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8화 〉 788. 광명승천도
788. 광명승천도
화월루주 공비와 은밀하게 만났다. 그녀는 평소에 입던 하늘하늘한 화려한 옷이 아닌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었다. 복면까지 써서 얼굴을 완벽히 감췄다. 허벅지에는 비수를 걸어두고 등에는 소도를 장비했다. 영락없는 암살자의 모습이었다.
‘E컵의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탱탱한 엉덩이까지. 몸매 하나만큼은 뛰어나군.’
그녀는 내 몸을 빤히 쳐다봤다.
“성 공자는 그 모습으로 암행에 나설 건가요?”
“어차피 흑룡성의 무인들 전부를 죽일 거 아닙니까. 생존자가 없을 텐데 굳이 얼굴을 숨길 필요가 있습니까?”
“자신감 하나 대단하군요. 하지만 공자. 세상에는 온갖 신비한 술법이 있어요. 그중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보는 술법도 있지요.”
팍하고 무언가 느낌이 왔다.
공비는 일전에 내가 행한 강간을 이유로 나를 협박했다. 나는 분명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잘 처리했다고 생각한 강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신비한 술법으로 내 행적을 알아낸 겁니까?”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든 복면을 내게 건넨다.
“이 복면을 입어요. 최악의 경우는 피해야죠.”
“…….”
나는 복면을 받아 얼굴에 썼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한숨을 꾹 참았다. 지금 그녀에게 따져봤자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날 이용하는 공비의 성격을 생각하면 일이 끝나면 날 버릴 수 있었다. 사냥개를 삶아 먹듯이 말이다.
‘바로 죽이는 건 안 돼. 공비한테서 정보를 뜯어내야 해. 왜 흑적변을 노리려고 하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니까. 그리고 이년은 반드시 강간한다.’
공비는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가 와있는 곳은 현재 화월루의 꼭대기 층, 화월루주의 방이다.
“쥐새끼는 없군요. 따라오세요.”
공비는 책장을 옆으로 옮겼다. 그녀가 벽을 향해 조용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벽이 소리 없이 열리며 비밀 공간이 나타났다. 그녀를 따라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뭡니까?”
나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내가 읽을 수 없는, 이해하기도 힘든 기하하적인 도형과 문자들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전이대(轉移臺). 전이술을 사용하기 위한 공간이에요. 제 앞으로 올라오세요. 어제 안휘성에서 떠난 흑룡성의 무인들을 따라잡으려면 전이술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어요.”
좀 미심쩍긴하지만 일단은 공비의 말대로 행동했다. 그녀가 서있는 곳은 바닥의 중심, 작은 원 안이었다. 원 안에 서려다 보니 그녀의 몸과 내 몸이 부딪혔다. 물컹. 그녀의 가슴이 내 상체에 닿았다.
그녀가 살짝 뒤로 물러났다. 얼굴은 복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꼭 원 안에 설 필요는 없어요. 몸이 닿을 필요도 없고요.”
“아. 죄송합니다. 전이대에 대해서 잘 몰라서.”
“됐으니 거기에 가만히 계세요.”
공비가 숨겼던 기세를 발휘했다. 그녀로부터 기운이 흘려 나오며 바닥의 문자들이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한다. 나는 몸을 긴장시키며 공비를 쳐다봤다. 그녀의 힘을 가늠해본다.
‘술법사…. 아니, 무공을 익힌 술법사다. 경지는… 나보다 위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삼정은 아니고 최소 오기 5단 이상의 강자라는 것은 알겠다.
‘방심하는 순간을 노려야겠군. 아니면 유리아를 소환해서 같이 싸우거나. 유리아와 둘이서 공격한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지.’
은은하게 빛내던 문자들이 밝은 빛을 내며 터졌다.
나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어느새 나와 공비는 밤하늘 아래의 어느 언덕에 있었다. 전이술로 인해 어딘가로 이동한 것이다.
“성 공자. 어지럽지는 않나요?”
“아니요. 괜찮은데요.”
“…전이술은 처음이 아니신가요? 처음 전이술을 겪는 사람은 경지에 상관없이 어지러움을 호소하는데.”
“제가 특이한가 보죠.”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할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성 공자. 앞으로 한 시진 뒤에 흑룡성의 무인들이 이곳을 지날 거예요.”
“그런 것도 알 수 있습니까? 대단하군요. 근데 보통은 밤에는 잠을 자고 이동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일주일을 쉬지 않고 이동하고, 하루를 휴식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훈련을 겸하는 거죠.”
“공비. 일개 기루의 루주치곤 정보력이 아주 뛰어나시군요. 혹시 하오문 출신입니까?”
“그것들과 같은 취급하지 마세요. 이 정보는 심어둔 첩자를 통해 수집했어요. 아까부터 묘하게 비아냥거리는데 여기까지 와서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신가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영 꺼림칙해서 할 마음이 안 납니다.”
“…이해해요. 성 공자의 입장에선 억지로 하는 거니까요. 성 공자. 약속할게요. 이번 일만 도와주면 두 번 다시는 성 공자의 도움을 바라는 일은 없을 거예요. 성 공자는 성 공자의 인생을 살면 돼요. 저와 엮일 일은 없을 거예요.”
공비가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이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후우. 정리 좀 해봅시다. 제가 흑적변만 확실하게 죽이면 됩니까?”
“일 순위가 흑적변을 죽이는 것이에요. 다른 이는 몰라도 흑적변 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해요. 흑적변을 죽인 뒤에는 흑룡성의 무인들도 모두 죽이세요.”
“저들이 도망가면 어떻게 합니까?”
“이미 이쪽에 결계를 준비해뒀어요. 결게가 발동되면 내부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바깥에서 간섭하지 못해요.”
“가장 큰 문제는 흑룡성의 노마대주인 오비환은 어떻게 할 겁니까? 그는 오기 8단의 강자입니다.”
“제가 당신의 도움을 바라는 것도 오비환 때문이에요. 오비환은 제가 맡죠. 당신은 흑적변을 확실하게 죽이는 것에 집중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비는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보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남은 시간이 제법 넉넉했다. 나는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녀는 흑룡성의 무인들이 오는 방향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만, 흑적변을 왜 죽이려고 합니까? 원한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흑적변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면, 이런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 공자. 성 공자는 그저 흑적변을 죽이면 돼요. 그걸로 저와 성 공자의 인연은 끝이에요. 성 공자는 깊게 알 필요 없어요. 가르쳐줄 생각도 없고요.”
“…….”
공비의 진짜 소속은 화월루가 아닌 다른 어딘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겨져 있는 문파. 세상의 뒤편에서 은믈히 활약하는 문파. 머릿속으로 몇 개의 세력이 스쳐 지나간다. 확신할 수는 없다. 내가 모르는 세력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조용히 공비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그녀는 머리카락까지 철저하게 복면에 숨겼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몸매는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라텍스와 비슷한 재질의 옷이었는 게 엉덩이의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만지면 터질 것 같은 탱탱한 엉덩이다. 허리의 곡선도 예쁘고 각선미도 뛰어났다. 그녀의 뒤태를 감상하고 있으니 시간이 잘 갔다.
“성 공자. 그들이 왔어요. 준비해요.”
“올 것이 왔군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에 섰다. 두 눈에 내력을 집중해서 먼 곳을 내다본다. 수 십 리 밖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흑룡성 무인들이 보인다. 저쪽은 이쪽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도 공비가 어떤 술법을 사용한 모양이다
오비환 옆에서 달리고 있는 흑적변의 얼굴을 보자 자연스레 내 기분도 불쾌해졌다. 공비에게 협박당한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내 여자를 노린 저놈도 마음에 안 들긴 매한가지다.
그들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결계를 발동하겠어요.”
공비가 말했다. 직후, 공간과 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달리던 흑룡성의 무인들이 달리기를 멈추고 무기를 뽑아 경계 태세를 취했다.
“누구냐! 누가 감히 흑룡성의 앞을 막아서는가!”
쌍창을 든 오비환이 고함치며 외쳤다.
“성 공자. 당신의 목적을 잊지 마세요.”
“네. 오비환만 막아주십시오.”
공비의 뒤를 칠까 고민하다가 관뒀다. 우선은 흑적변부터 죽인다.
나와 공비는 내력을 담은 발로 땅을 박차 뛰어올라 흑룡성 무인들 앞에 착지했다.
“자객인가! 어디서 온 자객이냐?!”
검은색 옷과 복면을 쓴 걸 보고 자객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아니, 지금 우리가 하는 짓은 자객의 짓이 맞긴 하지만.
공비는 허리춤에서 연검(軟劍)을 꺼냈다. 얇은 그 검은 채찍을 연상시킬 정도로 검신이 흐물흐물하다. 그녀가 검에 내력을 주입하자 연검이 빳빳해졌다.
‘저건 아무리 봐도 자지검이군.’
평소에는 흐물흐물하지만, 내력을 주입하자 딱딱하게 발기하는 검…. 자지와 똑같았다.
‘공비는 자지를 손에 들고 휘두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리고 내 자지에 살짝 반응이 갔다.
‘집중하자. 집중해.’
오비환과 공비가 싸운다.
“답할 생각이 없단 말인가? 좋다! 네년을 죽이고 그 시체를 강시로 만들어 능욕해주마!”
“…….”
공비는 자신을 향한 모욕에도 방심하지 않았다.
나는 화련비도를 한 손에 들고 흑적변을 향해 뛰었다. 흑적변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처음부터 드래곤의 형상을 취했다. 내가 보통이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다.
“네놈들 설마…. 흑주반이 보냈나?”
“그게 누군데?”
“아닌가? 아니지…. 그 녀석이라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자객을 보냈겠지. 네놈들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여기서 죽어라!”
흑적변이 포효했다.
내 다리가 잠깐 느려졌다. 온 몸의 근육이 떨린다. 본능적인 무언가를 자극하고 있다.
‘시시하네.’
말 그대로 잠깐일 뿐이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본능의 반항 따위 의지로 짓누르면 그만이다.
“소성주님!”
흑적변의 부하 한 명이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단숨에 칼을 휘둘러 그의 몸을 베어내고, 뒤로 칼을 던졌다. 내 등을 노리려던 남자가 칼에 목에 꿰뚫려 쓰러진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내 주먹에서 응축된 천마기가 흑적변에 뻗어 나간다. 흑적변은 꼴사납게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했다.
“이, 이 공격…! 설마 네놈은…! 성유진이냐?!”
“아. 바로 들켰네.”
나는 복면을 벗어 던졌다. 어차피 여기에 있는 놈들은 전부 죽일 생각이었다. 오비환? 그놈도 나와 공비가 협력하면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다.
“네놈! 이게 남궁세가의 뜻이냐?!”
“설마 그러겠냐. 남궁세가가 흑룡성이랑 척을 져서 얻을 건 없다. 너희들이 뒈지는 이유는 네가 내 여자에게 찝적거렸기 때문이다.”
“네놈의 여자는 남궁린의 여동생인…. 설마… 너는 남궁린과…?”
“뭐, 네가 내 여자한테 찝적거리는 것도 이해는 해. 린이 좀 예쁘냐? 게다가 보지도 쫄깃쫄깃하지. 그런 여자는 천하를 뒤져도 없을 거야.”
“인륜을 져버린 추악한 놈! 네놈은 여기서 죽는 게 천하를 위한 일이다!”
“추악한 건 네놈이겠지. 도마뱀 새끼가 인륜 운운하지 말라고. 내 여자한테 찝쩍거리는 널 볼 때, 내가 얼마나 널 죽이고 싶었는지 넌 모를 거다.”
“이 새끼가…!!”
흑적변이 분노를 토했다. 도마뱀 운운한 것이 그의 감정을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다. 콤플렉스. 아니, 역린이라 부르는 게 맞겠지.
놈이 달려든다. 비무 때와 같은 초식을 사용한 모양인데, 그때보다 약간 더 빠르다. 허나 그래 봤자 내 상대는 되지 않는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커억!”
놈의 복부에 정확히 주먹을 꽂아 넣었다. 제로 거리에서 발동하는 용권. 이건 확실하게 주먹을 낼 것이다.
‘…옷 속에 갑옷이? 이건 이린흑갑이잖아.’
흑적변은 죽지 않고 뒤로 날아간다. 은조사가 착용했던 이린흑갑보다 더 뛰어난 품질의 이린흑갑이다.
‘이린흑갑은 일회용. 한 대 더 때리면 죽겠지.’
흑적변을 향해 걸어간다.
내 앞길을 수십 명의 무인들이 나타나 막아섰다. 일정하게 서서 나를 포위했다. 일종의 진이다. 그들은 사나운 기세를 흘리며 일제히 내게 달려든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천마군림보의 묘리를 담아 일보를 걸었다. 기파가 사방으로 퍼진다.
나를 공격하던 무인들이 일제히 피를 토하며 무너져내린다. 신종우의 천마군림보와 나의 천마군림보가 합쳐진 천마군림보는 광역기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움직여서 내 앞을 가로막는 놈이 있었다. 흑적변 다음으로 강한 놈이었다. 물론 정상인 상태는 아니었다. 입과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다.
“소성주님에겐 못 간다!!”
“유성검.”
유성검문주를 죽이고 빼앗은 법기. 내 왼쪽 손목에 있는 작은 은색 검이 반짝였다. 하늘에서 뇌기를 품은 거대한 검이 나타나 유성처럼 떨어졌다. 내 앞길을 가로막던 놈의 한 줌의 육편으로 변해 사라졌다.
유성검을 역소환하고 흑적변을 향해 걸으며 그를 비웃었다.
“이제 막아 줄 놈도 없군.”
“아직 끝나지 않았다…! 땅이여 뒤집혀라!!”
흑적변이 힘을 폭발시켰다.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에 내가 밟고 있는 땅이 흔들리며 뒤집히려고 한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올려 아래로 내렸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신장(天魔神掌).
뒤집히려던 땅을 강제로 짓눌렀다. 땅바닥에는 거대한 손바닥 모양의 크레이터가 남았다.
“말도 안 되는…!”
“죽어라.”
천마신공(天魔神功) 용권(竜拳).
흑적변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