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4화 〉 814.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네피아는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메이드복은 그대로 두고 옷과 종이, 볼펜 등등의 물건을 챙겨 배낭에 넣었다.
“…저기. 네피아. 이 화려한 드레스는 뭐야? 혹시 이것도 네 거야?”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 있는 화려한 보라색 드레스를 가리키며 테리우스가 물었다. 절대로 노예가 가질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네피아는 드레스를 보고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거야. 일 년 전쯤에 주인님이… 아니, 이제 주인님이 아니지. 유진 님이 내 생일이라고 선물을 주셨어.”
“……유진 님이 주셨다고…? 네게?”
노예의 생일을 챙겨주는 주인이라고? 테리우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용병의 노예였을 때, 생일은 물론이고 용병이 기분 좋은 날에도 선물을 받아본 적 없다. 먹다 남긴 음식물을 받아 본 적 있긴 하나, 그걸 선물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메이드들도 생일이 되면 선물을 받아. 그래도 나처럼 이런 드레스를 받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 드레스. 입은 일은 있고?”
귀족이라면 모를까. 테리우스의 상식으로 노예가 드레스를 입을 일은 없었다.
네피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테리우스의 말에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내가 노예였던 건 맞아. 하지만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미, 미안해. 내가 너무 무신경했어.”
“……드레스를 입을 일은 의외로 많아. 이 저택에서 두 달에 한 번, 못해도 세 달에 한 번은 연회를 열거든. 나를 비롯해 하인들도 참가할 수 있는 연회를 말이야. 이 드레스도 이미 몇 번이나 입은 거야. 내 보물 중 하나야.”
“그렇… 구나.”
네피아는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개어 배낭에 넣었다. 그 외에도 테리우스가 모르는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 단검은?”
“호신용이야. 잘 만들어졌지? 이것도 유진 님이 주신 건데, 무려 드워프가 만든 단검이야. 이것도 내 보물이야.”
“대, 대단한 단검이야.”
숨이 막힐 정도로 훌륭한 단검이었다.
테리우스는 드레스와 단검을 팔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저것들을 팔면 몇 년은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피아의 반짝이는 두 눈을 보니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네피아가 가장 아끼는 보물인데 어떻게 팔아치우자고 할 수 있을까.
“이건 내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야.”
“반지…?”
“주인님에게서 얼마 전에 받았어.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서랍 안에 꼭꼭 숨겨 두고 있었는데….”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였다. 네피아는 그 다이아 반지를 왼손 약지에 꼈다.
“예쁘지?”
“예, 예뻐. 그런데 그 반지… 왜 왼손 약지에 끼는 거야? 왼손 약지의 의미… 알고 있어?”
“응? 아! 북쪽의 풍습에 관해선 알고 있어. 결혼반지를 약지를 끼는 걸 말하는 거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북쪽의 풍습이잖아. 별 의미는 없어.”
“……그렇지.”
테리우스는 자신의 왼손을 쳐다봤다. 약지에 낀 철반지가 보인다. 한 번도 철반지가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오늘따라 철반지가 무척 초라해 보였다.
“네피아. 내가 준 철반지는….”
“잘 간직하고 있어. 소중한 물건이니 항상 가지고 다닌다고?”
네피아가 가슴 쪽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줄에 걸린 철반지가 보였다. 항상 몸에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심했다.
“…철반지는 반지니 손가락에 끼지 않을래? 그편이 더 안전할 거야. 나는… 네피아가 왼손 약지에 그 반지를 껴줬으면 좋겠어. …나처럼.”
“응? 미안. 지금은 옛날보다 내 손가락이 커져서 철반지가 안 맞아.”
“내가 다시 네피아의 손가락에 맞춰줄게.”
“괜찮아. 철반지는 끼면 불편하고 아파서 끼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 목걸이로 계속 간직할 테니 문제없잖아?”
“……네 말이 맞아.”
네피아가 모두 짐을 쌌다. 테리우스는 빠르게 짐 배낭을 왼손을 쥐고 들었다. 제법 무거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테리우스. 내가 들게.”
“아니야. 괜찮아. 내가 들게 해줘.”
“……알았어. 저택에서 저녁 먹고 저택을 나갈 거야. 괜찮지?”
“괜찮아. 내가 타고 온 마차가 있으니까. 프터스 영지랑 가까워서 밤에 출발해도 돼.”
네피아와 테리우스는 방을 나섰다. 그들은 식당으로 향했다. 도중에 메이드 몇 명과 부딪혔다.
“네피아? 왜 옷을….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고?”
“…얘는 테리우스에요. 제가 저번에 말했었죠?”
“아. 어렸을 적의 친구. 그랬지. 저택을 떠나는 거야?”
“네. 이제 노예가 아니게 됐거든요.”
“…잘은 모르겠지만 힘내. 그곳에서 잘 지내.”
테리우스는 이상함을 느꼈다. 마주치는 메이드들은 모두 네피아가 잘 지내기를 바라며 응원하며 짧게 인사한다. 말은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들의 눈은 모두 네피아를 동정하고 있었다.
‘…기분 탓인가?’
네피아는 자유를 얻었으니 부러워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테리우스는 괜히 불안해졌다.
이윽고 식당에 들어선 테리우스는 깜짝 놀랐다. 굉장히 넓고 깨끗했기 때문이다. 또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무척 많았다. 테리우스는 네피아를 따라 음식을 접시에 담아 먹었다. 팔이 하나뿐이라 네피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음식을 먹은 그는 깜짝 놀랐다.
‘맛있다!’
그냥 맛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는 카일의 도움을 받아 귀족들이 먹는 요리를 먹어본 적 있는데, 그때 먹은 요리도 이것에 비하면 부족했다.
특히 치킨과 콜라라는 음료는 혁명적이었다.
“맛있어? 입맛에 맞아?”
“어? 응. 엄청 맛있어. …이런 걸 먹어도 되는 거야?”
“괜찮아. 아침, 점심, 저녁 매일 먹는걸. 옆을 돌아보면 다른 메이드들도 그렇잖아.”
테리우스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 메이드 뿐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아름다운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들은 네피아에게 다가와서 이런저런 말들을 나누다가 사라졌다. 네피아에게 이별 선물을 건네는 메이드도 있었다.
“테리우스. 이것도 먹어 봐. 카르보나라인데 요즘 저택 내에서 유행이야.”
“처음 먹어보는 거지만 엄청나게 맛있어.”
“이 스테이크도 먹어 봐. 멜리사 언니는 스테이크를 좋아해.”
“이건… 내가 먹어본 그 어떤 고기보다 맛있어.”
식사는 계속 이어졌다. 음식들을 먹어 치우던 테리우스의 손은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어느 순간부터 아예 멈췄다. 배가 찼는데 식탁 위에는 음식들이 아직 한 가득이다.
“…네피아. 미안, 더 이상은 못 먹겠어. 이 음식들은….”
“괜찮아. 버리면 되니까.”
“…버려? 이렇게 많은 음식을?”
“배가 부른데 억지로 먹는 건 식사가 아니라 고문이잖아. 저기 봐봐. 이 저택에선 음식을 버리는 건 흔한 일이야.”
실제로 메이드들이 남은 음식을 거리낌 없이 버리고 있었다. 버리는 음식 중에는 테리우스가 극찬한, 평민들도 쉽게 접하지 못하는 스테이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개 메이드가 귀족처럼 사치를 부리고 있었다.
“…….”
테리우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저택은 뭔가 이상하다.
남은 음식들을 전부 버리고 식당을 나온 네피아와 테리우스는 멈추지 않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 네피아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테리우스는 그녀가 이 저택에서 자신처럼 고생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안도했다. 동시에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니야. 난 잘했어. 내가 네피아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네피아는 프루커스 남작에게 계속 범해지고 능욕당했을 거야.’
유진에게 안기던 네피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능욕당하는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연기야. 프루커스 남작의 기분을 맞추기 위한 연기가 분명해.’
저택 정문을 나왔다.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은 무감정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해가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저녁 날씨는 쌀쌀했다.
“네피아. 이쪽이야.”
“응.”
그들은 마구간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프터스 영지로 향했다. 반나절이 걸리니 도착하면 새벽일 것이다.
마차가 출발했다. 테리우스와 네피아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테리우스는 어색한 분위기에 당황하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네피아. 그날 이후로 어떻게 지냈어? 난… 용병의 노예가 되었는데….”
“테리우스. 엄청 고생했겠구나.”
“고생은 나만이 아니라 너도 했지. 너는….”
유진 프루커스에게 범해졌잖아.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 고생은 별로 안 했어. 음식도 맛있었고, 글도 배웠고, 내 또래의 친구들도 있었고. 힘든 일은 없었어.”
“그, 그래? 다행이네….”
“…….”
“……이, 이번에 난 기사로 임명받았어. 내가 모시는 주군은 유진 프루커스 남작의 형인 카일 프루커스 님이야. 카일 대장은 아직 받은 작위는 없지만, 대단한 사람이 될 건 확실해. 카일 대장과 처음 만난 건 내가 용병의 노예로 지낼 때인데….”
테리우스는 구구절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어색한 공기를 조금이라도 풀어보기 위해서였다. 네피아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들의 대화는 2시간도 지나지 않아 끊어졌다.
덜컹덜컹.
마차 달리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
테리우스의 집에 도착했다. 그의 집은 평민의 집보다 조금 더 큰 수준에 불과했다. 유진의 저택에 있던 네피아의 방에 비하면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네피아는 멍하니 집을 쳐다봤다. 20년은 된 것 같은 낡은 집이었다.
“…이번에 기사가 되고 나서 받은 집이야. 원래는 더 좋은 집은 받았는데…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나, 나 때문이구나. 어쩔 수 없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2개가 전부였다. 천장에는 전등이 없어서 촛불을 켜야 했다. 촛불을 켰는데도 방안은 어두웠다.
네피아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가 보였다.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위생 상태였다. 집에서 나는 냄새도 고약했다.
“안쪽 방에 침대가 있어. 그… 네피아. 너만 괜찮다면 같이 누워서 자자.”
테리우스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야. 침대는 네가 써. 난… 의자에서 잘게.”
“뭐?! 미, 미안 네피아. 내가 너무 배려가 없었던 것 같아. 침대는 네가 써! 내가 의자에서 잘 테니까!”
“정말 괜찮아. 내가 의자에서 잘게.”
테리우스는 몇 번이나 말했지만, 네피아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네피아가 한사코 거절한 이유는 침대도 마찬가지로 더러웠기 때문이다.
“저기 테리우스. 냉장고나 옷장은 없어?”
“옷장은 있는데… 냉장고는 미안. 비싼 물건이라 아직 없어. 나중에, 돈을 모아서 꼭 사줄게.”
옷장에서 시선을 뗐다. 낡다 못해 썩기 시작한 옷장에는 감히 옷을 넣어둘 엄두도 나지 않았다.
“……물은? 수도꼭지랑 인덕션도 안 보이는데?”
“물은 우물에서 떠와야 해. 저기 구석에 떠 놓은 물이 있어. 인덕션은… 뭔지 모르겠어. 그게 뭐야?”
“……아궁이 말이야. 밥은 해먹어야 할 것 아니야?”
“아. 저기서 하면 돼. 장작이 부족하네. 내일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챙겨둘게.”
“샤워실이나 목욕탕은… 당연히 없지?”
“미안. 그것도 없어. 욕조는… 내가 어떻게든 구해볼게.”
“……내일 아침에 먹을 음식은?”
“내일 식당에서 받아 올게. 원래는 아침은 안 먹지만… 넌 아침을 먹는 것 같으니까. 아, 직접 요리할 거야?”
“미안. 난 다른 건 괜찮아도 요리는 못 해.”
“그, 그래?”
다음날이 되었다.
네피아는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들을 쳐다봤다. 딱딱한 빵과 따뜻한 스프. 스프를 한 입 먹어봤다. 밋밋했다. 빵은 지나치게 딱딱해서 무척 먹기 힘들었다. 맛이 없는 건 기본이었다.
“네피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미안. 테리우스. 너무 맛없어서 못 먹겠어.”
“그래? 어쩔 수 없지….”
“테리우스. 고기가 먹고 싶어.”
“…고기? 아, 알았어. 오늘 저녁에 가져올게. 그리고… 이 돈 받아. 오늘 점심은 해결해줘.”
테리우스가 건넨 건 동화 8개와 철화 4개였다. 8,400 네르. 평민 기준으로 괜찮은 한 끼를 하고 남는 돈이다.
“오늘 어디가?”
“카일 대장에 복귀한 걸 알려야 해. 그리고 기사로서 할 일도 있고.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올게.”
“…알았어.”
테리우스가 떠났다.
혼자 남은 네피아는 청소를 가장 먼저 생각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청소를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변변찮은 청소 도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청소 도구를 찾아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들어선 그녀는 손으로 코를 막았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테리우스의 옷과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침대에 가까이 간 그녀는 경악했다. 누리끼리한 이불에는 작은 벌레들이 득실거렸다.
“우욱!”
구역질을 느껴 입을 손으로 막고 서둘러 집 밖으로 나온 네피아는 조용히 마을을 돌아다녔다.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몇몇 불한당들이 그녀에게 마수를 뻗었으나, 오러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인 그녀에게 당해 꽁지 빠지라 도망쳤다. 그녀는 테리우스보다 강했다.
점심은 꼬치구이 2개로 해결했다.
집으로 돌아온 네피아는 식탁 앞에 멍하니 앉았다. 네피아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여긴 지옥이었다.
그녀는 품에서 공간 이동 주문서를 꺼냈다. 유진은 일주일 정도만 같이 있어 주라고 말했지만, 못 버틸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