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7화 〉 817.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카일은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온 남자를 쳐다봤다.
올론드 글베트 남작.
부드러운 금발에 푸른 눈, 화려한 복장을 갖춰 입은 남자다. 풍겨오는 분위기에서부터 귀족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그는 라펠리 왕국 서쪽 구석에서 활동하는 귀족이다.
본래 몰락하는 귀족이었으나, 이번 전쟁을 기회로 승승장구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한 귀족이다.
얼마 전, 카일에게 편지를 보낸 귀족이 바로 그다.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카일 님. 올론드 글베트 남작입니다.”
“카일 프루커스입니다. 절 찾아오신 이유는….”
“예, 예. 카일 님을 섬기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저의 5,000명의 병사는 카일 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 또한 카일 님의 신하로서 충실히 모시지요.”
글베트 남작이 허리를 숙였다. 그의 차분한 인사는 비굴함 대신 기품이 서려 있었다.
카일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글베트 남작은 명성을 쌓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굳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제가 의심스러운 모양이군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갑자기 제 신하가 되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저는 아직 작위도 받지 못했습니다.”
“우선 카일 님. 말씀 편하게 해주십시오.”
“…그러지.”
“전쟁이 한창인 이때 작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위보다 중요한 건 명성이고, 권력이고, 재력이고, 무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카일 님은 저 같은 것보다 더 뛰어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엔 백작 이상의 작위를 얻으시겠죠. 아니, 프루커스 백작위를 물려받으실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글베트 남작의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를 사람의 신뢰를 사기에 최적이었다. 허나 카일은 의심스러운 시선을 지우지 않았다.
“이유 없는 충성은 안 믿는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부귀영화를 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저 스스로 올라가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의 한계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카일 님 밑에서 부귀영화를 추구하려 합니다.”
“……미안하지만, 역시 안 되겠군. 글베트 남작, 돌아가 주십시오.”
축객령에도 글베트 남작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여유롭게 웃는다.
“카일 님. 너무 성급하게 판단 내리지 마시지요. 저는 지금 카일 님의 상태와, 카일 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카일 님 보다 더 말이지요.”
카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소의 그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심마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기복이 심했다.
“나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해봐라. 단, 조금이라도 틀린다면 곱게 넘어가지 않을 거다.”
글베트 남작은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카일 님은 현재 조금만 거슬러도 다 부수고 죽여버리고 싶으시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곤혹스러우시죠?”
“…….”
“예. 전 카일 님을 이해합니다. 저도 한때 그랬으니까요.”
“너도 그랬다고? 어떻게 심마를 해결했지?”
카일이 다급하게 물었다. 운기조식을 하고, 명상을 해도 심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카일은 이 심마가 더 커지기 전에 떨쳐내고 싶었다.
“그걸 카일 님은 심마라 부르시는군요. 마음속의 악마라… 예. 좋은 단어로군요.”
“대답이나 해라.”
“심마의 원인을 알아내고 해결하면 됩니다. 간단하지요?”
“…….”
“방금 말했듯이 저는 카일 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걸? 네가?”
“유리아 그레이스.”
쾅!
카일의 주먹이 책상을 때렸다. 책상의 상판이 주먹 모양으로 부서졌다. 카일의 눈이 꿈틀거렸다. 글베트 남작의 입에서, 다른 남자의 입에서 유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심마는 처음보다 심각해지고 있다.
“카일 님. 진정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심마는 카일 님의 욕망과 양심이 부딪히고 있는 것입니다. 해결법은 무려 세 가지나 있습니다! 욕망을 버리거나 혹은 양심을 버리거나. 그데 아니면 욕망을 성취하거나.”
“실질적으로 두 가지가 아닌가?”
“양심을 버리는 것과 욕망을 성취하는 건 다릅니다. 양심을 버리면 그저 날뛸 뿐이죠. 양심을 가지고 옳은 방법을 통해 욕망을 성취하는 겁니다. 가령, 양심을 버리고 욕망만 남으면 카일 님은 유진 프루커스를 죽이고 유리아 그레이스를 강제로 취하실 겁니다. 그야말로 욕망대로 행동하는 것이죠.”
“내게 혈육을 죽이라고? 미쳤나? 그건 인간이 아닌 마의 길이다.”
카일이 으르렁거렸다. 글베트 남작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 예시를 들었을 뿐입니다. 카일 님.”
“……옳은 방법을 통해 욕망을 성취하는 건 무슨 뜻이지?”
“프루커스 백작위를 물러받는 것입니다. 프루커스 백작만 된다면 유리아 그레이스를 유진 프루커스에게서 데려오는 건 일도 아닙니다. 결국 유진 프루커스는 백작가의 일원이고, 유리아 그레이스도 백작가의 메이드 입니다.”
“웃기는 소리. 유리아는 유진과 결혼했다. 내가 백작이 되어 부르더라도 유리아는 유진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다.”
“결혼이요? 카일 님은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유진 프루커스는 미혼입니다.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카일은 분명히 봤다. 그 숲 속에서 서로 껴안은 상태로 앉아 있던 그들을. 사랑의 말을 속삭이는 그들을.
카일의 손등에 핏줄이 불끈거렸다.
“…그렇지. 그게 나도 의문이다. 나였다면… 내가 유진이었다면 결혼 사실을 세상에 공표했을 텐데….”
“많은 추측을 할 수 있죠,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가능성 큰 추측은 유진 프루커스는 유리아 그레이스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진 프루커스가 유리아 그레이스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카일 님처럼 행동하지 않았겠습니까.”
“맞아. 나였다면 그랬을 거야. 내가… 내가 늦어서 유리아가….”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카일 님이 프루커스 백작이 되어 유진 프루커스에게 농락당하는 유리아 그레이스를 구할 수 있습니다.”
“…….”
“아직도 망설이시는 겁니까? 카일 님은 프루커스 백작이 될 생각이 없으십니까?”
“나는 프루커스 백작이 될 거다. 이미 그렇게 결심했으니. 하지만 유리아가 유진에게 농락당한다고 확신할 수 있나? 나는 봤다. 유리아는… 유진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카일 님은 유진 프루커스의 실체를 모르시는군요.”
“유진의 실체?”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여자 밖에 없습니다. 그의 저택에 대해 아십니까? 그곳엔 유진 프루커스에게만 봉사하는 미녀들이 수 백 명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거기에 유진 프루커스는 노예를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유진 프루커스에게 처형당한 노예의 수만 해도 수만 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카일은 부정하지 못했다. 전장에서 만난 유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병사와 노예를 함부로 대하고, 희생당하는 노예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카일 님. 지금부터 유진 프루커스의 행적을 깊이 조사하시지요. 제가 곁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래 보여도 한때나마 정보 길드에서 일하며 지부장까지 올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유진 프루커스의 실체를 파악하고 프루커스 백작이 되어 벌하십시오. 그의 영지에서 고통받는 평민들과 노예들을 구하십시오. 오직 카일 님만이 유리아 그레이스를 구할 수 있습니다.”
“…….”
카일은 두 눈을 감았다.
유진의 자신의 동생이다. 만약, 유진이 악에 물들었다면…. 형으로서 유진을 벌해야 한다. 엇나간 동생을 바로 잡아야 한다. 유진에게서 고통받는 자들을, 농락당하는 유리아를 자신이 구해야 한다.
“글베트 남작. 너는 정말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가?”
글베트 남작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카일의 앞에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물론입니다!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나의 주군이시여!”
“…내가 뭘 해야 하지?”
“우선 군대의 기강부터 잡으셔야 합니다. 카일 님의 군대는 뛰어나지만, 풀어져 있습니다. 군대가 군대답지 못합니다.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그리고… 유진 프루커스에 대한 정보는 제가 알아서 조사하겠습니다.”
“…유진에 대해 샅샅이 파헤치도록.”
“맡겨만 주십시오.”
???
테리우스는 그날, 코리아 상단의 용병들이 수정 구슬과 철반지가 든 상자를 주고 간 이후로 생기를 잃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동료와 이야기를 나눠도 삶이 즐겁지 않았다. 전부가 귀찮고 짜증 났다. 그저 규칙적으로. 아무 감정 없이 평소의 일상을 되풀이했다.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되풀이되었다. 실제로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할 때였다. 카일이 그를 불렀다.
테리우스는 긴장했다. 카일은 확실하게 변했다. 올론드 글베트 남작이 카일의 신하를 자처하고 나서부터다. 편하고 친한 형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로 바뀌었다. 기사와 병사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누구는 패기가 생겼다며 좋아했고, 누구는 다른 귀족처럼 변질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테리우스는 후자 쪽에 가까웠다.
“…대장. 왔어.”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무실 앞에 앉아 있는 카일과 글베트 남작이 있었다. 테리우스는 당황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테리우스 경! 저번에 간단히 인사하고 사흘만이지요?”
“…네. 글베트 남작님. 오늘은…….”
테리우스는 카일의 눈치를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로 테리우스를 보던 카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테리우스. 네가 마벨로트 남작의 유물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쿵!
테리우스는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카일이 무척 두려웠다. 그리고 당혹스러웠다. 그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숨이 막히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테리우스는 바닥에 무릎 꿇었다.
“대, 대장. 죄송합니다…. 네, 네피아를 구하려면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대장…. 제발 한 번만 용서를….”
“이해한다.”
“…네?”
테리우스는 눈을 끔뻑였다.
“네가 유물을 판 곳과 대출을 받은 곳은 코리아 상단이지. 코리아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은 내 동생인 유진이다. 네게 네피아라는 노예를 빌미로 10억 네르를 요구한 것도 유진이지. 테리우스, 넌 그저 유진에게 농락당한 것뿐이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하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복수할 생각이 없는 거냐?”
“용병 노예 출신의 팔 병신에게 뭘 바라는 거야. 복수 같은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네가 하겠다면 내가 도와주마.”
“…이해를 못 하겠어. 그는 대장의 동생이잖아. 왜 내 복수를 돕는 거야?”
“유진은 엇나갔다. 유진을 바로 잡지 않을 거다. 나는 형으로서… 유진을 바로 잡을 거다. 그 과정에서 네 복수도 이루어지겠지.”
“…….”
카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테리우스는 그가 진심으로 결심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도 테리우스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왼팔 하나밖에 없는데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테리우스 경. 경의 잠재력은 높습니다. 그 나이에 오러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것 자체가 천재라는 증거죠.”
글베트 남작이 나섰다. 그는 실실 웃으며 테리우스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팔이 없는 어깨가 시큰거린다.
“테리우스 경. 팔을 붙여드리겠습니다. 빚도 갚아드리죠.”
“…팔을 붙여준다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전 오른팔을 이미 잃어버렸습니다.”
순간적으로 기뻐했던 테리우스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팔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꼭 경의 팔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죠. 제가 아는 실력 좋은 마법사가 있습니다. 경은 허락하기만 하면 됩니다.”
테리우스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았다.
“……빚도 해결해주신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제겐 2억 정도는 푼돈입니다.”
테리우스는 카일을 힐끗 거렸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고민이십니까? 네피아라는 하녀를 데려와야 하지 않습니까?”
“네피아는… 내가 아니라 그를….”
“그래서 포기할 겁니까?”
테리우스가 고개를 숙였다.
네피아.
오랫동안 갈망해온 자신의 희망.
그게 옳지 않은 방법이라 해도 그녀를 가지고 싶다.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
테리우스는 자신의 추악한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포기 못 합니다.”
테리우스의 왼손 약지에는 여전히 철반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