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8화 〉 808.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다, 당신! 그때 네피아를 데려간 그 여자지?! 확실해! 내가 잘못 봤을 리 없어! 네피아! 네피아는 지금 어디에 있어?! 대답해줘!”
불쾌했다.
기사로 보이지도 않는 고작 병사 따위가 앞길을 막아선 것도, 나를 무시하고 유리아에게 멋대로 말을 건 것도. 아니, 설령 기사였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불쾌했을 것이다.
짜증스레 입을 열려는데, 나보다 먼저 카일이 나섰다.
“테리우스. 이게 무슨 무례지?”
내가 아는 카일이 맞는지 의심 갈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였다. 흠칫, 놀란 테리우스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바로 바닥에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
카일은 테리우스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유리아에게 돌렸다.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미안, 유리아. 이 녀석은 흥분하면 주위가 안 보이는 기질이 있거든. 놀라진 않았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유리아는 내 눈치를 살폈다. 카일은 뒤늦게 내게도 말했다.
“유진. 테리우스가 실수를 저질렀어. 용서해주지 않을래?”
“형. 설마 용서를 끝으로 그냥 넘어갈 건 아니지? 그럼 좀 실망인데.”
“……실망이라고? 무슨 소리야. 이런 건 가벼운 해프닝이잖아.”
“일개 병사에 불과한 자가 우리 길을 가로막고 소리쳤어. 군과 관련된 중요한 일 때문이라면 모를까. 시답잖은 사적인 일을 문제로 가로막았지. 평화로운 시기 때의 평민이라도 쉽게 용서할 수 없는데, 전시 때, 하물며 병사가 이랬어. 이건 군법으로 다스려야지.”
바닥에 엎드린 테리우스가 움찔 떨었고, 카일이 숨을 삼켰다.
“……유진. 내가 이렇게 사과할게. 나를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될까?”
“안 돼. 이게 나만의 일이라면 모를까. 내 기사가, 내 병사들이 보고 있어. 내가 여기서 쉽게 용서하며 내 병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차분한 눈동자로 카일을 쳐다봤다. 카일은 당황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채찍 다섯 대로 끝내자.”
“열 대. 만약 내 병사였다면 팔 한 짝은 잘랐을 거야. 아니지, 지금이 전시란 걸 감안하면 목을 잘랐을지도 모르겠네.”
“테리우스는 일반 병사가 아니야. 오러 익스퍼트지. 기사는 아니지만, 기사가 될 시력은 갖췄어.”
“알았어. 다섯 대로 하자.”
“유진…. 너는 변했구나. 전쟁이 널 그렇게 만든 걸까. 아니면….”
“형. 난 안 변했어. 예전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야. 그렇지, 유리아?”
“네. 주인님. 주인님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
카일은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테리우스를 쳐다봤다. 바닥에 엎드린 그의 왼손 약지에 있는 철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네피아가 목에 걸고 있던 철반지처럼 조잡하다.
‘네피아의 이름을 부르던 걸 보면… 이놈이 네피아의 소꿉친구인가.’
설마 카일의 밑에 있었을 줄이야.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네피아는 내 저택에서 일하는 노예다. 넌 네피아를 어떻게 알고 있지?”
테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간절함이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피아와 저는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입니다. 부디 네피아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네피아는 여기에 없다. 내 저택에 있지. 그리고 네피아와 만나서 뭐하려고? 네피아는 이미 내 노예다. 내 소유물이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돈을 내겠습니다. 네피아의 자유를 사겠습니다. 네피아를… 풀어주십시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네피아는 내 마음에 쏙 든 메이드다. 거기에 메이드장 대리로서 유능하다. 그런 네피아를 풀어주는 건 미친 짓이다.
“얼마? 얼마를 낼 거지?”
“1억…. 1억 네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낼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가진 돈이 많았다. 전쟁으로 인해 노예가 시세가 떨어진 지금이라면 괜찮은 노예 2~3명 정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나는 코웃음을 쳤다.
“적군. 네피아를 키우며 교육 하는데 들어간 돈이 얼마인지 아나? 거기에 네피아는 미색이 뛰어난 아이지. 노예 상인에게 팔아도 10억 네르는 가볍게 받아 낼 수 있다.”
“10억 네르 라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말이 안 될 건 또 뭐냐. 네피아는 웬만한 귀족들보다 뛰어나다. 미색, 지식, 나이…. 그 어느 것에도 빠지지 않지. 네피아의 자유를 구입하고 싶다면 20억 네르를 가져와라.”
“…20억… 20억….”
테리우스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용병 생활을 하며 20억을 모으려면 최소 10년은 넘게 굴러야 한다. 어느 정도 명성 있는 용병이라면 모를 일이지만, 내 눈에 보이는 테리우스는 애송이였다.
“…유진. 노예의 가격이 20억은 너무하잖아. 내가 봤을 때는 10억이 적당해 보여.”
“형의 말도 일리가 있네. 10억. 10억을 가져와. 그럼 네피아에게 자유를 줄게.”
“…10억.”
테리우스의 눈동자가 돌아왔다.
“정말 10억으로 네피아에게 자유를 주시는 겁니까?”
“내가 한 입으로 두말 할 것 같나?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내 말을 들었고, 카일 형도 증인이 되었다. 내가 뱉은 말에는 이미 내 이름이 실렸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도 상관 않겠다. 10억을 가져와라. 네피아에게 자유를 주지.”
“유진 프루커스 남작님. 기다려 주십시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테리우스의 두 눈에 뜨거운 의지가 깃들었다.
“이해할 수 없군. 왜 그렇게 하는 거지?”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네피아와 다시 만나기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찾아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 그럼 그 약속을 지켜봐라.”
“반드시…!”
나는 카일에게 눈짓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병사들을 불렀다. 테리우스는 병사들에게 잡혀 끌려갔다. 잠시 후, 등 가죽 터지는 소리가 5번 들렸다.
군막 안에 들어갔다.
회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커다란 책상 위에는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고, 한쪽에는 커다란 지도가 올려져 있다.
나와 플로이는 의자에 앉았다. 유리아는 내 전속 메이드로서 이곳이 아닌 내가 머물 군막으로 미리 보냈다. 그곳에서 군막을 청소할 것이다.
회의실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카일의 군대를 이끄는 간부들이다. 총 10명이 넘었고 하나같이 인재다. 과연 주인공이라 해야 할까. 인재를 모으는 실력만큼은 뛰어나다. 아니, 카일의 경우엔 인재가 저절로 모였다고 해야 맞겠지.
‘엘프와 드워프도 있군. 기사와 용병, 모험가… 암살자 출신도 있고. 개성 참 넘치는군.’
그중에서 내 시선을 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짧은 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눈매가 무척 날카롭다. 진홍색 눈동자는 색깔과 달리 얼음처럼 차갑다. 다리가 쭉 뻗은 늘씬한 미녀였다. 가슴은 C컵이고 장교복을 입었다. 치마는 짧은 편인데 검은색 스타킹을 신어서 그런지 정숙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단숨에 떠올렸다. 원작에 나오는 캐릭터다.
‘스칼렛 번클로가 확실하군.’
원작의 카일이 신뢰하는 장군 중 한 명이다. 개인의 무력은 변변찮으나, 군대를 운영하고 지휘하는 실력이 뛰어나다.
‘갖고 싶네.’
현재 내게는 지휘관이 부족했다. 원래는 유리아나, 멜리사, 플로이가 지휘하고 있으나, 그녀들의 역할은 군의 지휘가 아니다. 유리아는 메이드장, 멜리사는 특수 부대의 리더, 플로이는 기사단장이다.
‘지금 내 군대에는 적당한 지휘관이 없단 말이지….’
적당한 남자 새끼를 뽑아 지휘관 자리에 올려둔다? 내 본능이 허락하지 않는다.
‘스칼렛은 카일에게 충성 맹세를 했나? 서먹서먹해 보이는데….’
원작을 떠올려보면 스칼렛은 후반부가 되어 카일을 인정하고 따른다. 그 이전까지는 카일에게 협력만 했을 뿐이지 충성을 바치진 않았다.
“전원 참석했네. 시작하자.”
카일의 말과 함께 회의는 시작했다. 자신을 정찰조장이라 소개한 엘프 남자가 현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발트 왕국의 지원군이 출발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닷새 안에 마벨로트 성을 함락시키거나, 포기해야 합니다.”
“전 포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5,000명의 지원군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5,000명의 지원군이 있다면 할만하지 않겠습니까? 전 가능하다고 봅니다.”
“제 작전을 들어보시죠. 나무를 벌목해서 뗏목처럼 묶어 거대한 다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 다리로 강을 건너기만 한다면… 우린 이길 수 있습니다.”
“헛소리. 적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소?”
“자, 자, 너무 흥분했어. 진정하고 차분히 의견을 말하도록.”
회의는 시끌시끌했다. 카일은 어느 한 명의 의견도 무시하지 않고 들으며 회의가 원활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중재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투석기를 이용하죠.”
“투석기? 성벽이 고작 그걸로 무너질 것 같습니까? 저 성벽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투석기로 성벽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강에 바위를 채워 길을 만들자는 뜻이었습니다. 나무는 불에 타고 쉽게 부서지지만, 바위는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길이 만들어지면 공성을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싸하군요. 근데 바위는요? 이 근처에는 바위가 없습니다.”
“5,000명의 추가 지원군이 있으니 바위는 이곳 바위지대에서 가져올 수 있습니다.”
스칼렛의 손가락이 지도를 가리켰다. 좀 멀리 떨어져 있긴 했다.
“…그렇게 쉽게 안 됩니다. 적들에게도 마법사가 있고, 설령 바위로 길을 만들었다고 해도 완전한 길이 아닙니다. 대량의 희생자가 발생할 겁니다.”
누군가가 스칼렛의 세부 작전을 말했다. 투석기로 던진 바위 사이를 아군의 시체로 메꿔야 제대로 된 다리가 만들어진다고.
“이건 전쟁입니다. 희생은 감수해야 합니다.”
스칼렛은 안색하나 바꾸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카일을 비롯해 대부분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카일의 힘과 신념을 동경하며 모여들었다. 사람의 희생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좋군. 그 작전으로 가지. 넌 이름이 뭐지?”
“…스칼렛 번클로입니다. 제 3부대 천인장입니다.”
“잠깐만, 유진. 이 작전은 결국, 정면 돌파야. 희생이 너무 많아. 좀 더 좋은 작전이 있을 거야.”
“형. 난 이 작전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이 작전이 아니라면 돌아가겠어.”
“…….”
모두가 침묵했다.
“형의 군대에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선두에서 진격하는 건 내 군대가 할게. 내가 할 말은 끝이야. 내일까지 대답해줘.”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플로이와 함께 막사 밖으로 나갔다.
???
카일 몰래 스칼렛을 만났다. 내 천막 안으로 그녀를 불러들인 것이다.
오늘 회의 때 스칼렛의 의견을 듣고 알았다. 스칼렛은 아직 카일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카일은 아직 그녀의 냉혹한 신념을 바꾸지 못한 것이다.
“프루커스 남작님의 독대에 응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지. 카일 형이 아닌 내 밑으로 올 생각은 없나?”
“…스카웃 제의입니까. 예상은 했습니다.”
스칼렛은 전혀 놀라지 않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혹시 카일 형에게 충성을 맹세했나?”
“아닙니다. 카일 님과는 사정이 있어 함께 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르십니까? 전부 알고 절 부른 줄 알았습니다만.”
진홍색의 눈동자는 나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물론 알지. A급 용병단인 에어로의 부단장 스칼렛 클로번. 카일 형과 함께 하는 이유는 에어로의 단장이 카일의 밑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기 때문 아닌가?”
“네. 맞습니다. 단장은 카일 님에게 매료되었습니다.”
“너는 매료되지 않았나?”
“…카일 님이 대단한 사람이란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랑은 좀 맞지 않더군요.”
나는 씨익 웃었다. 그녀의 말은 내게는 무척 긍정적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첫째로 제게 어디까지의 권한을 줄 수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내 밑으로 오면 네가 최고 지휘관이 될 거야. 기사단을 제외하고 2만의 병사를 지휘할 수 있을 거야.”
2만.
노예병을 포함한 내 군대의 전부다.
“둘째로 제 작전을 존중해주셨으면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작전이라고 묵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난 네 작전이 마음에 들던데?”
“진심이십니까?”
“병사가 얼마나 죽던지 상관없어. 병사나 노예는 얼마든지 뽑으면 되니까. 아, 그래도 정예 병사들은 될 수 있으면 소중히 다뤄줘. 노예와 달리 키우려면 돈과 시간이 많이 들거든.”
“네. 유진 님.”
“셋째는 뭐야?”
“…셋째는 됐습니다. 방금 답을 들었으니. 이제 제가 유진 님에게 질문을 던져야겠군요. 대가는 무엇입니까.”
“몸과 영혼을 내게 바치는 절대적인 충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