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1화 〉 851. 그대를 위한 폭군
모르가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랑드 왕국의 수도를 쳐다봤다. 벨라카로스 제국의 수도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가진 화려한 기사의 도시에는 붉은 버섯구름이 피어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피부가 찌릿거리고 기분이 나빠진다. 몸을 감싼 마법이 아니었다면 확실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저 버섯구름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고룡의 브레스에 버금가는 마법이 아닌 무언가라는 것.
‘…황제는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모르가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랑드는 모르가나가 기대하고 있었다. 꾸준히 시간을 들여 기사들의 수준을 끌어 높이고, 마녀의 샘까지 이용해 성배의 힘을 레온 그랑드 국왕에게 주었다. 성배와 엑스칼리버의 힘이라면 황제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 했으니까.
특히나 소유주의 신념이 고결할수록 아군에게 힘을 주는 엑스칼리버라면 제국의 군대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드래곤 2마리까지.
‘가장 기대하고 있던 카드가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질 줄이야…. 설마 황제는 저 힘을 더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은 그만뒀다. 그게 가능했더라면 훨씬 이전에 사용했으리라.
‘그랑드 왕국은 끝이야.’
살아남은 귀족들이 있다곤 하나, 수도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이 장면을 보고도 벨라카로스 제국에 대항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구심점인 레온 그랑드도 없다. 벨라카로스 제국은 느긋하게 그랑드 왕국에 들어와 지배하면 된다.
‘남은 카드는 셋이네.’
수인족의 슬레이드 제국과 엘프의 메일로드 왕국, 그리고 벨라카로스 제국 내부에 심어둔 것들.
메일로드 왕국은 모르가나도 쉽게 조종할 수 없었다. 엘프는 기본적으로 마녀족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대되고, 가능성이 높은 건 슬레이드 제국이야.’
모르가나는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는 대륙 서쪽, 모래로 가득한 사막에 나타났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공간 이동 마법이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지 살짝 피곤해졌다.
모르가나는 마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슬레이드 제국의 술탄을 찾아 움직였다.
사막에 자리 잡은 수많은 천막들. 그중에서 가장 화려한 천막으로 향했다. 모르가나는 마법을 이용해 술탄의 천막안으로 몰래 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들키고 말았다.
“오오, 모르가나. 벌써 짐의 곁으로 올 줄이야…. 그 미덥지 못한 애송이는 버리기로 했소?”
메하트 슬레이드. 구릿빛 피부에 모래를 닮은 금발과 진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다. 그의 머리에는 사자의 귀가 있었다. 그가 바로 슬레이드 제국의 술탄이다.
가벼운 천 한 장을 몸에 걸친 술탄은 나른한 분위기를 흘리며 구릿빛 피부의 아름다운 여성 2명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무희 출신의 첩이다. 머리 위에 고양이 귀가 삐죽 솟은 그녀들은 술탄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상태였다.
모르가나는 마법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풍만한 몸매와 요염함을 숨기지 않는 모르가나에 술탄의 미소가 진득해졌다. 원초적인 욕망이 섞인 눈이 모르가나의 몸을 훑는다.
“술탄. 일이 꼬였어.”
“무슨 일이오? 그랑드의 애송이가 엑스칼리버를 잃어버리기라도 했소?”
“그것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 출병을 하기도 전에 수도에 황제가 나타났어.”
“황제 혼자서 말이오? 그럼 도리어 황제가 위험했을 텐데?”
“그 반대야. 그랑드의 수도는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어.”
“그건 또 뭔…. 좀 더 자세히 말해보시오, 모르가나.”
술탄은 진지해진 자세로 모르가나의 말을 듣고 한탄했다.
“드래곤 두 마리까지 함께 없애버리다니…. 설마 황제가 그 정도 일 줄이야.”
“아마 그 알 수 없는 힘은 두 번 쓰기 힘들 거야.”
“그래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겐 승산 자체가 없소.”
술탄은 후퇴를 생각했으나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웠다. 여기서 후퇴하는 건 의미 없었다.
벨라카로스 제국은 결국 대륙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움직일 테니까. 권력과 정복, 여자에 미친 폭군은 자신을 살려두지 않으리라.
“모르가나. 짐은 말이오. 방금 불길한 상상을 하고 말았소. 짐의 군대가 벨라카로스 제국에 패배하고, 황제의 손에 짐의 사막이, 짐의 아내와 딸들이 유린당하는 불길한 상상이오.”
“술탄이 약한 소리를 다 하네.”
“그만큼 상대가 강적이오. 모르가나, 그대가 짐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오만….”
술탄의 말대로다.
유진 벨라카로스 황제는 강적이다.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 해도 납득 될 정도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슬레이드 제국이 그랑드와 메일로드와 연합하고 황제를 죽이는 데 성공하면 받기로 한 보상 중 하나를 미리 받고 싶소.”
“그건 나한테만 이야기해서는 안 될 텐데?”
그랑드 국왕이 죽었다고 해도 메일로드의 여왕은 버젓이 살아 있었다.
“괜찮소.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니.”
모르가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술탄을 쳐다봤다.
“끝까지 발뺌이오? 황제를 죽이는데 성공하면 그대는 짐의 여자가 되기로 하지 않았소.”
술탄의 눈에서 질척한 욕망의 빛이 흘러나온다.
“내가 싸구려로 보여? 수작 부리지 마. 날 안고 싶으면 황제 정도는 죽여 보라고.”
“…하하. 역시 그렇게 나오시는구려.”
술탄은 모르가나의 말에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은 더욱 불타오른다.
“사실 그대가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면 실망했을 것이오. 그대는 그대의 말대로 싸구려 여자가 아니니 말이오. 그대는 승리와 함께 가질 수 있는 보상. 짐은 그대를 얻기 위해 더 의욕적으로 전쟁을 벌일 수 있소.”
모르가나는 미간을 좁혔다.
“황제도 황제지만, 당신도 썩 좋은 술탄은 아니네.”
“그래도 황제보다는 낫지 않소. 듣기로는 얼마 전에 초야권을 시작했다지? 그 대상은 귀족이고, 백성이고, 노예고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통용된다고 들었소.”
초야권.
결혼하는 여자의 첫날밤을 가지는 권리. 황제는 이 미친 제도를 실제로 시행했다. 불가능할 것 같으나, 황제는 해냈다.
다만 황제가 실제로 안는 여자는 일정 수준 이상의 미녀뿐이고, 그 외의 여자들은 황제의 성기를 본뜬 특수하게 만들어진 마법 딜도로 순결을 깨야 했다.
초야권은 황제에게 선동당해 황제를 찬양하던 제국민들을 돌아서게 만들었고, 모든 귀족이 황제를 적대하게 했다.
“짐 또한 제국을 다스리는 군주로서, 벨라카로스 황제가 때때로는 부럽게 느껴진다오. 짐에게도 그만한 절대 권력이 있다면…. 하하.”
“황제는 미쳤어. 모든 여자에게 자신의 씨를 뿌리고 있어.”
모르가나는 황제가 배포한 마법 딜도를 확인했다. 마법 딜도는 인조 성기였다. 초야권의 대상이 되는 여자들은 이 딜도를 성기에 넣어 만족시켜야 한다. 딜도를 만족시키면 안에 들어 있는 정액이 분출되고, 마법의 힘으로 여자들은 100% 임신한다.
“그 또한 남자의 로망 아니오. 허나, 로망은 로망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법이지. 모르가나, 마녀섬은 어떻소?”
모르가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마녀들은 도망쳤어. 어머니가 죽고, 성배에 에너지를 채우느라 마녀의 샘을 전부 다 써버린 탓이 컸지.”
마녀들은 원래부터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다. 그녀들이 존경하는 대마녀가 죽었을 때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모르가나가 마녀의 샘을 멋대로 전부 사용하자 화를 내며 마녀섬을 떠났다. 그중에는 모르가나에게 저주를 날린 마녀들도 있었다. 모르가나는 그 마녀들에게 역으로 저주를 걸어줬다.
“흐음. 고생이 많구려.”
“그쪽은 어때?”
“짐은 술탄이오. 사막의 전사들은 술탄을 위해 적을 죽일 것이오.”
“믿음직스럽네.”
모르가나는 술탄과 함께하기로 했다. 원래는 뒤에서 연합을 조종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은 이미 최악이었다. 그녀가 현재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술탄을 돕는 것뿐이다.
???
나는 가마 위에 앉아 무심한 눈으로 정면을 쳐다봤다.
사막의 군대가 있었다. 슬레이드 제국군이다. 듣기로는 저쪽도 술탄이 직접 군대를 이끈다고 한다.
‘뭐, 이 세계에선 군주가 직접 전장에 나서는 것도 특이한 일이 아니지.’
이 세계의 군주는 대부분이 특별한 힘을 가진 자들이다. 평범해서는 백성을 이끌지 못한다. 백성들이 군주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폐하. 적의 수는 100만에 달하옵니다. 그 전원이 병사인 건 아닌 듯 하오나… 예상보다 훨씬 많나이다.”
루테온이 말했다. 이쪽은 20만이 전부였다. 5배. 말이 5배지. 80만 차이다.
게다가 여기는 슬레이드 제국과 벨라카로스 제국의 국경이 맞닿는 곳, 사막이다. 내 명령에 따라 성벽을 버리고 사막으로 나온 것이다.
“저들 전원이 병사가 아니라고?”
“사막의 부족들을 전부 끌고 온 모양이옵니다.”
“왜지? 뒈질 때는 다 함께 뒈지는 풍습이라도 있나?”
“사막은 북부 이상으로 척박한 곳이옵니다. 동시에 빈부 격차가 심한 곳이기도 하옵니다. 역사적으로 벨라카로스 제국을 가장 많이 침략한 곳은 슬레이드 제국이옵니다. 벨라카로스의 풍부한 자원과 생명력 넘치는 땅을 빼앗기 위해서이옵니다.”
“즉, 짐의 영토를 빼앗고, 그곳에 바로 터전을 만들겠다?”
“아마 그럴 것이옵니다.”
“건방진 것들.”
나는 피식 웃었다.
분노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내게 정복당할 놈들이었다. 도리어 기대가 된다. 고양이 수인 미녀, 강아지 수인 미녀 등등 온갖 미녀 수인들을 갖게 될 테니까.
“탈모르 후작.”
“예, 폐하.”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음침한 대머리 노인이 내 앞으로 나왔다.
“그대는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군.”
“신은 이 차림이 편한지라…. 폐하께서 불편하시다면 당장 갈아입겠사옵니다.”
“됐다. 늙은이가 어떤 옷을 입든 관심 없다.”
나는 이 전장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굳이 이곳에 온 건 구경하기 위해서다.
“탈모르 후작, 명령이다. 흑마법의 정수를 짐에게 보여봐라. 그대가 세운 흑마탑이 짐을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흑마법의 진수, 이곳에서 보여드리겠나이다.”
탈모르 후작이 물러났다. 흑마탑 소속의 흑마법사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탈모르 후작이 지시를 내렸고, 흑마법사들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탈모르 후작이 흑마법을 사용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그곳에서 뼈만 남은 드래곤이 나타난다. 드워프 왕국 톨토스에서 내가 죽인 지룡을 언데드로 만든 것이다.
시퍼런 기운을 품은 본드래곤은 위엄차게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슬레이드 제국군을 향해 날아가 브레스를 내뿜었다. 끈적한 진액 같은 다크 브레스가 적들을 휩쓸었다. 적의 10만 이상의 병력이 그대로 몸이 썩어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원래는 배 이상의 피해가 났을 테지만, 슬레이드 제국군의 마법사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방어 마법을 전개한 덕분이다.
‘지룡이 내뿜었던 용암 브레스에 비하면 절반도 나오지 않는 수준이군. 용암 브레스였다면 최소 50만 이상은 죽였겠지.’
드래곤 하트도 없는 빈껍데기 언데드 드래곤이라 생각하면, 대단한 위력이긴 하다.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 나를 증오하라! 나를 원망하라! 나는 기꺼이 죽은자들의 증오와 원망을 받을 것이니, 너희는 나의 충실한 종이 되리라!”
흑마법사들이 붉은 마석을 번쩍 들어 올리며 흑마법을 펼쳤다. 다크 브레스에 당해 죽었던 적군들이 언데드가 일어난다. 언데드는 생전의 동료를 향해 뛰어들었다.
‘저 붉은 마석…. 생명력을 저장시킨 마석이군.’
생명력 마석은 한 무더기나 있었다. 그동안 수십 만이 넘는 인간을 죽이고 축적한 생명력. 탈모르 후작은 그것들을 모두 사용할 목적으로 전장에 가져왔다.
‘흑마법. 배척받는 이유가 있어. 굉장히 강력하군.’
언데드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거기에 죽음의 기운을 흡수한 언데드는 진화까지 한다. 전쟁은 죽음의 기운으로 넘쳐나니 언데드는 시간이 점점 강해진다. 언데드 중에서도 잘 싸우는 스켈레톤이 있었는데, 그놈은 적을 죽이고 생명력을 흡수해 여러번의 진화를 걸쳐 데스 나이트가 되어 전장을 종횡무진 날뛰었다.
압도적이다.
‘이 전쟁은 생각보다 시시하군.’
그렇게 생각할 때, 놈이 나섰다. 구릿빛 피부에 사자의 꼬리와 귀를 가진 남자. 나는 그에게서 거대한 존재감을 느꼈다.
‘저게 슬레이드 제국의 황제…. 술탄인가.’