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7화 〉 807.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적들이 온다!!”
누군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의자에 앉아 지도와 편지를 살펴보던 카일은 벌떡 일어나 검을 들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전투 준비를 한다.
카일은 시선을 멀리 던져 마벨로트 고성을 내다봤다. 고성 주위에 강이 흐른다. 얼핏 보면 호수 위에 고성이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고성의 성문이 내려와 도개교가 되었다. 아름답다.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장면이다.
허나 현재 상황은 예술이라 부르기엔 매우 급박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병사들의 생명이 사라질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성문에서 나무로 된 말을 탄 목각 인형이 뛰쳐나온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100개에 가깝다.
“망할 목각 인형…!”
카일의 입에서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던 욕설이 나왔다. 이틀에 한 번꼴로 저절로 움직이는 목각 인형 기사가 나와 공격해댄다. 추정하기로 유물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목각 인형이다.
목각 인형은 죽으면 단순한 나무로 변해서 사라진다.
목각 인형은 기사처럼 보이지만, 실제 실력은 기사보다 못한 정예 병사 수준이다. 목각 인형은 카일의 군대에 큰 피해를 주지 못한다. 허나 군대를 피곤하게 만들고, 알게 모르게 경상자들이 속출한다.
‘저 목각 인형의 장점은 마벨로트 측의 소모가 없다는 거야.’
유물의 힘으로 이틀마다 100개의 나무 말을 탄 목각 인형을 소환해 부린다. 사기적인 유물 능력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뒤로 빠져라! 기사급 이상만 목각 인형을 상대한다!”
카일이 외쳤다.
일반 병사들이 나섰다간 피해만 입는다. 기사들이 나서서 피해를 입기 전에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인 최선이다.
오러 익스퍼트 최상급인 그가 목각 인형들을 향해 뛰어갔다.
매화일홍(梅花一紅).
카일의 검에서 붉은 오러가 치솟았다. 어떻게 보면 분홍색에 가까운 붉은색이다. 오러가 흔들릴 때마다 사람을 매혹하는 매화 향기가 물씬 풍겼다.
매화검이 허공에 수놓아졌다. 그가 검을 움직일 때마다 매화가 하나, 하나 만개한다. 총 10개의 매화가 피어나고 목각 인형을 베기 시작했다. 목각 인형은 오러에 취약했다.
“대장! 화살이야!”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매화회주(梅花回走).
카일의 정면에 그려진 매화가 회전하며 성벽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모조리 쳐냈다.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저들도 고립된 상태이니 보급이 오기까지 최대한 물자를 아끼려는 것이다.
카일의 뒤에서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의 검날이 목각 인형을 무자비하게 도륙한다. 3분도 되지 않아 목각 인형이 정리되었다. 카일은 검을 내렸다. 승리했다. 그러나 버틴 것에 불과했다.
쿠그그그긍.
마법의 힘으로 올라가는 도개교가 보인다. 억지로 도개교에 달려갔다간 수많은 마법을 상대해야 한다.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카일은 병사들을 둘러봤다.
모두 지쳐 있었다.
공성 기간만 벌써 3주가 넘어가는데 실질적으로 얻은 이득은 별로 없었다. 성 주위를 흐르는 강 때문에 무작정 공성을 할 수도 없다. 그나마 적들의 보급로를 끊긴 했는데, 마벨로트 성에는 3개월분의 식량이 저장되어 있다는 암울한 소식만 들려온다.
카일은 병사들을 다독였다. 다행히 그의 명성과 인망에 모인 병사들 덕분에 사기 저하는 적었다.
“테리우스.”
카일은 구석에 앉아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젊은 용병에게 다가갔다. 그가 고개를 돌려 카일을 쳐다봤다. 그의 거친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대장! 여긴 왜?”
테리우스의 얼굴과 몸에는 흉터가 무척 많았다. 그는 어렸을 적에 용병의 노예로 팔렸다. 카일이 그 용병에게서 구해주기 전까지 혹사당한 것은 물론이고 주기적으로 학대까지 당했었다.
“병사들을 둘러보는 중이었어. 테리우스, 팔은 괜찮아? 이번에 다친 거지?”
“이 정도로 뭘. 살짝 긁혔을 뿐이야. 검을 휘두르고 방패를 드는데 아무 문제 없어.”
“내가 준 포션은?”
“비상용으로 고이 모셔두고 있어. 고작 팔 긁힌 거에 포션을 쓸 순 없잖아.”
“…….”
카일은 포션을 아낌없이 쓰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지금 군대의 재정 상황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군대는 소모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식량이 소모된다. 가뜩이나 식량값과 포션값이 폭등하는 때다. 포션같은 귀한 물건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카일은 테리우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테리우스의 팔을 잡고 직접 붕대를 감아줬다.
“대장. 나 혼자서 해도 괜찮은데.”
“할 일이 없어서 그래. 혼원심공(混元心功)은 잘 수련하고 있지?”
“대장의 알려준 대로 매일 새벽마다 수련하고 있어. 이 마나수련법 덕분에 오러 익스퍼트가 됐는데 게을리할 리 없잖아.”
카일은 테리우스에게 화산파의 무공을 전수했다. 테리우스의 심성과 재능을 보고 화산파의 제자로 삼기로 결정한 것이다. 테리우스라면 분명 뛰어난 매화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수련해. 네 재능과 혼원심공이라면 언젠가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노예 출신인 내가 오러 마스터라…. 꿈만 같은 이야기네.”
“어디까지나 네가 멈추지 않고 노력했을 때만의 이야기야. 막히는 게 있으면 내게 와서 말해. 내 조언이 도움될 거야.”
“…고마워, 대장. 대장한테 받은 은혜가 많아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할 정도야.”
“나랑 약속한 것만 잘 지켜주면 돼.”
“솔직히 화산파고, 매화검수고… 잘 모르겠지만, 약속한 이상 어길 일은 없을 거야.”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우스는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믿을 수 있는 남자였다.
카일의 시선이 붕대를 잡은 테리우스의 왼손에 향했다. 왼손 약지에 투박한 철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철반지…. 옛날부터 항상 끼고 있더라?”
예전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 보니 신경 쓰였다. 그의 머릿속에 유리아가 떠올랐다. 유리아도 왼손 약지에 유진이 선물한 반지를 꼈었다.
“아. 이 반지는… 나한테 무엇보다 중요한 물건이야. 노예였던 시절에 친구와 헤어지기 전에 철반지를 나눠 가졌어. 이 반지를 끼고 있는 이상… 반드시 찾아낼 거라고 약속했지.”
“그 친구는 혹시 여자?”
“어? 응. 여자야.”
테리우스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오오.”
카일이 싱글벙글 웃으며 그 여자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이름은 네피아. 가장 특징적인 건 은발이야.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얼굴은 변했을지 몰라도 은발만큼은 변하지 않았을 거야.”
“은발…. 혹시 청은발이야?”
무심코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아니야. 네피아는 회색에 가까운 은발이야. …그러고 보니 네피아를 데려간 사람이 청은발이었는데….”
“그래? 청은발은 희귀하지만 찾아보면 제법 많지. 그, 네피라안 여자를 찾는 걸 도와줄까?”
테리우스는 철반지를 쓰다듬었다. 철반지는 불편했다. 어린아이가 급하게 만든 철반지다. 크기를 늘리는 것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불편한 게 당연했다. 그러나 테리우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철반지를 손가락에서 뺀 적 없었다.
“…지금 당장 네피아를 찾을 생각은 없어. 모아둔 돈도 없고, 네피아의 행적을 알게 되면…. 나는 분명 전부 내팽개치고 네피아에게 달려가 버릴 테니까. 적어도 내가 그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때…. 네피아를 찾을 거야.”
“테리우스…. 넌 정말 네피아를 좋아하는구나.”
테리우스는 얼굴을 붉혔다. 노골적인 말에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장의 말이 맞아. 나는 네피아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분명… 네피아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야.”
카일은 그가 조금 부러워졌다. 사랑하는 여자를 당당하게 말하는 그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철반지를 왼손 약지에 낀 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보니까 다른 사람도 왼손 약지에 반지를 자주 끼는 것 같던데.”
“다른 손가락에 끼면 많이 방해되니까. 새끼손가락은 너무 작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북부 출신에게 들은 건데 그쪽 어디에는 결혼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는 풍습이 있다더라. 왼손 약지가 심장과 이어져 있다던가?”
“…결혼반지…?”
“헉!”
테리우스는 깜짝 놀랐다. 카일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심각한 얼굴의 카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대, 대장…?”
“…미안. 좋지 않은 생각이 나서.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한 것 같아.”
카일이 얼굴을 풀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또 둘이서 이야기하자.”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군막으로 향했다.
???
달리는 마차의 속도가 내려갔다. 목적지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메이드복을 입은 유리아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가빠진 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기대었다. 얼굴이 붉은 이유는 방금까지 섹스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치마 아래 다리 사이에는 내 정액이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을 것이다.
“여보…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유리아가 눈을 감고 고개를 올렸다. 나는 그녀의 뺨을 잡으며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쪽. 입을 떼려고 하는데, 이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유리아가 입을 맞춰온다. 유리아는 몇 번 더 입을 맞춘 뒤에야 떨어졌다. 그녀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마차 창문을 열어 밖을 쳐다봤다. 군막과 병사들이 보인다. 그리고 저 너머, 카일이 공략하고 있는 웅장한 마벨로트 고성도.
창문을 다시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췄다. 유리아를 쳐다봤다. 흐트러진 옷을 정리한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을 연기했다. 겉모습만 보면 기억을 잃기 전의 유리아같았다.
“유리아.”
“네. 주인님.”
“카일에 대한 정보는 숙지했지.”
“네. 전부 숙지했습니다. 들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카일은 오래전부터 유리아에게 마음이 있다. 유리아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면 귀찮게 굴것이 틀림없다.
‘뭐, 유리아는 잘하겠지.’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그 재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주군. 도착했습니다.”
기사단장 플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아가 마차 문을 잡고 열었다. 나는 열린 문을 통해 마차 밖으로 걸어나갔다. 유리아가 내 뒤를 따라 나온다.
마차에 내려선 나는 정면을 쳐다봤다. 카일이 있었다. 카일의 뒤에는 그의 기사와 병사들이 절도 있게 서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정예라는 분위기가 팍팍 느껴진다.
카일은 내 뒤의 유리아를 힐끔거리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지원 와줘서 고마워. 최근에 미르푸보스 성을 함락시켰다고 들었어. 못 본 사이에 대단해졌구나.”
나는 카일의 손을 잡아 간단히 악수를 했다. 기분은 영 별로였다.
“마벨로트 성에 비하면 미르푸보스 성은 쉬운 편이지. 현재 상황은 어때? 카일 형.”
카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여전해. 마벨로트 성은 버티고 있어. 정보대로라면 3개월 분의 식량을 가지고 있다 해. 그 시간이면 발트 왕국의 지원군이 도착하고도 남아. 지금까지 지원군이 오지 않은 건… 발트 왕국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발트 왕국의 지원군은 정확히 언제 오는데?”
“빠르면 닷새. 늦어도 이레 안에는 올 거야. 시간이 없어. 혹시 네겐 방법이 있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막사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중요한 계획이잖아?”
“네 말이 맞아. 내가 마음이 너무 급했어. 내 막사로 가자.”
나는 플로이와 유리아와 함께 카일의 뒤를 따랐다. 내가 끌고온 병사와 노예병들은 여기사들이 잘 통솔할 것이다.
카일은 걸으면서 유리아에게 말했다.
“유리아. 오랜만이야. 넌 변함 없구나.”
“오랜만입니다, 카일 공자님. 공자님은 더 성숙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
유리아의 칭찬에 카일이 멋쩍게 웃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갈색 머리의 병사가 튀어나와 앞길을 막았다. 얼굴과 몸에 흉터가 많은 젊은 병사였다. 잔뜩 흥분한 그 남자는 유리아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다, 당신! 그때 네피아를 데려간 그 여자지?! 확실해! 내가 잘못 봤을 리 없어! 네피아! 네피아는 지금 어디에 있어?! 대답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