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2화 〉 832. 그대를 위한 폭군
“황제의 병사들이여! 똑똑히 보았느냐? 아녀자를 내세우는 비열한 놈이 그대들이 모시는 군주다! 저놈에게 정녕 그대들의 위에 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안 그래도 곤두박질치던 제국군의 사기는 지하를 뚫을 정도로 내려갔다. 병사들이 도망치지 못하는 건 두 눈을 부릅뜬 기사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사들도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노라! 제국의 병사들이여 무기를 버려라! 우리의 목적은 오직 하나, 제국을 망치는 폭군의 목이다! 우리는 목적을 완수하면 곧바로 본국으로 귀환할 것이다! 무기를 버리기 힘들다면 황제의 곁에서 물러나라! 10분! 정확히 10분의 시간을 주겠노라!”
병사들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병사 중 몇 명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말을 탄 기사가 병사를 쫓아가 검을 휘둘러 죽였다.
보다 못한 루테온이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적의 말에 흔들리지 마라! 적이 지껄이는 말은 우리를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에 불과하다! 황제 폐하를 위해 무기를 들어라! 제국을 위해 물러서지 마라! 우리는 영예로운 제국인이며, 적들은 산에서 내려온 쌍익족이다. 적들은 제국을 침략하여 제도까지 당도하였다! 우리가 패배하면, 제국의 모든 인간이 유린당한다. 너희의 가족이 침략자들에게 유린당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냐?! 우리는 침략자들을 몰아낼 것이다! 황제 폐하를 의심하지 말라!”
대장군이 병사들을 향해 연설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힘이 병사들의 두려움을 밀어냈다. 허나 그뿐이다. 상황이 최악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병사들의 사기는 여전히 낮다.
‘…이해할 수 없군. 루테온은 진짜 날 배신할 생각이 없나?’
대마녀의 저주에 걸리고 오늘날까지.
나는 일부러 틈을 보였다. 일부러 저주에 시달리며 골골거리는 연기까지 했다. 귀족들은 낚였다. 암살자를 보내는 놈에서부터 직접 병사를 모으는 귀족들도 있었다. 세금 문제로 귀족들은 내가 죽기를 꿈에도 바로고 있으니까.
그러나 루테온은 내게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배신의 전조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충신으로서 암살자를 죽이고, 반란을 모의하는 귀족들을 잡아 내 앞에 무릎 꿇렸다.
내가 마을을 학살하라 명하면, 군대를 끌고 가 마을을 학살했다.
자작의 영애를 데려오라 명하면, 반론도 하지 않고 데려왔다.
여기까지 오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테온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나, 정말로 내게 충성하고 있었다.
“대장군.”
“예. 폐하.”
“병사들의 갈무리만 하고 있어라. 도망치는 놈들은 가차 없이 죽여라. 하르멜의 군대는 짐이 직접 상대하겠다.”
“…폐하의 힘은 알고 있사오나, 적군은 30만의 대군이옵니다. 또한 폐하는 현재 대마녀의 저주를 받은 상태가 아니옵니까.”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라플레아의 머리채를 놓았다. 제복의 상의를 살짝 풀었다. 상의 틈으로 검게 물든 피부가 보인다. 상체의 절반이 저주에 물들어 있었다.
“이 저주 말이냐?”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천심의 효과는 신체 강화와 상태 이상 면역이다. 기존에 걸려있던 상태 이상도 해제된다. 즉, 내 몸을 좀먹던 대마녀의 저주가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풀렸다는 뜻이다.
“…폐하! 저주가…!!”
“대장군. 병사들을 갈무리해라. 짐의 위대함을 병사들과 함께 목도 해라!”
나는 내 몸에 염력을 사용했다. 몸은 내 의지를 따라 하늘을 향해 떠오른다.
“스톰브레이커. 화련비도.”
두 개의 무기를 소환했다. 무기 두 개는 서로 부딪히더니 하나가 되었다. 스톰브레이커의 능력인 합체다. 스톰브레이커와 합체한 무기의 능력이 강화되는 효과가 있다.
화련비도와 합체한 스톰브레이커는 분해되어 내 몸을 뒤덮어 갑옷이 되었다. 파직, 파지직. 갑옷 주위로 붉은 번개가 튀었다.
손을 뻗었다. 지상에서 아론다이트가 날아왔다.
“…황제! 네이놈…! 대마녀의 저주는 거짓이었더냐!”
“저주는 방금 나았다.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느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대마녀의 저주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가…. 아니, 대마녀의 저주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었나? 비열한 놈. 모든 게 연기였구나!”
“말하기도 귀찮군. 멋대로 생각해라. 어차피 여기서 죽을 테니.”
“대마녀의 저주가 없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늘은 나와, 나의 병사들의 영역이다! 병사들이여! 황제가 감히 우리의 영역에 올라왔으니, 깃털과 창으로 기꺼이 환대해주어라!!”
하르멜의 병사들이 움직인다. 나를 중심으로 창을 겨누며 포위한다. 30만의 적군이 오직 나를 죽이기 위한 살의를 내뿜는다. 그들의 날개짓이 얼마나 힘찬지. 나는 폭풍의 중심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착각하고 있군. 이곳은 제국. 제국의 땅은 모두 짐의 것이고, 제국의 하늘 또한 짐의 영역이다. 네놈들은 단지 침략자에 불과하다. 짐의 하늘을 침략한 대가는 네놈들의 목숨으로 받겠다.”
“날개도 없는 주제에 감히 하늘을 탐하는가! 어리석은 놈! 그 오만방자한 꼴을 더는 두고 볼 수 없구나! 황제를 죽여라!!”
하르멜의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투창했다.
무수히 많은 창이 날아온다.
‘염력.’
나는 날아오는 창을 염력으로 붙잡았다. 창은 허공에 붙잡힌 듯 멈췄다. 어림잡아 2,000개는 되는 창들을 모두 염력으로 잡았다.
수천 개의 창이 다시 날아온다. 이번에도 잡았다. 적들은 멈추지 않고 투창했다.
한계가 왔다. 염력으로 붙잡았던 창들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다.
“……1만이 넘으니 힘들군.”
수천 개의 창이 내 갑옷을 두들겼다. 창은 갑옷을 뚫지 못한다.
‘이대로 있으면 결국 갑옷도 뚫리겠지.’
갑옷의 단단한 철판이 창날을 막아도 충격파까지 전부 막아주지는 못한다. 작은 돌멩이를 던지는 수준의 충격이라도 그게 수천, 수만이 반복되면 나라도 위험하다. 특히나 일부 창에는 오러까지 실려있다.
‘성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 것 같군. 성배의 힘만으로도 수만 명은 혼자서 상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힘들겠지. 돌아가면 황궁 창고에 있는 영약이란 영약은 모조리 먹어야겠다.’
힘의 파악은 얼추 끝났다.
나는 뇌전을 사용했다.
파지지직.
갑옷에 붉은 뇌전이 튀었다. 나는 있는 힘껏 출력을 높였다.
콰르르르르르릉!
고막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붉은 번개가 뻗어 나간다. 번개에 닿아 감전당한 적들은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시체가 되어 지상으로 추락한다. 그 숫자만 해도 수천이 넘는다.
쿠르르릉! 콰르릉! 쿠콰쾅!
하늘에서 천둥이 끊임없이 터졌다. 내 몸에서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붉은 벼락이 떨어져 적들을 감전시켜 죽였다. 붉은 번개가 쉬지 않고 번뜩였다.
“이런 미친…. 번개를 다룬다고…? 황제를 죽여라! 아군이 더 죽기 전에 황제를 죽여라!!”
하르멜의 국왕인 기르콩이 고함쳤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는 이미 사라졌다.
나는 떨어지는 적군의 감정 당한 시체를 발판으로 삼아 적군을 향해 뛰었다. 콰앙! 충격파가 일어나며 발판으로 삼은 시체가 터졌다.
염력으로 몸을 날릴 필요는 없었다. 지금 하늘에는 적들이란 발판이 가능하니.
적군에 파고들어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천둥소리가 동반했다. 날아가는 오러블레이드에 수백 명의 적이 베여나간다.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적들을 향해 날아가는 다수의 오러블레이드를 염력으로 붙잡았다.
염력으로 오러블레이드를 믹서기처럼 사방으로 돌린다. 오러블레이드 닿은 적들이 문자 그대로 갈려 나갔다. 토막난 신체와 핏물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진다. 멀리서 본다면 이만한 장관도 없으리라.
나는 적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수백 명의 적이 죽었고, 손을 뻗으면 붉은 벼락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하늘로 뻗어 나갔다.
“그래도 아직 많군.”
나는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펼쳤다.
[10초 동안 천재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붉은 번개가 내 손바닥 위로 모여들었다. 뇌전이 회전하며 원을 이룬다.
이 기술은 이번이 두 번째다. 이전에는 수천 개의 뇌전을 이 작은 구체에 압축했으나, 이번에는 수만 개의 뇌전을 구체에 압축했다.
뇌성(雷星).
내 손안에 압축된 번개 폭풍.
나는 주먹을 쥐며 구체를 터트렸다.
수만 개의 붉은 번개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붉은 번개는 모든 것을 태우고, 모든 것을 분해 한다. 이것이 도시에 떨어졌다면, 도시를 흔적도 없이 없애버렸을 것이다.
곧 번개의 폭풍이 지나갔다.
하늘을 가득 채웠던 적들의 일부가 사라지며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어림잡아 20만이 넘는 적군이 단 한 번에 소멸했다.
“미, 미친….”
“화, 황제는 신인가….”
“화, 황제를 죽이라고? 불가능하다…!”
“왕이시여…!”
적군이 두려움에 떨었다. 하르멜의 국왕인 기르콩도 당황하고 두려움을 느낀 건 마찬가지였다. 허나 여기서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
“두려워 말라! 황제는 지쳤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놈을 죽여라!”
내가 지쳤다?
조금 힘들긴 하다. 뇌성(雷星)을 연달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남은 놈들을 연달아 쳐죽이게는 이미 충분하다.
‘여차하면 완전 회복을 쓰면 되고 말이지.’
콰르르르릉!
붉은 벼락은 여전히 적군을 향해 떨어지고, 내 검은 적의 숫자를 차근차근 줄여나간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적의 숫자는 5만 아래로 떨어졌다.
“황제에에에에에에!!!”
기르콩이 소리치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내 기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직접 죽이기로 한 모양이다. 그의 창과 전신은 붉은 오러로 휩싸였다. 마치 혜성처럼 나를 향해 돌진해온다.
그는 내가 과거에 상대했었던 근위기사장보다 강했다.
콰앙!
기르콩이 내 옆구리를 꿰뚫었다. 갑옷이 깨져나갔다. 허나 창날은 내 몸에 닿지 못했다.
“짐의 갑옷을 깨뜨린 건 칭찬해주마. 허나 딱 거기까지다. 짐을 죽이기엔 부족하군.”
“빌어먹을! 천신은 왜 너 같은 놈에게 성배를 주었는 가!!”
“천신에게서 성배를 받은 건 짐이 아니라 초대 황제다. 짐은 그저 성배의 힘을 취했을 뿐이지. 그럭저럭 재밌었다. 이만 죽어라.”
서걱!
기르콩의 몸이 갈라졌다. 그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지상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남은 적들을 노려봤다.
‘대충 3만 정도인가….’
살려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하늘을 날았다.
???
지상으로 내려왔다.
적군의 피로 웅덩이진 바닥을 밟으며 꼿꼿이 섰다. 차오르는 호흡을 숨기고 오연히 아군 병사들을 쳐다봤다.
경외 섞인 시선이 내게 향한다. 같은 인간을 보는 눈이 아니라 괴물 혹은 신을 보는 눈이었다. 지금 이 전투를 본 병사와 기사들은 나를 향한 반란은 꿈도 꾸지 못하겠지.
“폐하! 승리를 경하드리옵니다!”
“승리를 경하드리옵니다!”
루테온을 필두로 귀족과 기사, 병사들이 일제히 내 앞에 무릎 꿇었다.
“당연한 승리다.”
나는 갑옷을 벗었다.
허망한 눈으로 전장을 쳐다보고 있는 라플레아가 보였다. 눈치를 보니 곧 자살이라도 할 것 같다.
‘하르멜 왕국에 남아 있는 왕비를 들먹이며 협박하면 죽을 생각은 못 하겠지.’
배가 고프다. 그리고 여자도 고프다.
“폐하!”
루테온이 우렁찬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의 태도는 지금까지와 뭔가 달랐다. 나를 두려워하는 목소리는 아니다.
“뭐냐.”
“소집령을 내려주시옵소서! 지금이야말로 하르멜 왕국을 징벌하고 정복할 기회이옵니다! 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신이 하르멜 왕국을 정복하여 황제 폐하께 바치겠나이다!”
루테온이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이제야 이해했다.
루테온은 나를 향해 충성하는게 아니라 제국에 충성한다. 루테온은 더 찬란한 제국을, 더 완벽한 제국을, 더 위대한 제국을 원한다.
“좋다. 소집령을 내리겠다. 이번 정벌의 총사령관은 대장군, 그대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신이 반드시 제국의 위엄을 온 대륙에 보이겠나이다!”
“짐을 실망시키지 마라.”
왕도 죽고 30만 대군도 전멸했으니 하르멜 왕국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루테온 정도의 대장군이라면 어렵지 않게 하르멜 왕국을 정복하리라.
나는 그를 지나쳐 가마에 올라타 라플레아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