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5화 〉 81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그녀는 품에서 공간 이동 주문서를 꺼냈다. 유진은 일주일 정도만 같이 있어 주라고 말했지만, 못 버틸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네피아는 공간 이동 주문서를 찢지 못했다. 이대로 바로 돌아간다면 성유진이 자신에게 실망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도 메이드장 대리로서 자존심이 있었다.
‘일주일…. 일주일만 버티자. 어려운 일은 아니야. 일주일은 금방이잖아. 난 메이드장 대리야. 주인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해.’
네피아는 문밖을 쳐다봤다.
저택을 떠난 다른 메이드들이 그러하듯이, 어쩌면 AM 부대 메이드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네피아. 힘내자. 이건 메이드장 대리로서의 임무야.’
네피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
테리우스는 해가 지기 직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가했다.
“네피아! 돌아왔어!”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던 네피아가 몸을 일으켰다.
“어서 와, 테리우스.”
“네가 좋아하는 고기도 가져왔어.”
테리우스는 씨익 웃으며 왼손에 들고 있던 종이로 포장된 고기를 건넸다. 고기를 살 돈이 없어서 동료 기사에게 사정사정한 끝에 돈을 빌려 고기를 살 수 있었다. 물론 그 말을 네피아에게 하지 않았다. 테리우스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고기를 본 네피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기구나! 고마워 테리우스!”
“이 정도로 뭘. 그럼 저녁 식사부터 할까?”
“고기 굽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내게 맡겨줘.”
“내가 해도 돼.”
“테리우스는 일하고 오느라 피곤하잖아? 의자에 앉아 있어.”
테리우스는 행복함을 느꼈다. 네피아와 나누는 이런 소소한 대화와 평화로운 일상이 그가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다.
네피아는 집구석에 있는 냄비를 꺼냈다. 고기를 굽기에는 프라이팬이 좋은데, 프라이팬은 보이지 않는다. 냄비의 위생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벌레의 사체라던가, 뭔지 모를 찌꺼기 같은 게 묻어 있다.
“테리우스. 이 냄비 언제 마지막으로 쓴 거야?”
“어…. 내가 이 집을 받기 전부터 있던 냄비라… 나도 몰라.”
“…….”
네피아는 모아둔 물을 아낌없이 써서 냄비를 씻었다. 세제가 없어 손에 쥔 천에 힘을 주어 박박 닦았다. 어느 정도 깨끗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식용유 같은 건… 없어.’
이 집에는 아예 음식 자체가 없었다. 테리우스는 지금까지 직접 음식을 해먹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 먹었고, 프루커스 가문 내의 식당을 이용했다. 병사일 때는 병영식이 있었다.
아궁이 위에 냄비를 올리려던 네피아는 뒤늦게 저택에 나오기 전에 메이드에게 받았던 선물들을 떠올렸다.
‘소금과 후추! 안 그래도 고기의 상태도 영 좋지 않은데 이대로 구우면 맛도 없을 거야.’
배낭에서 꺼낸 소금과 후추를 고깃덩어리에 잔뜩 뿌렸다.
“네, 네피아. 소금과 후추를 그렇게 막 뿌려도 돼?!”
테리우스가 당황했다. 소금과 후추는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코리아 상단이 나타나고 평민들도 질 좋은 소금과 후추를 비교적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귀하다는 인식이 남아 있어 아껴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괜찮아. 먹을 땐 맛있게 먹어야지.”
어차피 일주일 뒤에 자신은 이곳에서 떠날 것이라고. 네피아는 뒷말을 삼켰다. 절망하는 테리우스의 반응이 쉽게 상상되어 말하기 힘들었다.
테리우스는 아낌없이 뿌려지는 소금과 후추를 멍하니 쳐다봤다.
네피아는 냄비에 고기를 넣어 구웠다. 약간 타긴 했지만, 그럭저럭 잘 구워졌다. 접시가 없어서 냄비에 넣은 상태 그대로 스테이크를 먹어야 했다.
“맛있다! 엄청 맛있어!”
테리우스는 연신 감탄하며 스테이크를 먹었다. 그는 이렇게 고기를 먹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잘 구워져서 다행이야. 맛있네.”
네피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객관적으로 스테이크는 맛있었다. 소금과 후추를 때려 박았는데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유진의 저택에서 먹던 스테이크와 비교하면 한참 맛이 없었다. 고기는 즐기고 육즙도 거의 없다. 고기 자체의 질이 최악이었다.
일부러 이런 싸구려 고기를 사온 건가? 아니면 사기당한 건가? 어느 쪽이든 고기 하나 제대로 사 오지 못하는 테리우스가 무능해 보였다.
식사가 끝나고 식탁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는 테리우스가 주도했다. 병사들의 삶은 어떻고, 오늘 한 훈련은 어떻고…. 지루한 것을 넘어 짜증이 나는 이야기들이었다.
잠자리를 준비하기 전, 테리우스는 진지한 얼굴로 네피아를 불렀다.
“…네피아.”
“응?”
“우리 관계는… 부부지?”
“뭐?”
네피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자신이 무슨 헛소리를 들은 거지?
테리우스는 생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허둥거리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함께 살게 될 텐데 부부 관계가 맞잖아.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거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진 못했지만…. 상황이 나아지면 성대하게 결혼식을 하자. 약속할게.”
테리우스가 왼손을 뻗어온다. 네피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하나뿐인 손을 쳐냈다.
“테리우스. 우린 부부 사이가 아니야. 부탁이니 이러지 말아줘.”
“왜, 왜 그래. 나랑 결혼하기로 했잖아.”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지어내지 마.”
“아니야. 분명히 했어. 기억 안 나? 옛날에 호숫가에 앉아서 나중에 크면 결혼하기로 약속했잖아…!”
“미안한데 그렇게 말해도 기억 안 나. 그리고 대체 언제적 일을 말하는 거야? 너 좀 이상한 것 같아.”
“…….”
테리우스는 고개를 숙였다. 왼손 약지에 낀 철반지가 보였다. 시야 끝에 들어온 네피아의 왼손 약지에는 철반지가 아닌 다이아 반지가 있었다. 테리우스는 이를 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피아! 난 널 구하기 위해 10억을 썼어!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난 너한테 구해달라고 한 적 없어! 네가 멋대로 찾아와서 날 저택에서 데려갔잖아! 이런 허름한 곳으로!”
“네피아…!!”
소리 지르려던 테리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네피아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기 때문이다. 테리우스의 어깨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네피아와 싸우기 위해, 이러려고 네피아를 데려온 게 아니다.
“……네피아.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어. 미안해. 오늘은… 이만 자자. 네가 침대를 쓸래?”
“…됐어. 침대는 네가 써. 난 의자에서 잘게.”
“…그래.”
테리우스는 터벅터벅 걸어가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네피아가 아직 자유에 적응 못 해서 그래. 노예의 삶보다 자유로운 지금의 삶이 훨씬 낫다는 걸 며칠 지나면 알아줄 거야.’
모셔야 할 주인이 없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삶. 네피아도 분명 알아줄 것이다.
???
다음날. 네피아는 아침도 못 먹었다. 평민들의 삶은 하루 세끼가 아니라 하루 한 끼였다. 하루 두 끼만 먹어도 잘 먹는 삶이었다. 테리우스는 이번엔 점심값도 주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였다.
결국, 저녁만 함께 먹기로 했다.
저택에서 세 끼에 간식까지 먹던 네피아는 주린 배를 잡고 우물가로 향했다. 식충이처럼 멍하니 집에만 있기에는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우물가에 도착한 네피아는 깜짝 놀랐다. 아낙네들이 우물 앞에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네피아의 앞에 최소 50명은 있었다. 모두 커다란 양동이를 손에 쥐고 있다.
‘저택에서는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데….’
네피아는 가장 뒤쪽에 줄을 섰다. 그녀의 앞에 선 아낙네가 네피아를 빤히 쳐다봤다. 입고 있는 옷이 더러웠다. 옷 군데군데 찢어졌다가 기운 흔적이 있었다.
“어머. 안녕? 네가 그 팔병… 아니, 외팔 기사님의 아내지? 소문대로 엄청난 미모네. 난 탈리아야. 이름이 뭐야?”
“…네피아에요. 그, 테리우스랑은 부부 관계가 아니에요.”
“부부가 아니야? 근데 왜 같이 살고 있어?”
“…그게… 사정이 있어서요.”
“그래?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우울해 보이는 게 좋은 사정은 아닌 것 같네. 하긴, 외팔이 기사님과 같이 사는 데 기분 좋을 리가 없지.”
여인의 말투는 꽤 거칠었다. 기사인 테리우스에게 하는 말도 무례했다. 네피아는 화도 나지 않았다. 테리우스가 욕을 먹든, 조리돌림을 당하든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여인의 말에 공감하며 신세 한탄을 했다.
“맞아요. 집안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먹을 것도 없고…. 냄비는 하나에…. 하아.”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네. 힘내. 좋은 날이 올 거야. 아, 그런데 그 소문이 사실이야?”
“소문이요?”
“그 외팔이 기사님한테 빚이 있다는 소문 말이야.”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실래요?”
“나도 건너 들은 거에 불과한데 2억 네르라는 엄청난 빚이 있다던데? 만약, 내 남편이 그런 빚이 있었다면… 어휴. 그냥 도망치고 말지. 어떻게 그런 남자랑 같이 살겠어.”
“…….”
네피아는 굳은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
집으로 귀가하던 테리우스는 멈칫했다. 길가에 무기를 착용한 용병 4명이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테리우스 기사님 맞으쇼?”
“…내가 테리우스다. 너희는 누구지? 군에선 못 보던 얼굴인데.”
“우린 군대 출신이 아니요. 코리아 상단에서 나왔지.”
“……코리아 상단에서? 왜?”
“그거야 본인이 잘 알고 있지 않으쇼?”
코리아 상단에서 사람을 보낼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돈.
“…돈을 빌린 지 일주일도 안 지났어.”
“알고 있슈. 우리는 그냥 감시자요. 감시자. 도망칠 생각은 마쇼. 그리고 댁이 빚을 잊을 때마다 우리가 찾아갈 테니… 알겠쇼? 얼른 빚이나 갚을 생각이나 하쇼.”
“…….”
테리우스의 고개가 떨어졌다. 이건 경고였다. 연 이자율 50%의 2억.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빨리 갚아야 해. 지금 이 순간에도 이자가 붙고 있어. 1년이 지나면 이자만 1억이야.’
전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공적을 쌓고 돈을 벌 길 기회가 생기니까. 하지만 지금 카일은 당장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테리우스는 주먹을 쥐었다.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꼴사나운 방법이다. 그러나… 빚이 더 늘어나는 것보다 낫다.
그는 각오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네피아는 대충이나마 청소를 끝내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찐 감자 4개. 오늘 저녁 전부였다. 네피아는 소금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네피아.”
“응?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네피아.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나한테 2억의 빚이 있어. 코리아 상단에서 대출한 돈인데… 이자율이 연 50%야.”
“…….”
네피아는 대답이 없었다. 조용했다. 테리우스는 그녀의 눈치를 봤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압박으로 느껴졌다.
“네 자유를 사기 위한 10억 네르를 모으려면 대출밖에 답이 없었어.”
“…그런데?”
“2억의 빚이 너무 압박이야. 내년이 되면 빚이 3억으로 늘어나 버려. 최대한 빨리 빚을 없애고 싶어. …네가 가진 드레스와 드워프 단검을 팔면 안 될까?”
“미쳤어? 드레스와 단검은 내 보물들이야! 어떻게 그럴 생각을 할 수 있어?!”
“우린 이제부터 함께 살 거잖아! 미래를 생각해야지! 내년이면 빚이 3억이 된다고! 내가, 내가 성공해서 갚아 줄게! 더 좋고 화려한 드레스랑 더 뛰어난 명검도 구해줄게! 아니면 그 다이아 반지를 처분하자! 팔면 못해도 1억 네르 이상은 받을 수 있을 거야! 당장은, 당장은 빚부터 없애자. 응?”
짜악!
네피아의 손이 휘둘러졌다. 테리우스는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뺨을 맞았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고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얼얼한 뺨을 붙잡은 테리우스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네피아?”
“내가 왜 너랑 계속 살 거라 생각하는 거야? 드레스랑 단검은 엄연히 내 물건이야. 당연히 이 다이아 반지도 내 거야. 멋대로 남의 재산을 팔 생각 하지 마.”
테리우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넌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거야? 그것들이 지금 꼭 필요해?”
“왜 자꾸 우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지금이라도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어. 내가 누구 때문에 참고 있는데…. 하아. 됐어.”
네피아가 짐 배낭을 손에 들었다. 옷장이 더럽다는 이유로 아직 풀지 않은 짐 배낭이다. 테리우스는 기겁했다. 정말 네피아가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바로 바닥에 무릎부터 꿇었다.
“미안, 미안해 네피아.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빚은 내가 알아서 할게! 한 번만 용서해줘. 제발…!”
네피아는 우물쭈물거렸다. 일주일만 생활하라는 성유진의 말이 떠오른다. 결국, 한숨을 내쉬고 짐 배낭을 내려놓았다.
“…봐주는 건 이번뿐이야.”
“고마워! 날 믿어줘서 고마워, 네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