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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 801.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581/2,000)

〈 801화 〉 801.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믿기 힘든 정보에 머리가 복잡했다.

내 감정을 모두 제외하고 사실만을 정리한다.

유리아가 기억과 힘을 잃었다. 오러 마스터 상급에서 오러 익스퍼트 하급으로. 이건 전투기에서 자전거 수준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짐작 가는 건 하나뿐이다.

파란색 단검 유물의 시련.

‘유리아는 시련을 포기했나? 아니면 실패했나?’

나는 시련을 포기하고 심장이 터져 죽었다. 유리아라면 심장이 터지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했을 것 같다. 생명은 어떻게든 지켜냈지만,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고 힘을 잃었다던가.

‘…아니. 그건 내가 너무 좋게 생각하는 거겠지.’

좀 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유리아의 현재 상태는 시련의 도중일 가능성이 크다.

유리아에겐 내가 공유한 특성인 절대 정신이 있다. 기억을 잃은 것이 정신적인 작용인가는 둘째치고, 그녀에게 정신적인 공격이나 간섭은 아예 통하지 않는다. 본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얼굴을 보아하니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군. 주인님.”

“……가면서 설명해줄게. 유리아는 지금 어디에 있어?”

“별관에 있다. 별관을 멍하니 돌아다니고 있던 걸 메이드들이 발견했다. 바로 주인님에게 보고하러 움직였던지라 자세한 상황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어디 별관이지?”

현재 내 저택에는 본관 말고도 별관이 5개나 있다. 수련용, 놀이용, 숙소용, 손님용이다. 수련용 별관은 2개로 다음 달에 별관을 하나 더 늘릴 계획이었다.

“첫 번째 수련 별관이다. 메이드장은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수련을 하다 일이 터진 거겠지.”

“유리아가 그렇게 된 건 역시 유물 때문인가….”

“유물?”

나는 그녀에게 유물에 대해 설명했다.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메이드장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거밖에 없겠군.”

얼마안가 첫 번째 수련 별관에 도착했다. 소란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1층 복도 끝에 메이드들 사이에 멍하니 서 있는 유리아를 발견했다. 멜리사가 말했던 대로 검은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요가복과 비슷한 트레이닝복이라 몸매의 라인이 다 보였다.

“메이드장! 진짜 기억이 없어요?”

“메이드장이 없으면 저택이 망하는데….”

“저 사실 이번 달 봉급이 밀렸어요. 추가로 지급해주세요!”

“야, 지금 심각한 상황이야. 장난치지 마.”

“주인님 오셨다.”

떠들썩 하던 메이드들은 나를 보자마자 썰물처럼 비켜섰다. 나는 유리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유리아의 푸른 눈이 나를 쳐다본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움츠러든 어깨. 평소의 유리아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느껴지는 기운이 약하다. 멜리사가 말했던 대로 약해진 것이 확실했다.

“유리아! 진짜 기억을 잃었어? 내가 누군지 기억 안 나?”

유리아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유리아가 흠칫 놀랐다.

“그…. 모르겠어요. 아무 기억이 안 나서….”

“…….”

불안한 듯 말하는 그녀의 반응에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사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저번처럼, [공녀와 집사]의 이야기에 들어갔던 것처럼 유리아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나 실제로 본 그녀는 정말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내게 이런 심각한 장난을 칠 이유도 없었다.

내 손에 힘이 빠지자 유리아가 뒷걸음질을 치면서 내게 물러났다. 나는 다시 유리아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싶은 걸 참았다.

“미안하다, 유리아.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너무 당황했어. 차분히 소개하지. 나는 유진 프루커스. 메이드장인 유리아 그레이스의 주인이다.”

“아, 네…. 주인님… 이시군요.”

유리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신감이 없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유리아.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 네가 누군지는 알아?”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도 없어요. 제 이름도 방금 들어서 알았어요. 저, 저는 정말 이 저택의 메이드였나요?”

“거짓말이 아니야. 십 년도 전부터 넌 내 전속 메이드였어.”

“…그렇군요.”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정말로 수긍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유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리아는 의미를 몰라 당황했다.

“잠깐 손 좀 줘봐.”

“…아. 네.”

유리아가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올렸다. 나는 마나를 이용해 그녀의 몸상태를 살펴봤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겠지만, 내부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기억을 잃었다고 약해지는 게 말이 되지 않으니까.

“……!!”

경악했다.

기혈, 이 세계에선 달리 마나 로드라고 불리는 전부 꼬여있었다. 몇 개는 아예 닫혀 있다. 이러면 마나를 사용하기는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러나 유리아는 움직이고 있었다. 고통을 느끼는 기색도 전혀 없다. 그녀의 손을 잡고 놀란 나를 보며 도리어 놀라고 있다.

‘이 정도라면 폐인이 되고도 남을 수준인데…. 왜 마나가 순환하고 있는 거지?’

오러 익스퍼트는 말도 안 된다. 내 상식으로는 운이 좋아야 일반인 수준이다. 허나 그녀의 몸에는 마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내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호흡으로 미량의 마나가 들어가고…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마나가 움직이는군…. 지금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는 것도 마나를 움직이기 위해서인가.’

나는 뒤늦게 유리아의 육체가 ‘프록신의 마도서’에 의해 진화된 상태란 걸 떠올렸다. 그녀는 드래곤처럼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몸속에 마나를 쌓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안 된다.

“몸이 불편한 곳은 없어?”

“없어요. 제 몸속으로 뭔가 들어오는 것 같았는데… 혹시… 제 몸 상태를 봐주신 건가요?”

“기억을 잃었으니 혹시나 해서 확인해봤어. 몸은 멀쩡하더라.”

나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기억의 시작점이 어디이고, 언어나 문자에 대한 것, 자신에 대한 것.

알아본 결과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기억은 일절 없었다. 지식도 뒤죽박죽이다. 기본적인 예절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는 있는데 영천류와 그림자 마법, 라펠리 왕국 등의 역사적 지식을 전혀 모른다.

“주인님.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건 알겠다만, 메이드장이 힘들어 보이는군. 일단은 메이드장에게 휴식을 주는 게 좋지 않겠나?”

옆에서 보고 있던 멜리사의 의견에 새삼 유리아의 얼굴을 살펴봤다. 지친 기색이 있었다.

“…미안. 내가 너무 몰아붙인 것 같군.”

“아, 아니에요. 주인님.”

“중요한 질문 두 가지만 하자. 깨닫고 보니 지하 수련장에 있었다고 했지. 그 주위에 파란색 단검은 없었어?”

“그런 건 없었어요.”

“시련과 관련해서 뭔가 알고 있는 거 있어?”

“시련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의문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리아가 이용했던 지하 수련장에는 CCTV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었기에 알아보기도 힘들다.

뒤로 물러나려다가 유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대화를 하다 보니 나에 대한 경계심과 불안함도 어느 정도 풀린 모양이다.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꼈다. 유리아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잡고 입을 맞췄다.

“후웁…!”

유리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의 몸이 굳어졌다. 나는 평소처럼 그녀의 입술과 혀를 탐했다. 내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가 날뛰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유리아라면 당황하지 않고 혀를 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혀는 바닥에 붙어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쪼옥. 쪼옥. 쪽.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더욱 격렬히 유리아의 혀를 유린했다. 유리아의 혀가 조금씩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그녀가 손에 힘을 주어 내 어깨를 밀었다. 그녀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는 걸 다시 떠올리며 순순히 밀려났다.

“평소에 하던대로 했는데… 불쾌했다면 미안하군.”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유리아가 입가를 우물거렸다. 나는 멜리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멜리사. 유리아를 부탁해.”

“음? 메이드장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고?”

“피곤해 보이잖아. 저녁까지는 쉬게 두려고.”

“이상하군. 따로 할 일이라도 있나?”

“원래 플로이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어.”

“그렇군. 또 일이 터진 건가.”

“전쟁 중이니까.”

저택은 평화로워도 바깥은 어지러웠다. 전쟁의 영향이 적은 영지의 주민이라 할지라도 치솟는 식량값 때문에 고생 중이다.

“알겠다. 메이드장은 내가 맡지. 보아하니 주인님에게도 따로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당연히 있지. 옛 추억들을 돌아보며 유리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시도해볼 거야.”

“…영 믿음이 안 간다만….”

나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본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플로이가 소파에 앉아 홍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많이 기다렸어?”

“1시간 정도 기다렸다만,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니 괜찮다. 그것보다 메이드장이 기억을 잃고 약해졌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뭐야. 소문이 벌써 퍼졌다고?”

“지나가면서 들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허황된 이야기라 믿지 않았는데… 반응을 보니 소문이 진짜 인가 보군.”

“소문은 진짜야. 그래도 유리아는 유리아지만.”

“메이드장이라면 오래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올 테지. 주군, 지금은 정세에 신경 쓸 때다.”

플로이가 내 눈을 보며 분위기를 잡았다. 내가 아까부터 유리아를 생각하느라 집중하지 못한 걸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머릿속의 유리아를 지웠다.

“알았어. 무슨 일이야? 발트 왕국과의 전쟁이라면 순조로울 텐데?”

“글쎄.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은 상황인 것 같더군. 아까 본대에서 전령이 찾아왔다.”

“치하의 말을 가져왔을 리는 없을 테고…. 무슨 명령이야?”

“정확히는 보고서와 명령서다.”

“보고서?”

“최근에 있었던 전투에 관한 보고서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주군의 형제들. 젠트 프루커스와 카일 프루커스가 실패했다.”

입이 벌어졌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그 둘은 나와 비슷한 임무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나와 비교해서 젠트의 군대는 덩치가 컸다. 잘 훈련된 정예 병사가 많고, 그를 따르는 기사들도 최소 100명이 넘는다. 최근에는 몸집을 더 늘리고 있다는 정보가 내게 들려온다.

카일 프루커스의 군대는 덩치가 작다. 대신 개개인이 엄청나다. 병사의 경우 정예라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의 역전의 용사들이고, 그의 휘하에 모인 기사는 하나같이 베테랑들이다.

특히 카일에게 충성을 맹세한 모험가와 용병 출신의 병사들은 나도 우습게 보지 못한다. 그들 중 몇몇은 지금보다 더 성장하면 영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니까.

“둘 다 실패했다는 건 안 믿기는데. 진짜야?”

“본대에서 온 전령이 거짓을 알리겠나. 진짜다. 다만 실패했다고 한 건 어디까지나 총사령관이 정한 기간 내에 적지를 함락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승리하지도, 그렇다고 패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현재 고착상태라고 하더군.”

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도 어떤 명령서일지는 짐작 간다.

“아버지의 명령은 그거겠군. 지원.”

“맞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지원할 필요는 없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해서 지원하면 된다.”

“나한테 선택받지 못하면 그대로 죽나?”

“그럴 리가. 본대에서 다른 부대를 움직이겠지.”

플로이는 지도를 책상 위에 펼쳤다. 지도에 붉은색과 푸른색의 원이 표시되어 있었다.

“붉은 색은 젠트, 파란 색은 카일이다. 그들의 상대는 각각 줄리아드 자작과 마벨로트 남작이다. 공성기간이 늘어지고 있다더군. 우리 임무는 일주일 내로 지원을 가서 상황을 보고 군대를 도와 적군을 함락시키거나, 도망치는 것이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주일.

시간이 여유롭지 못했다. 거리를 보면 못해도 내일은 저녁에는 출정해야 한다.

내가 묵묵히 지도를 보고 있자, 플로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줄리아드 자작령은 평지가 많다. 말을 달리기 편하다. 그러나 줄리아드 자작의 병사는 약 2만5천이고, 예비군까지 합친다면 3만은 생각해야 한다. 마벨로트 성은 주위에 강이 흐른다. 무작정 다가가는 건 자살행위다. 그러나 적군은 약 1만으로 수가 적다. 어느 쪽을 지원하겠나?”

“……모르겠는데. 유리아에게….”

나는 입을 다물었다. 현재 유리아는 나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기억을 잃은 그녀는 줄리아드고, 마벨로트고 아무것도 모른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메이드장이 기억을 잃은 건 주군에게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주군은 메이드장에게 너무 의지한다. 메이드장의 엄청남을 모르지는 않지만, 우리의 군주는 메이드장이 아니라 주군이다. 주군이 생각하고 주군이 결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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