그의 시선은 우리를 하나, 하나 훑었다.
“범부. 남궁세가의 여식. 이상한 놈. 재밌는 조합이군.”
범부는 나였고, 이상한 놈은 신종우였다.
그러려니 했다. 이제 와서 저런 소리를 들어봤자 별로 화나지는 않는다. 나보다 약한 놈이 지껄였다면 대가리를 후려쳤겠지만.
‘…아니. 잠깐. 내가 범부라고?’
이상함이 들었다. 내 재능은 범부가 맞다. 아니, 그보다 못하다. 나는 둔재다. 하지만 지금 내 실력은 천재가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젊은 나이에 출지(出志) 8단의 경지. 천강성 시스템에 보조와 꾸준한 영약 섭취의 결과지만, 천재라 불리기에 충분한 경지였다.
‘설마 내 실력도 파악하지 못하는 건가?’
의심이 들 때였다. 내 옆에 앉은 남궁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은조사 님. 그 말은 이해할 수 없군요. 성 소협은 범부가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은조사는 남궁린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놈의 실력은 알고 있다. 내가 말한 건 술법의 재능을 말하는 거다. 솔직히 말하면 범부 이하다. 하지만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범수 수준으로 평가했다.”
“사람을 멋대로 평가하지 마세요. 그리고 재능을 얼굴만 보고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어요.”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나는 알아볼 수 있다. 너는 술법 쪽에도 꽤 재능이 있다.”
“전 술법을 배울 익힐 생각이 없어요.”
“누가 너한테 술법을 배우라고 했느냐? 나는 그저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
남궁린이 은조사를 노려봤다. 은조사는 굳이 남궁린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남궁세가를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이윽고 은조사의 시선은 신종우에게 향했다.
“너는 이상하다.”
“…뭐가 이상합니까?”
신종우가 되물었다.
“너는 재능이 없다. 저놈보다는 재능이 있지만, 그래도 범부 수준이다. 하지만 또 곰곰이 보자면 남궁세가의 여식보다 더 재능이 있는 것 같군. 판단하기 힘들다.”
“…….”
신종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대화하기에 앞서 손님들에게 차부터 대접하지.”
은조사가 손뼉을 두 번 쳤다. 오두막 안쪽에서 푸드덕거리는 날갯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비둘기 5마리가 찻잔과 주전자를 들고 왔다. 가장 큰 비둘기 한 마리가 주전자 손잡이를 입에 물고 찻잔에 차를 따랐다.
“내가 정성 들여 기른 찻잎이다. 마시도록.”
“…….”
나는 찻잔을 들였다. 차는 투명한 녹색으로 뜨끈뜨끈하다. 그러나 입에 대려고 하자 거부감이 들었다.
‘시발. 비둘기가 가져오고 따른 차를 마시라고?’
이딴 근본 없는 차가 내 입맛을 만족시키는 가는 둘째치고, 위생 상태가 글러 먹었다. 비둘기가 얼마나 더러운 새인가.
나는 마시는 척만 하고 마시지 않았다. 찻잔에 입도 대지 않았다.
“경고 하나 하지.”
우리는 은조사를 쳐다봤다.
“너희가 찾아오는 바람에 나의 평온이 깨졌다. 쓸데없이 힘을 썼고, 흑룡성이란 적을 만들었지. 만약, 이 대화가 내 생각보다 시시하고, 내 흥미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너희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은조사에게서 느껴지는 살의는 진짜였다.
“…지금 대 남궁세가를 무시하는 건가요?”
“내가 남궁세가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나?”
“은조사 님의 눈에는 남궁세가가 우스워 보이시나 보군요.”
“나 혼자서 남궁세가를 감당할 수 없다.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내가 너를 죽이고 이 넓은 천하에 숨는다면? 남궁세가는 나를 찾지 못할 테니 복수도 하지 못한다. 남궁세가의 여식이여, 여긴 나의 구역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그 사실을 잊지 마라.”
“…….”
남궁린은 분한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용히 가늠해 보았다. 지금 공격하면 놈을 죽일 수 있을까?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술법사랑 싸운 경험이 거의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남궁린이나 신종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이 새끼. 우리를 경계하고 있어. 피랑 뇌수가 덕지덕지 붙은 이린흑갑을 입고 있는 것부터가 그렇지.’
집안을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놓는 놈이 굳이 더러운 갑옷을 입는 이유는 그뿐이다.
“알겠습니다. 이제 다른 세계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우주를 아나?”
“압니다. 우주는 하늘 위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까?”
“우주는 모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 우리가 살지 않는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세계. 그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세계란 다른 세계를 말하시는 겁니까?”
“크크. 이 우주에는 세계가 여러 개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총 4개다. 천계, 명계, 환수계, 물질계. 천계는 달리 선계라 불리고, 지옥계는 달리 명계라 불리기도 하지.”
“물질계가 저희가 사는 이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까?”
“맞다. 다르게 중간계라고도 부른다. 어느 오만한 인간들은 인간계라고 부르지. 내가 말한 4개의 세계 중에 네가 말한 세계가 있나?”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다른 세계란….”
“다른 우주의 세계를 말하는 거겠지. 우주는 넓다. 방대하고 방대해서 우주에 비교하면 우리는 먼지조차 아니다. 그리고 그런 우주가 하나만이 아니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진절머리 날 정도로 넓다.”
은조사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세계에 갈 수 있습니까?”
“왜 그렇게 다른 세계에 집착하는 거지?”
“…….”
“대답해라. 너와 나는 대화를 하는 게 아니었나? 이쪽의 지식만 가져갈 생각이라면 이곳에서 죽여버리겠다.”
은조사에게서 압박감이 느껴졌다. 신종우는 남궁린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저는 다른 세계에서 왔습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남궁린은 생각보다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조사는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아주 재밌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린아이처럼 두 눈이 빛난다.
“그럴 줄 알았다. 넌 이질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보일 리가 없지. 크흐흐.”
“다른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모른다.”
“…장난하십니까?”
신종우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너는 착각하고 있군. 다른 세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서 꼭 그 세계로 갈 방법을 알아야 하나? 천계에 대해 알고 있는 놈들이 수두룩한데 왜 천계에 올라가지 못하는 거지?”
신종우는 흥분하려던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지금껏 이름 있는 술법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른 세계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은조사 님은 어떻게 다른 세계에 알게 되었습니까?”
“오래전에 책을 봤다. 그 책에 적혀 있었을 뿐이다.”
“그 책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종우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책이란 단어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계기는 천마신공의 비급 때문이니까.
“내 스승이 가지고 있겠지.”
“그 스승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200년 전에 헤어졌다. 알게 뭐냐.”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은 정말 모르십니까?”
“모른다. 애초에 말이다. 그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니, 이 물질계의 술법사 따위가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술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신종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는데, 지금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단서를. 단서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종우가 고개를 퍽 숙였다.
“단서라…. 다른 세계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는 그 책의 이름은 천상비록(天上?錄)이었다. 다른 세계로 가고 싶다면 그를 찾아가 도움을 받는 게 더 확실하겠지. 흐흐, 뭐 만날 수 있다면 말이다.”
“천상비록의 저자가 누굽니까?”
“천성자(天星子). 하늘에서 태어나고 지상에서 자란 신선.”
“그는,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먼 옛날. 천성자는 곤륜을 올라섰다는 기록이 있다. 즉, 우화등선하여 신선이 된 것이지. 천성자를 만나고 싶다면 천계로 가라. 네가 갈 수 있다면 말이다. 하하하.”
“…….”
신종우는 시선을 떨궜다. 그의 눈에 일순 절망감이 서렸으나, 곧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들었다.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뭐냐. 네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 것이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제 목적은 천계에 올라가 천성자를 만나는 것이 되었습니다. 천계로 올라가는 방법은 저도 몇 가지 아니 알려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신종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남궁린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기다려라.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정보만 가지고 가겠다고? 네놈들은 도적들이나 다름없다. 대화는 제법 흥미로웠으니 인정하겠다만, 내게서 들은 정보의 값을 치러라.”
“값은 치렀습니다.”
신종우가 담담히 말했다. 말투가 너무 평이해서 나조차도 의아하게 만들었다. 값을 치렀던가?
“치렀다고?”
“흑룡성의 무인을 상대할 때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이 자식이…! 그놈은 너희를 쫓아 결계에 들어온 놈이었다!”
“저는 그들을 데려온적 없습니다. 그들이 멋대로 은조사 님의 결계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린흑갑까지 가지시지 않았습니까? 대가는 이미 치렀습니다.”
“개소리를 아주 맛깔나게 하는구나.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대가는 내가 알아서 가져가겠다. 크흐흐. 이계의 인간이라… 아주 좋은 연구재료가 들어왔군.”
은조사가 일어서서 적의를 내뿜는다. 나와 남궁린은 동시에 검을 뽑았고, 신종우는 준비했다는 듯이 기를 끌어올렸다.
“네놈.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나?”
“…당신은 저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 세계에 오게 되었는 지, 다른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절 내보낼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머리가 좋은 놈이군. 맞다. 네놈을 잡고 난 뒤에 나중에 천천히 알아볼 생각이었지. 그런데 왜 멀쩡한 거지? 다른 놈들이 차를 마시지 않은 건 알고 있다만, 넌 절반 이상 마셨다. 왜 무사한 거냐?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독이거늘.”
“차를 마시면서 독기를 태웠습니다. …독이 들었다는 걸 눈치챈 건 린 소저가 마시는 척만 할 때 알아차렸습니다.”
“…전 성 소협이 마시지 않길래 마시지 않았을 뿐이에요.”
남궁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차에 독이 들어 있었던 건가. 몰랐다.
“…….”
이럴 땐 닥치고 있으면 반은 간다. 나는 칼자루에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허. 가장 멍청해 보이는 놈이 가장 눈치가 빨랐군. 체력과 기운도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내 친히 나서서 제압해주마.”
직후, 천장에서 커다란 매가 떨어져 내리며 신종우를 공격했다. 신종우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재주 좋게 피하며 천마군림보를 밟았다.
“크윽! 평범한 보법이 아니군!”
나와 남궁린은 커다란 매를 향해 달려들고, 신종우가 은조사를 맡았다.
“처형! 내가 놈의 뒤를 치겠습니다!”
“네 성 가… 소협!”
기습으로 단숨에 상황을 끝낼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그건 악수였다. 커다란 매가 오두막에 걸려 행동이 제약당하게 되었으니까.
남궁린이 검을 휘두른다. 제왕검법 특유의 무거우면서도 빠른 검이 매의 앞부분을 베어 가른다.
“키에에에에에에엑!”
매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활약하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파지지직.
뇌전과 검기를 담은 칼을 매의 뒷머리에 휘둘렀다. 매는 고개를 옆으로 숙여 내 공격을 피했다. 칼은 매의 어깨를 잘랐다. 매가 이번에도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며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매의 등에 붙어 있던 나도 함께 굴러가게 되었다.
“성 소협!”
남궁린이 달려왔다. 나는 매가 날아가기 전에 그 몸에 칼을 박았다. 남궁린도 상황을 보더니 검을 휘둘러 매를 난자했다.
매가 커다란 날개를 필사적으로 퍼덕였다. 5M가량 날아오르던 매는 바닥에 다시 떨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성 소협!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
난 몸을 일으켰다. 매는 크기만 할 뿐이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아마 은조사의 술법 보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두막에 시선을 던졌다. 신종우와 은조사가 내공 싸움을 하고 있다.
딱 좋은 상황이다.
내 옆으로 다가온 남궁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풍만한 가슴을 꽉 잡아서 내 품에 끌어안았다.
“읏, 성 가가…?”
“내 말 잘 들어. 은조사랑 신종우. 둘 다 여기서 죽여버리자. 내가 은조사를 맡을 게. 넌 신종우를 맡아. 신종우는 나보다 널 깊게 믿고 있을 테니까. 네가 접근해도 경계하지 않을 거야.”
“그, 그게 무슨…. 신 소협을 죽이자니…. 흐읍!”
남궁린의 머리를 잡아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내 혀가 그녀의 입안을 질척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명령이야. 린.”
그녀와 내 입술 사이에는 가느다란 은색 실이 이어져 있었다. 남궁린의 숨은 조금 가빠졌고, 두 눈은 살짝 풀렸다. 그녀는 오직 내 눈을 보며 대답했다.
“……네. 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