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5화 〉 79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79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현실에 소환된 미령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곳이 현실이란 걸 깨닫고는 환하게 웃었다.
“꺄아아악! 서방님!!”
그녀가 기뻐하며 내게 뛰어들었다.
나는 담담히 그녀를 품 안에 안았다. 가슴이 커서 안을 때마다 흡족해진다.
“난 약속 지켰어.”
“네! 고마워요, 서방님! 다음에도 소환해주실 거죠?!”
“그거야….”
당연하지.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네가 하는 거 봐서.”
“저, 서방님한테 진짜 잘할게요. 그러니 다음에도 소환해주셔야 해요?”
쪽.
미령은 내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요염하게 웃었다. 애간장을 살살 녹이는 여우웃음이다. 일부러 저러는 걸 알고 있다. 인터넷 방송 몇 번 하더니 남자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도 불쾌하지 않았다.
내 양손은 미령의 엉덩이로 향했다. 소환 기념으로 섹스 한 판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 손에 닿기 전에 미령이 품에서 떨어졌다. 미령은 돌아보지도 않고 예전에 소환되었을 때 그녀가 사용했던 방으로 뛰어갔다.
활기차게 방문을 연 그녀는 감격 어린 눈으로 방안을 둘러봤다.
“진짜 하나도 안 건들었네요? 무슨 먼지가….”
미령은 집안을 후다닥 돌아다니며 청소기, 먼지떨이, 걸레를 가져와 청소하기 시작했다. 침대의 이불과 옷장 속의 옷들을 모두 꺼내 놓은 거 보면 빨래까지 한 번에 할 모양인 것 같았다.
나는 방문에 기대며 그녀가 청소기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걸 쳐다봤다. 의문이 생겼다.
“술법을 쓰면 편하게 청소할 수 있잖아. 왜 직접 생고생을 하는 거야?”
“술법은 그렇게까지 만능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렇게 직접 청소를 하며 몇 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재밌어요. 아, 이불 좀 빨아주실래요?”
어차피 할 일도 없었기에 미령을 도와주기로 했다. 이불을 들었다. 여자의 냄새는 나지 않고 먼지 냄새만 났다. 대충 세탁기에 넣고 돌아왔다. 미령은 어느새 현대적인 옷을 입고 젖은 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짧은 나시티에 돌핀 팬츠를 입고 바닥에 엎드렸다. 커다란 엉덩이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청소하는 건지 나를 유혹하는 건지 좀 헷갈렸다.
‘저렇게 집중하고 있는데 방해할 수는 없지.’
나는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슬리퍼를 신고 현관문 밖으로 나가 오피스텔 4층으로 내려갔다. 4층에는 한하린이 살고 있다.
오랜만에 한하린과 밖에서 저녁을 먹었다. 한하린은 해산물, 특히 어패류를 좋아했다. 이후에는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며 2시간 정도 놀다가, 근처 모텔에 들어갔다. 데이트의 마지막은 섹스로 정해져 있다.
“집에 가면 되지. 왜 모텔에 온 거야?”
“가끔씩 모텔에서 하는 것도 색다르고 재밌잖아요.”
한하린은 입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내가 옷을 벗기는 것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흐읍…, 응.”
한하린은 키스를 하면서 눈을 감지 않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키스를 하는 순간까지도 도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 도도함은 곧 내 자지가 박히면서 사라질 도도함이었지만.
우리는 침대 위에서 새벽이 될 때까지 서로의 몸을 탐했다.
아침이 되어 한하린과 함께 모텔을 나섰다. 한하린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나도 내 집으로 올라갔다.
부엌에 들어가자마자 쌓여 있는 배달음식 봉투와 상자들이 식탁 위에 쌓여 있었다.
‘치킨이랑 피자, 돈까스에서 회까지. 아주 많이도 시키셨군.’
미령의 방에 가까이 다가갔다. 미령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모양이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당분간은 미령이 현실을 즐기게 내버려둘 생각이었다.
???
내가 유독 자주 들어가는 유희 세계가 있었다.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를 줄여서 [백환]이라 부르는 유희 세계다. 그 이유는 휴식을 취하기 딱 좋은 세계였기 때문이다. 오직 내게만 충성하는 미녀 메이드가 있는 판타지 월드. 휴식을 취할 때는 여기가 딱 좋았다.
[뱀파이어 형사]도 나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선 내가 대한민국의 왕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나 이 세계에선 피곤해지는 일 몇 가지가 있었고, 널리고 널린 고층빌딩들 보다 친환경적인 판타지 세계가 더 휴식하기 알맞았다. 사람들이 괜히 귀농 힐링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게 아니듯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환]에는 유리아가 있었다. 그녀의 봉사에 익숙해진 나는 어지간한 것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예를 들면 음식. 유리아의 요리에 익숙해져서 입맛이 굉장히 높아졌다. 이제 와서는 웬만한 음식은 입에도 못 댈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백환 세계에 들어왔다.
“주군.”
갈색 머리카락을 한데 묶고, 왼쪽 눈에 뺨을 가릴 정도로 큰 안대를 착용한 여기사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플로이 람브레이.
내 아래에 있는 골든 로즈 기사단의 단장이다. 그녀는 현재 오러 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자였다.
“돌아왔어?”
현재 이 세계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실제로 국가 간의 무력 충돌이 몇 번 일어나기도 했고, 소규모의 국지전은 거의 사흘에 한 번씩 발생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여유로웠다. 대규모의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아직 여유 시간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반란군 무리를 토벌하고 방금 막 도착했다. 기사단의 피해는 전무하며, 800명의 반란군 중 300명을 포로로 삼았다.”
나는 전쟁으로 혼란스러울 때 골든 로즈 기사단을 앞세워 몇 개의 마을을 점령했다. 그런데 점령하기만 하고 관리를 아예 손 놓고 있다 보니 민심이 최악이었다. 다른 세력의 이간질 등의 이유로 점령한 마을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물론 반란이 성공하는 일은 없다. 플로이와 기사들 몇을 보내면 금세 진압당하니까.
“나머지 500명은?”
“죽였다. 저항을 포기하지 않더군. 주군의 명령대로 쓸만해 보이는 남자와 미녀들은 최대한 살렸다.”
“잘했어. 남자들은 노예병으로 징집하고, 여자들은 노에 마을로 보내버려.”
“그렇게 하겠다. 그리고 주군. 본대에서 지원 요청이 왔다고 들었다만.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겠나?”
“……왔었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플로이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듣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자동진행 중일 때 내 아바타가 대신 보고를 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모르겠군. 이럴 때는 유리아지.’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쳤다.
“유리아!”
10초도 지나지 않아 유리아가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그림자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네. 주인님.”
“본대에서 지원 요청이 왔다며?”
본대.
총사령관인 엔티온 프루커스가 직접 이끄는 군대를 말한다.
“지원 요청서가 아니라 명령서였습니다. 이틀 전에 왔었습니다. 여기 그 서류입니다.”
이틀 전이면 내가 자동진행을 할 때였다.
유리아의 그림자 속에서 서류가 하나 튀어나왔다. 그녀가 서류를 잡아 내게 공손히 건넸다. 명령서를 차분히 읽어봤다. 한 달 내로 발트 왕국의 미르푸보스 영지를 함락시키라는 공격명령서였다.
나는 서류를 플로이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그녀에게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편이 플로이가 이해하기 쉬웠다.
“미르푸보스 영지인가. 쉽지 않겠군. 미르푸보스 자작은 오뚜기 자작으로 유명하다. 오뚜기처럼 휘청일지언정 쓰러지지 않지. 미르푸보스 자작이 수성에 집중하면, 한 달이라는 시간은 부족할 거다. 아니, 거리를 생각하면 실제로 할 수 있는 공성 기간은 2주 남짓이겠지.”
플로이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심각한 건 그녀뿐이었다.
“그 정도 영지야 언제든지 함락시킬 수 있어. 방법은 많아.”
당장 내 옆에 있는 유리아만 해도 오러 마스터 상급이자 아크 메이지 상급의 경지다. 그녀 혼자서 미르푸보스 영지를 초토화시키는 건 일도 아니다.
그 외에도 우물에 독을 뿌리거나, 현대 무기로 폭격하는 방법도 있다. 아무리 마법이 있다고 해도 미사일 폭격을 어떻게 막겠는가.
“나도 안다. 주군이 전력을 다하면 이깟 영지는 아무것도 아니란 걸.”
“그런데 뭐가 걱정이야?”
“이건 총사령관의 시험이다. 총사령관은 주군의 역량을 보고자 미르푸보스의 함락을 명령했다. 즉, 총사령관의 시선이 주군에게 향할 것이라는 뜻이다.”
“……큰일인데.”
엔티온이 감시하고 있으면 현대 무기를 대놓고 쓰기 힘들었다. 현대 무기를 쓰는 순간 여러 가지로 날 귀찮게 할 테고, 그 여파가 어디까지 커질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유리아의 전력도 숨기고 싶다. 강한 힘은 견제받기 마련이다. 적어도 그녀가 대륙 최강자가 되는,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꼭꼭 숨길 것이다.
“메이드 장. 그대는 총사령관의 의도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주군에게 알리지 않았지?”
플로이가 유리아를 쏘아봤다. 유리아는 플로이의 스승이라 할 수 있었지만, 플로이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보다 나를 향한 충성심이 더 컸다.
“출정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주인님께 알릴 생각이었습니다.”
“주군께 먼저 알리고 출정의 준비를 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주인님께서 군과 관련된 일은 전부 제게 일임하셨습니다.”
플로이가 나를 쳐다봤다. 유리아의 말이 맞냐고 눈빛으로 묻는다.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파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일은 전부 유리아에게 맡겼다. 내가 이 저택에서 하는 일은 좆질이었다.
플로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 일은 주군께 보고해야 하지 않나? 메이드장이 독단으로 처리해도 될 정도로 작은 일이 아니다.”
“플로이 경은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착각?”
“이 일은 어려운 일도, 심각한 일도 아닙니다.”
“……미르푸보스 영지를 함락시킬 묘책이 있나보군. 어떤 묘책인지 들어봐도 되나?”
플로이가 눈을 빛냈다. 유리아는 대외적으로 메이드장에 불과하고, 플로이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기사단의 단장이다. 결국, 전쟁에 앞장서게 되는 건 플로이였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두 가지나?”
“하나는 내부 분열을 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몬스터를 이용한 양동입니다.”
플로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유리아의 의도를 깊게 생각하는 듯했다.
“둘 다 장단점이 있군.”
“네. 미르푸보스 영지의 내부 분열을 꾀하기 위해선 우선 그들을 고립시켜야 합니다. 보급로를 끊어야 돈과 식량, 권력 등을 미끼로 내부 분열을 꾀할 수 있습니다.”
“성공한다면 우리 쪽 피해는 거의 없이 미르푸보스 영지를 점령할 수 있겠군. 다만 미르푸보스 자작의 역량에 따랐다. 적에게 가능성을 주는 꼴이지.”
플로이는 유리아의 작전 두 개를 듣고 이미 계산과 판단을 끝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입을 열어 말하는 건 나 때문일 테지.
“두 번째, 몬스터를 이용하는 건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이건 총사령관의 시험이니, 악랄한 작전을 피하는게 좋지 않겠나?”
“다른 평범한 귀족들이라면 비난하겠지요. 그러나 총사령관인 프루커스 백작은 다릅니다. 그는 허명보다 실리를 추구합니다. 거기에 프루커스 백작의 우트렌 성은 악원의 수해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곳입니다. 몬스터를 이용하는 작전은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몬스터를 끌어올 수 있나?”
“미르푸보스 영지 근처에 루루트 산이 있습니다. 마법을 이용해 몬스터를 끌어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몬스터로 인해 대량의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우리 쪽 병사들의 희생도 불가피할지도 모르지.”
“대신 몬스터를 이용하면 변수가 없습니다. 하루 내로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주군의 악명은? 모두가 주군을 욕할 것이다. 백성들은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고, 귀족은 정면에서 비난할 것이다. 주군은 정적이 많다.”
“악명은 미담으로 가리면 됩니다. 미담은 돈으로 살 수 있고, 주인님의 권력이 강해지신다면, 악명은 영웅담이 될 것입니다.”
플로이는 유리아에게 향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결국, 판단하는 건 주군이다. 나는 주군의 기사로서 주군의 선택을 따르겠다.”
“저는 주인님의 뜻대로 행할 것입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몬스터 양동 작전으로 가자. 이참에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놈인지 적들에게 보여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