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4화 〉 784. 광명승천도
784. 광명승천도
양측이 비무를 하기로 정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비무를 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로 준비가 필요했고, 흑룡성은 일반인도 볼 수 있는 공개 비무를 원했다.
흑룡성의 의도는 뻔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남궁세가를 이기고 흑룡성의 명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과연 그 의도가 제대로 먹힐지는 의아스러웠지만.
남궁세가의 참가자 5명 중 3명이 남궁호천의 아들과 딸이었다. 장남인 남궁온, 차남인 남궁직우, 장녀인 남궁린. 다른 한 명은 방계였고 마지막 인물이 나였다.
장남인 남궁온과 차남인 남궁직우는 수련광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수련장에서 보낸다. 그에 나와 마주치고 대화를 했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나는 비무를 대비해 남궁린과 함께 움직였다. 남궁린이 내게 수련에 도와달라는 요청을 직접 했다. 수련이 끝나고 섹스로 몸을 풀면 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와 함께 수련장으로 가는데 우리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는 남자치고 약 150cm의 작은 키를 가졌다. 남궁설과 비슷한 키였다.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은 말총머리로 묶었다. 얼굴은 하얀 편이었는데 입술이 가늘고 삼백안이었다. 검은 옷을 입었고 커다란 참마도를 등 뒤에 장비했다.
흑룡성의 무인이다.
“그대가 남궁린 소저이시오?”
그의 목소리는 작은 몸과 뱀처럼 야비한 인산과 달리 한없이 낮고 중후해서 어울리지 않았다. 인상과 목소리가 전혀 달라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네. 남궁린이에요.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곳에 계시죠? 여긴 외부인이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남궁린이 팔짱을 끼고 차갑게 쏘아보았다.
“실례했소. 산책하는 중이었는데 멍하니 걷다 보니 길을 잃고 여기까지 흘려 들어오게 되었소. 흑룡성만큼은 아니지만 남궁세가도 만만찮게 넓더군. 아, 내 소개가 아직이었지. 난 흑룡성의 소성주(小城主)인 흑적변이오.”
웃음도 안 나오는 수작이었다.
흑적변의 눈은 아까부터 남궁린에게 못 박혀 있었다. 나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는다. 아마 남궁린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남궁린의 미모는 안휘성 제일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니 궁금증이 생겼겠지.’
남궁린은 무관심하게 그를 보고는 왼쪽 손을 들어 길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흑룡성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렇소? 그런데 이것도 인연인데 잠시 이야기라도 나누지 않겠소?”
“당신과 나눌 이야기는 없어요. 이쪽은 비무를 대비해 수련을 해야 하니 바빠요. 돌아가세요.”
“하하. 소문대로 쌀쌀맞구려. 그거 아시오? 나도 이번 비무에 나가오. 어쩌면 남궁 소저와 무기를 맞대게 될지도 모르오.”
“전 단지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남궁린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담겨 있었다. 흑적변이 몸을 움찔거렸다.
“…남궁 소저. 나는 이번 비무에서 승리하고 그대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생각이오.”
“그럴 필요 있나요? 지금 청혼하세요. 제 대답도 가르쳐 드리죠. 거절이에요.”
“나와 그대의 혼인은 남궁세가와 흑룡성의 미래를 위한 것이오.”
“당신을 위한 것이겠죠. 상상만 해도 역겹군요.”
남궁린이 있는 대로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신사인 척하던 흑적변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대체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구는 것이오? 난 그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대에게 반했소. 한눈에 그대가 내게 어울리는 여자라는 걸 알았지.”
“저도 솔직하게 말하죠. 당신은 못생겼어요. 무엇보다 작아요. 키도 작고 체격도 작죠. 아마 거기도 작겠죠. 전 작은 남자가 딱 질색이에요.”
“…….”
흑적변이 입을 벌렸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 작다? 내가 키가 작은 건 맞소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크다고 자부하오.”
“당신은 대인인척하고 있지만, 제 눈에는 누구보다 소인배처럼 보이는군요. 진짜 대인은… 이 사람이죠.”
남궁린이 내 팔을 양손으로 잡아 품에 안았다. 팔뚝에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닿아 찌그러진다. 흑적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까부터 있던데…. 당신은 누구요? 남궁 소저와 무슨 관계지?”
나는 흑적변은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와 전 가족 관계입니다. 그녀가 제 처형이죠.”
“처형? 그렇군. 남궁설 소저의 데릴사위가 그대였군. 방금은 실례가 많았소. 남궁린 소저 옆에 있길래 왠 놈팡이인가 했소.”
흑적변이 인상을 풀었다. 나와 남궁린은 사돈 관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혼인할 수 없는 가족이다.
“놈팡이? 성 소협에게 그게 무슨 무례한 말인가요. 당장 성 소협에게 사과하세요!”
“…미안하오. 성 소협.”
흑적변은 고분고분하게 사과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남궁린이 내 팔을 더 꽉 끌어안았다. 흑적변이 나를 찌릿 노려본다.
“크흠. 아무튼 남궁소저. 나는 그대에게 반했소. 비무에서 승리하고 그대에게 청혼할 것이오. 물론 남궁가주에게도 미리 말해 놓을 테니 그렇게 아시오. 그대가 내 옆에 오게 될 때가 기대되는군요.”
“단언하죠. 그럴 일은 평생 없을 거예요. 꿈에서도 그러지 마세요. 소름 끼치니까.”
“하하. 다음에 뵙겠소. 그때는 남궁 소저의 반응이 달라져 있을 거라 확신하겠소.”
“난쟁이 새끼.”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흑적변이 사라졌다. 남궁린은 정말 기분 나쁜 듯 흑적변이 있던 장소를 아직 쏘아보고 있었다.
“가가. 저 남자는 제정신일까요?”
“제정신이겠지. 네가 너무 예뻐서 급발진한 거야. 나도 기분 더럽기는 마찬가지야.”
‘이세계 천마’ 원작에서는 천하제일미로 표현되기까지 하는 남궁린이다. 흑적변이 저 지랄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수련장에 가자. 오늘은 수련보다 기분부터 풀어야겠어.”
“아앙.”
나는 남궁린의 가슴을 주무르며 수련장으로 향했다.
‘주제도 모르는 놈이 감히 내 여자를 건들려고 해? 여기가 남궁세가가 아니었으면 바로 죽여버렸을 텐데….’
이번 비무에서 사고로 위장해 흑적변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비무 규칙 중 하나가 살상은 금지고, 심판을 보는 남궁단모와 오비환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놈이 흑룡성으로 돌아갈 때를 노려야 하나….’
???
안휘성 광장에서 비무가 시작되었다. 비무의 구경을 위해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이 세계는 땅도 크고 사람도 많았다. 아마 이 진제국의 인구수만 수백억 명은 될 것이다.
“첫 번째 비무를 시작하겠소!”
남궁단모가 외쳤다. 내력이 담긴 목소리는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남궁세가의 연뢰검(燃雷劍) 남궁온!”
남궁세가의 장남이자 소가주 후보인 남궁온이 비무대에 올랐다. 안휘성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비무에 나서는 5명 중, 나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남궁온이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혼자서 적들을 차례, 차례 박살 내며 사람들에게 남궁세가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흑룡성의 흑시구(黑豺狗) 흑적변!”
흑적변은 신법을 발휘해 요란스러운 몸놀림으로 비무대에 올랐다.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 흑룡성은 악명이 높고, 이곳은 남궁세가의 터전인 안휘성이기 때문이다.
흑적변은 야유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향한 야유를 즐기는 것처럼 대범하게 행동했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있는 남궁린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남궁린은 흑적변만 노려봤다.
“비무 개시!”
남궁온이 먼저 움직였다. 파지직. 그의 검에 푸른 검기와 번개가 서렸다. 흑적변은 남궁온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커다란 참마도를 들어 남궁온의 검과 맞부딪쳤다. 그의 칼날에 시커먼 검기가 일렁였다.
“어리석네요. 천뢰는 무기를 타고 흘려요. 막지 말고 피했어야 해요.”
“아니. 내력으로 몸을 보호하면 천뢰에 저항할 수 있어.”
“그래도 한계는 있어요. 온 오라버니의 천뢰는 우리 중에서 가장 뛰어나요. 저도 몇 번이나 당했는걸요.”
“…….”
나는 말을 아꼈다. 어차피 내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결과가 말해준다. 흑적변은 멀쩡했다.
“이럴 수가. 왜 멀쩡한 거죠? 내력으로 몸을 보호하더라도 천뢰는 통할 텐데…!”
“내력으로 몸을 보호하지도 않았어. 뇌기의 방어에 특화된 어떤 특수한 법기를 가진 것일지도 모르지.”
“법기의 사용은 금지잖아요.”
“법기가 아닐 수도 있고, 몸에 숨겼겠지. 그것도 아니면 비무전에 술법을 받았거나. 가능성은 많아.”
내 눈에는 그 어느 것도 아닌 거로 보인다. 나는 원작의 흑적변을 떠올렸다. 흑적변은 원작에서 신종우에게 쓰러지는 악역 중 하나였다. 강하지도 않았고 임펙트도 없었다.
“온 오라버니….”
남궁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처음과 달리 초조해져 있었다. 비무의 상황이 남궁온에게 불리했기 때문이다.
‘천뢰도 통하지 않고 힘도 밀리고 있어. 이대로면 무난하게 지겠군.’
남궁온도 알고 있는지 상황을 바꾸기 위해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다. 몇 번 통하는 듯싶었지만, 결국 흑적변에게 아슬아슬하게 반격당했다. 흑적변의 숨겨져 있던 꼬리가 남궁온의 발목을 몰래 붙잡아 당긴 것이다.
흑적변의 칼이 바닥에 넘어진 남궁온의 목 앞에 멈췄다.
“우우우우우우우우!”
관객들의 야유가 터졌다.
“반인반수…!”
남궁린이 경악해 외쳤다.
반인반수.
인간과 영물 사이에 태어난 생명. 대부분 인간처럼 생겼다. 참고로 미령도 반인반수다. 물론 그녀가 속해 있는 호인족은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꼬리를 보면 뱀의 반인반수군. 지금 보니 눈동자도 뱀과 비슷하게 변해 있고. 천뢰가 효과가 없는 건… 천성적으로 뇌기에 강해서인가?’
이건 상황이 안 좋다.
반인반수는 평범한 인간보다 강하다. 타고나는 힘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과 같은 경지라고 한다면 반인반수 쪽이 훨씬 유리하다.
남궁세가 측의 얼굴은 굳어져서 퍼질 줄 몰랐다.
“흑적변. 비무를 이어 하겠나? 휴식 시간은 한 시진이다. 그게 아니면 포기할 텐가?”
“하하. 좀 힘들긴 한데 더 싸울 수 있소. 휴식 시간은 필요 없으니, 당장 비무를 이어 하겠소.”
심판인 남궁단모는 흑적변은 강하게 쏘아보고는 외쳤다.
“둔중검(鈍重劍) 남궁직우!”
차남인 남궁직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무대로 올라갔다. 그는 별호대로 둔검 스타일의 검사였다. 그러나 결과는 남궁온과 마찬가지였다. 흑적변에게 패배했다.
“난 멀쩡하오. 다음 상대 오시오.”
남궁세가의 방계도 패배했다.
“후우. 이제 좀 힘들어지는구려. 다음 상대는 누구요?”
남궁린의 차례였다.
“…가가.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
“마음 편하게 싸워. 네가 져도 뒤에 내가 있으니까.”
“네. 가가!”
그녀가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남청색 무복을 입고 검을 한 손에 쥔 그녀는 아름다운 여걸이었다. 관중들은 그녀의 별호인 여서검(麗曙劍)을 연호했다.
“이거 의외군. 그대가 먼저 나오는 것이오? 나는 그대가 마지막인 줄 알았소.”
“성 소협은 저보다 강해요. 제가 성 소협보다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죠.”
“하하. 성 소협을 너무 믿는 것 같군. 성 소협을 쓰러뜨린 뒤에 그때 말했던 대로 하겠소. 난 진심이란 것을 알아주시오.”
남궁린은 흑적변에게 검을 겨누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비무 개시!”
참마도가 땅바닥을 내려쳤다. 남궁린은 뒤로 피했다가 흑적변의 옆을 노렸다. 흑적변이 숨을 내쉬며 뱀같은 몸놀림으로 남궁린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흑적변은 상대가 남궁린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그러고 싶어도 체력적 여유가 없었다. 꼬리를 비겁하게 사용하고, 허수로 빈틈을 유도했다.
남궁린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20분이 지나고 결판이 났다. 남궁린의 패배였다.
“힘들구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소. 다음 비무는 내일… 아니, 몸 상태를 보니 내일도 힘들 것 같으니 모레 비무를 이어 하겠소.”
“……인정한다.”
남궁단모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흑적변은 연승을 했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 소저. 괜찮으시오?”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오. 이후에 시간이 괜찮다면 화월루에서 함께 식사하며 비무의 복기를 하지 않겠소? 그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오.”
“됐어요.”
짧게 대답한 남궁린은 망설임 없이 비무대를 내려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땀에 젖은 남궁린의 얼굴은 우울했다.
“성 소협…. 져버렸어요.”
“괜찮아. 남궁세가가 흑룡성에게 질 일은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