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2화 〉 842. 그대를 위한 폭군
완전 회복은 아꼈다. 드래곤이 그러했듯이 갑자기 새로운 적이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적이 나타나면 방심을 유도하고 완전 회복으로 틈을 찌를 생각이다. 그리고 완전 회복은 앞으로 할 일에 대한 보험이다.
고개를 내린 나는 우테모가 죽은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의 손에는 워해머, 갈라틴이 들려 있었다. 소유주가 죽었음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갈라틴에 손을 뻗었다. 내가 쓰지 않더라도, 수집용으로서 가치가 있다. 이건 나의 전리품이다.
갈라틴에 닿은 내 손에 끔찍한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깜짝 놀라 갈라틴에게서 물러났다.
“짐을 거부하는 건가…. 건방진 놈. 나중에 병사들을 시켜 회수해야겠군.”
나는 갈라틴을 뒤로하고 드래곤의 시체로 향했다. 드래곤의 몸을 꿰뚫었던 3개의 유성검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물론 그렇다고 얼어붙은 드래곤의 시체가 녹은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 크기면 고룡이다. 어떤 판타지 세계든 드래곤의 시체는 그 자체로 보물이지.’
이 세계는 로맨스 판타지세계. 다른 판타지 세계가 그러하듯 드래곤의 심장은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일 것이다.
저벅저벅.
드래곤의 시체로 걸어가던 나는 급히 몸을 뒤로 돌렸다. 마나의 유동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우테모의 시체 옆에 한 여자가 있었다.
긴 보라색 머리카락에 음울한 분위기를 가진 미녀였다. 얇은 검은색 드레스 한 장을 입고 있었는데, 풍만한 몸매가 전부 드러났다. 내 눈과 그녀의 황금색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후후후. 승리를 축하해. 황제 폐하. 설마 지룡과 산왕을 동시에 상대하고 죽여버릴 줄이야. 대체 네 힘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네….”
“모르가나, 이년… 잘도 짐의 앞에 나타났구나.”
나는 그녀를 향해 아론다이트를 던졌다. 아론다이트의 신수인 레이도스가 나타났다.
“죽이지는 마라.”
거대 늑대가 입을 벌려 모르가나의 다리를 노린다. 모르가나가 손을 휘저었다. 강력한 충격파가 레이도스를 옆으로 날렸다.
‘내가 나서야 하나.’
모르가나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모르가나는 바닥에 떨어진 갈라틴을 줍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풍만한 가슴골에 시선을 빼앗겼다. 하얀 가슴 사이로 선홍색 젖꼭지가 엿보였다. 두 번의 출산을 경험한 여자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몸매가 뛰어났다.
치이이익.
갈라틴을 쥔 모르가나의 손에서 연기가 나왔다. 사악한 존재를 거부하는 갈라틴이다. 나 정도는 아니지만, 모르가나 또한 사악한 존재로서 거부하는 것이다.
모라가는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봐, 황제. 지금의 권력을 잘 즐겨둬.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가나는 갈라틴을 들고 사라졌다.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한 것이리라.
‘이 세계의 공간 이동 마법은 제약이 있다. 모르가나의 힘을 대마녀와 비슷한 수준으로 가늠하면 대충 100km 내에 있겠지.’
100km도 넓었다. 지금 모르가나를 찾아 돌아다녀봤자 이미 늦었다.
모르가나가 갈라틴을 가져가긴 했지만, 문제는 없다. 조금 성가시게 됐을 뿐이다.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다.
나는 드래곤의 시체 위로 올라갔다.
‘역시 드래곤이라 해야 하나. 죽었음에도 그 시체에는 마나가 느껴지는군. 특히 강력한 마나가 느껴지는 부위가 심장이 있는 곳이겠지.’
드래곤은 버릴 것이 없었다. 가죽, 이빨, 고기, 피, 심장, 뼈 등등 필요한 것들은 전부 사용할 것이다.
‘여긴가.’
염력으로 떨어져 있는 아론다이트를 손에 쥐었다. 검날에 오러블레이드가 맺힌다. 나는 드래곤의 가슴 부위를 가르며 심장을 찾았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육체 답게 심장 또한 엄청났다.
‘심장이 내 몸보다 더 크군. 이걸 다 먹으려면 몇 달은 걸리겠어.’
나는 드래곤의 심장을 보며 고민하다가, 검을 심장에 찔러 넣었다. 심장의 안쪽에서 강력한 마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냈다. 드래곤의 심핵을.
그것은 내 엄지만 한 새빨간 보석이었다. 이 작은 구슬에서 엄청난 마나와 생명력이 느껴졌다. 망설임 없이 드래곤의 심핵을 입에 삼켰다.
강렬한 힘이 몸 안에서 폭발한다.
-욕심에 눈이 먼 어리석은 황제! 너의 탐욕이 너의 죽음을 불렀다!
드래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직후, 드래곤의 심핵과 내 심장이 합쳐졌다. 거대한 마나가 내 몸속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뇌를 터트린다.
[죽음 저항이 발동했습니다. 앞으로 15초간 죽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건 드래곤의 최후의 수작이었을 것이다. 내가 힘이 멀쩡했더라면 강제로 진정시키고 드래곤의 힘을 소화했을 정도에 불과했으나, 지금의 나는 심각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드래곤의 심핵을 감당하지 못했다.
죽은 드래곤이 알면 아주 좋아하겠지.
허나 내게는 비장의 수가 남아 있었다.
[완전 회복을 사용합니다.]
몸을 일으켰다. 우테모의 공격으로 박살 난 왼쪽 어깨도 원래대로 돌아왔으며, 피곤함도 싹 날아갔다.
그리고 드래곤의 심핵도 온전하게 흡수했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힘이 넘쳐흐른다.
‘이걸로 난 더 강해졌다. 아마 어지간해선 지치지도 않겠지. 지금 심각한 건 스톰브레이커인가.’
스톰브레이커는 자가 수복 기능이 있었다. 이번에 크게 파손되었으니 수복이 끝나려면 몇 달은 걸릴 것이다.
‘다음에는 북쪽에 있는 바바리안과 거인족을 정복하거나, 남쪽의 엘프 왕국을 손에 넣어 모든 여자 엘프를 내 육변기로 만들려고 했는데… 스톰브레이커가 수복될 때까지 잠깐 쉬어야겠군.’
나는 모르가나에 대해 생각했다. 톨토스 왕국이 이토록 철저하게 침략을 준비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모르가나가 뒤에서 활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어찌 됐든 이걸로 다른 국가에 비상이 떨어지겠군. 드래곤이 죽었으니, 다른 드래곤도 제국을 적대할 테고….’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다른 드래곤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래야 놈들의 심장을 갈취해 내가 더 강해질 테니.
‘그리고 대지모신. 그 망할 년이 나를 방해하기 시작했어.’
신을 죽일 방법을.
아니, 여신을 붙잡아 따먹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반드시 대지모신을 따먹을 것이다.
[고룡을 죽이고 그 힘을 취했습니다.]
[1,000,000 폭군 점수를 획득합니다!]
[드워프 왕국 톨토스를 정복했습니다.]
[8,500,000 폭군 점수를 획득합니다!]
[현재 폭군 점수 ? 25,089,412]
???
린다 밸런타인이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양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아…. 역시 안 돌아가잖아….”
그녀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본래 그녀는 린다 밸런타인이 아니었다. 일주일 전에 갑자기 눈을 뜨니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인 ‘린다 밸런타인’이 되었다. 아니, 로맨스 판타지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대부분의 로맨스 판타지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그가 읽었던 소설인 ‘모두의 밸런타인 영애’는 주인공이 죽는 배드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모두에게 이용당한 끝에 비참하게 죽어버리지….’
남주 후보들에게 이용당한 끝에 버려진다. 소설의 제목이 모두의 밸런타인 영애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윤지영. 사범대를 다니던 대학생인 그녀는 지금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일주일 동안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나는 원작의 주인공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한 끝에 죽고 싶지 않아.’
일주일 동안 정말 멍하니 있던 건 아니었다. 원작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했다.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힘이 필요해.’
원작 소설을 읽은 그녀는 힘을 얻을 방법을 바로 떠올랐다. 밸런타인 지하에 있는 비밀의 방. 그곳에서 고대의 정령과 계약하면 된다. 다행히도 소설의 여주인공인 린다 밸런타인은 정령 친화력이 뛰어났다. 밸런타인 가문의 선조가 엘프이기 때문이다.
‘오늘 밤에 몰래 지하로 가자.’
침대에 걸터앉은 린다는 거울을 쳐다봤다.
안색이 창백한 미녀가 있었다. 화려한 금발에 호박색 눈동자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창백한 안색이 그 매력을 절하했다.
‘전생의 나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예쁜 얼굴이네. 이런 얼굴인데도 남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다니…. 난 절대 원작 주인공처럼 살지 않을 거야.’
린다는 곧 있으면 찾아올 하녀를 기다리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했다.
첫 번째는 고대 정령과의 계약.
고대 정령의 힘이 있으면 어디 가서 무시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소설 속의 여주는 병약한 인물이라 정령의 힘이 꼭 필요했다. 정령과 계약하면 몸이 건강해질 테니까.
두 번째는 밸런타인 가문의 빚.
밸런타인 가문의 채권자인 베르메르 스켈로그 자작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대상인이다.
‘소설 초반에는 여주인공이 그에게 휘둘리며 불법적인 일을 하게 돼. 그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생기니 빚부터 갚아야 해.’
세 번째는 레일라 밸런타인와 관계 개선.
린다의 언니인 레일라와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레일라는 나중에 사이가 좋지 않은 린다를 남작가에 팔아넘기게 된다.
‘불화를 해결하거나… 레일라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해.’
네 번째는 폭군, 유진 벨라카로스와 거래.
소설 속의 유진 벨라카로스는 폭군으로서 제국에 군림하며, 귀족의 숙청을 위해 린다 밸런타인을 이용한다. 그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유진 벨라카로스를 회유하는 거야. 원작의 정보를 이용하면… 위험하지만 가능해. 가장 위험한 유진 벨라카로스를 아군으로 만든다면… 나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린다는 소설 원작의 정보를 믿었다. 동쪽 평원에 숨겨져 있는 유적, 어느 남작가 호수 아래에 있는 보물, 미래에 벌어질 후작가의 이권 다툼 등의 황제가 군침을 흘릴만한 정보가 가득했다.
‘나는 할 수 있어.’
린다는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을 보며 다짐했다.
똑똑똑.
“아가씨! 메리예요. 깨어나셨나요?”
“응. 들어와.”
린다의 전속 하녀인 엘사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가 들려 있었다.
“오늘은 제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 계셨네요. 어쩐 일이세요?”
“눈이 금방 떠졌어. 그런데 엘사…. 기분이 좋아 보이네?”
“당연히 기분 좋죠. 오늘 깨어나자마자 들은 사실인데… 제국이 이번에도 승전했대요.”
린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알기로 소설 속에서 내전이 몇 번 일어나긴 했어도, 제국의 승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제국의 승전이란 곧 제국 외의 세력과 전쟁을 벌여 이겼다는 말이니까.
“…승전? 그게 무슨 소리니?”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제국은 톨토스 왕국과 전쟁 중이었잖아요.”
“…톨토스 왕국이라면 드워프의 왕국…?”
“네. 맞아요. 이번에 황제 폐하께서 톨토스의 산왕과 드래곤을 잡아 죽이셨대요. 3,000년 넘게 살아온 고룡이라던데…. 정말 황제 폐하는 인간이 아니라 신인 것 같아요. 황제 폐하는 천신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말이 있던데…. 드래곤을 잡아 죽인 걸 보면 사실이 아닐까요?”
“제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이라니… 마, 말도 안 돼. 그, 그리고 아무리 황제라도 혼자서 드래곤을 죽일 수 있을 리가…. 노, 농담하지 마. 엘사.”
“농담 아니에요. 이번에 제국이 톨토스 왕국을 정복했어요. 톨토스 왕국민들은 모두 제국의 노에가 되었죠. 하르멜 왕국의 쌍익족이 그러했듯이.”
“하르멜 왕국?”
“자꾸 왜 그러세요. 황제 폐하께서 제국을 침략한 하르멜 왕국의 30만 대군을 혼자서 물리치시고, 대장군을 시켜 하르멜 왕국을 정복하게 한 이야기는 누구나가 다 알고 있잖아요.”
“…….”
린다의 두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제국은 지금 상태에서 전쟁을 벌일 여력이 되지 않는다. 황제는 내부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건 몇 년 뒤의 이야기고, 그 상대는 하르멜 왕국도, 톨토스 왕국도 아니다.
“엘사. 황제 폐하의 이름이 무엇이니.”
“유진 벨라카로스 황제 폐하시잖아요. 7일 동안 침대에 누워만 계시더니…. 혹시 병이 더 악화 되셨나요? 의사님을 부를까요?”
“…유진 벨라카로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남자가 맞지?”
“전 직접 보지 않았지만 그렇게 들었어요. 아, 레일라 아가씨에게 물어보시는 게 어때요? 레일라 아가씨는 주기적으로 황궁에서 황제 폐하를 만나시니까 황제 폐하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실 거예요.”
“언니가 그를 만난다고…?”
다르다.
자신의 이름과 외모가 소설 속의 여주인공과 똑같으나, 소설 속의 내용과 달랐다. 그녀는 혼란스러움에 입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